평소와는 다른 출근길이었다. 가을은 정부와 민간 협업 사업으로 진행하는 연초 정책 설명회에 참여하기 위해 시청으로 향했다. 기업 및 관련 기관에 정부 지원 정책 중 법률 관련 부분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간단한 PT발표 후 개별 부스에서 민원을 응대하면 됐다.
조금 일찍 도착해 행사 주체자와 인사를 나누고 발표 대기 라인에 앉아 발표 서류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잠시 후 내빈들이 하나 둘 자리를 메우더니 시작 무렵에는 빈자리 하나 없이 대강당이 가득 찼다. 식순대로 진행되어 가을의 차례가 되었고 가을은 연습한대로 무리없이 발표를 끝냈다. 행사는 계속 진행됐지만 가을은 강당을 빠져나와 개별 상담 부스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내빈들과 개별 상담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열 댓 명 정도의 사람들과 개별 상담을 마치고 잠시 짬이 났다. 핸드폰을 보니 강당에서 진행되는 본식도 마무리를 할 시간이었다. 테이블에 놓인 홍보 책자를 들춰보고 있는데
저..아직 상담 가능한가요? 여성의 질문이 들렸다.
가을은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쇼크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혜선..
반사적으로 이름을 읊조렸다.
상담을 요청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변호사님. 상담..너무 늦은거 아니죠?
아..아니..괜찮아..여긴 무슨 일로..
가을은 너무 당황하여 아무 말이나 뱉는 듯 했다.
나...회사 그만두고 지금은 조그만 사업하고 있어. 정부 지원책..사업에 도움될 것 같아 내용 들으러 왔거든. 근데 연단에서 널 본거야. 가을이 너 지금 나 봐서 놀랬지? 난 아까 너 봤을 때 지금 너보다 더 놀랬어.
혜선이라는 여성은 꾸밈없이 웃었다. 혜선의 웃음을 보고 나서야 가을은 겨우 미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혜선의 뒤로 한 건의 상담이 더 있는 것을 알아챘다.
혜선아. 네 뒤로 한 명 더 있어. 미안한데 조금만 기다려줘. 저 분 마저 응대하고 같이 나가서 차 한 잔 하자.
혜선은 고개를 끄덕였고 가을은 마지막 상담을 진행했다. 당연하게도, 가을은 상담을 하는 내내 혜선을 떠올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빨리 상담이 마무리되길 바랄 뿐.
행사 주최측에 인사를 하고 복도를 걷자니 엘리베이터 옆에서 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 빨리 한다고 했는데...오래 기다렸지?
아니. 15분 정도? 마지막 상담인한테 미안하네..가을이 넌 정신이 없어서 대충 끝냈을테니. (웃음)
여전히 날 잘 아는구나. (웃음)
가을과 혜선은 인근 카페로 가는 동안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이혜선..가을의 직속 대학 선배. 신입생으로 들어온 가을에게 혜선은 마냥 좋은 선배였다. 친절했고 스스럼이 없었다. 남고를 나온 가을에게 털털한 여자 선배는 다소 신기한 세상이었다. 이성과 대화하고 술을 마시고 스터디를 하는 그런 지극히 평범한 대학 생활이..혜선이 없었다면 가을에겐 그리 평범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혜선은 쑥맥같은 가을이 좋았다. 순수해보였고 새내기답지 않게 진중했다.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하고 다니는 동년배 친구들보다 가을이 훨씬 대화 상대로 좋았다. 그렇게 자주 어울리다보니 둘은 자연스럽게 캠퍼스커플로 불리고 있었다. 사귀자는 말도 없었고 커플링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가을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인이 된 게 너무 다행스러웠지만 한편으로 혜선에게 내내 미안했다. 가을이 2학년이 됐을 때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혜선에게 뒤늦은 반지를 전하기도 했다.
어떻게 지내? 가을은 커피를 시킨 후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혜선에게 물었다.
나..벌써 한 번 다녀왔어. 혜선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이혼...?
혜선은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가을은 뭐라고 대화를 이어갈지 몰라 커피만 쳐다봤다.
다행인지..애는 없어..너무 서둘렀나봐. 돌이켜보면..서로 잘 몰랐는데..학력, 직업 비슷하고 종교나..특별히 모난 곳 없어 보였고 좋은 사람 같아서..하긴 뭐 다들 그랬으니 결혼했겠지만..남들 헤어지지 않고 사는 거 보면 다들 잘 참는건지..아님 내가 운이 없는건지..그렇게 됐어..
잘 살길 바랬는데..겨울은 겨우 한마디를 건냈다.
가을이 넌? 결혼했어?
아니..아직.
아직? 그럼..곧 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 노력중이야..
바로 결혼 못하는 사정이 있는거야?
아니..딱히 그런건 아니고..그런거 있잖아. 친구들에게도 소개해야 하고 양가 부모님 서로 인사해야하고 그런 일들..
아..그렇지. 시간이 좀 필요한 일들이 있긴 하지..그래도..늦어도 올해 안엔 하겠네..
그래..가을은 혜선의 얼굴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가을이 넌 하나도 안변했다. 옷 입는 스타일이나 말투도 그렇고..피부도 20대 같아. 저속노화 비법이 있어? (웃음)
저속노화는 무슨.. 우리..얼마만에 본거지?
졸업하고 처음이니..10년 정도 됐나..모르겠네..아..전화번호 바꿨어? 몇 년 전에 상혁이 우연히 봤는데..너랑 연락 끊겼다고 하던데..
아..상혁이..걔 이름도 오랜만이네..중간에 한 번 바꿨어. 인맥 거지라고 하나? 한 때 유행이었잖아..핸드폰에 저장된 불필요한 인맥들.. 한 번 정리하고 싶었거든.
그렇구나..명함 갖고 있어?
가을은 명함지갑을 꺼내 혜선에게 명함을 하나 건넸다. 혜선도 자신의 명함을 가을에게 줬다. 둘은 서로의 명함을 한동안 쳐다봤다.
사계절..어떤 회사야? 가을은 명함을 보며 물었다.
아..천연 비누 제조..목욕 용품 만드는 건데..비누가 주긴 하지. 사람들이 1년 내내 같은 비누를 쓰잖아? 계절별로 그 계절에 맞는 컨셉의 비누를 내놓는게 사업 모델이야. 아직 신생 스타트업이야. 매출도 얼마 안되고..(웃음)
혜선은 사업 얘기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가을이 네가 변호사니까..우리 회사 법률 고문 좀 해주라. 내가 밥이며 술은 법카로 살게. (웃음)
그 정도야 얼마든지..(웃음)
먼저 이별을 말한 건 가을이었다. 하지만 혜선이 말했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둘은 서로에게 지쳐 있었다. 모든 이별의 길목에는 애정의 반감기가 놓여있게 마련이다. 한 때 서로를 빠져들게 했던 매력이 애정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는 것. 가을은 해맑은 혜선의 행동이 철없이 느껴졌고 혜선은 가을의 진지함이 답답했다. 혜선의 입장에서 가을의 진지함은 타인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결국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택했다. 둘은 자주 다퉜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지만 땅이 굳을 새도 없이 다시 비가 내렸다. 질척거리는 땅에선 생명이 뿌리를 내릴 수 없다. 한 때 꽃까지 피웠던 줄기는 결국 뿌리가 뽑혀 땅 위로 던져졌다.
지금 와서 이런 얘기 웃기지만..
가을은 혜선의 눈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미안했어. 내가..많이 서툴렀던 것 같아. 헤어지고 나서 누굴 못만나겠더라..우리에 대해 곱씹어볼수록 내 잘못으로 널 상처줬다는 결론만 확실해져 가슴이 너무 아팠어..
아냐. 내가 더 문제였지 뭐. 넌 예전 그대로의 가을일 뿐이었는데 널 대하는 내가 바뀐거야. 봐봐. 결혼하고도 세월 따라 또 마음이 달라져 이혼하잖아. 이혼하기 쉽지 않은데..그 어려운 걸 또 이렇게 해내네..
혜선은 체념하듯이 웃었다.
어떤 사람이야 예비 신부는? 혜선은 화제를 돌리려는 듯 겨울에 대해 물었다.
좋은 사람. 가을은 웃으며 대답했다.
더 자세히 말해봐. 혜선의 말에
자기 일 열심이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아. 내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해주고..나와는 달리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그래서 더없이 밝은 느낌을 주는..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 마치..햇살 같다고 할까. 음울한 골방 같은 내 인생에 찾아온 더없는 행운 같달까. 잃고 싶지 않아. 날 완성시켜주는 그 빛..
와..멋진 사람이네..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찬사같은데..(웃음)
그 땐 너나 나나 어렸으니까..
잘해줘. 그 사람..20대의 우리처럼 서로의 상처에 소금 팍팍 뿌리지 말고. (웃음)
참..세월이라니. 네가 나의 조력자가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가을은 알듯 모를듯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가을이 너도 내 조력자가 되죠. 사업에서도 인생에서도..
그래..능력이 닿는만큼..
커피와 간단한 다과로 점심도 건너뛴채 한참을 얘기한 두 사람. 혜선은 손을 가볍게 들어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멀어지는 혜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가을. 혜선이 어떤 사람이었나. 혜선을 잊지못해 술만 마시면 습관처럼 전화를 걸었던 주사를 없애기까지 수 년이 걸렸다. 주도적으로 삶을 살면서 남도 배려할만큼 마음이 넉넉했던 사람. 밝고 긍정적이라 우울한 자신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이었던 사람. 자신을 완성시켰던 소중한 조각..그래..그런 사람이었다. 지금의 겨울과 하등 다를 것 없는..그런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