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by 정자까야

선배. 상철이 기억나요? 한 달 전쯤 봄이는 겨울과 통화가 되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상철이? 연극부..?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기억하지. 연출 쪽이었나..봄이 네 동기였던 것 같은데..


오..기억력 좋으시네요. (웃음)


얘. 나 너무 늙은이 취급하는거 아니니? (웃음)


농담..농담..(웃음) 선배. 저 상철이랑은 쭉 연락하고 지내거든요. 이번에 상철이가 보조 연출로 참여한 연극이 상영하거든요. 꼭 와서 보라고 신신당부해서..선배도 아니까 같이 갔음 해서요.


그래? 겨울은 고민했다. 상철이를 알지만 개인적으로 친분은 없었다. 하지만 봄이도 고민 끝에 전화했을 것이다. 봄이와 함께한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어찌됐든 봄이를 인정하기로 한 마당에..


겨울이 주저하는 느낌을 알았는지 봄이는 한마디 덧붙였다. 선배한테 미안하지만 연극 끝나곤 상철이랑 시간 보내기로 해서..선배는 연극만 보면 되니..시간 오래 걸리진 않을거에요.


봄이의 말에 더 미안해진 겨울은 그러자고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약속한 주말. 봄이는 이미 와 있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상철이는 잠시 나와 봄이와 겨울에게 인사를 했다. 대학 시절 동아리를 직업으로 삼은 후배를 보니 대견하기도 하고 선택 하나가 어떻게 인생을 바꾸는지를 목도하여 신기하기도 했다.


상철은 겨울이 찾아줘서 너무 영광이라며 몇 번이나 고마워했다. 자신은 직업상 연예인을 종종 보지만 그 어떤 여배우보다 보고싶은 사람이라며. 봄이는 옆에서 쓴 웃음을 지었고 겨울은 그저 웃기만 했다. 상철은 3월의 끝자락에 결혼할 예정이고 두 사람이 와준다면 더없는 영광일 거라는 말을 남기곤 무대로 돌아갔다.


훌륭한 공연이었다. 겨울은 멋진 공연을 선사해준 연기자와 스태프, 특히 꿈을 향해 나아가는 한 명의 후배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낮 공연이었는지라 극이 끝났을 때도 오후 4시가 채 되지 않았다.


선배 미안해요. 전 상철이한테 가볼게요. 이제 뭐하실거에요? 바로 귀가?


글쎄..사실 아무 생각 없어. 집에 가면서 생각해보려고. (웃음)


극은 어땠어요?


너무 좋았어. 나 이런 가족 극 너무 좋아하거든. TV에서 보던 배우들 눈 앞에서 본 것도 신기했고..연기는 말할 것도 없지. 아..여기 극장도 시설 좋더라..근데 혹시 여기 안도 타다오가 설계 참여했을까..


어떻게 알았어요? 봄은 놀라며 물었다.


아니..난 건축 1도 모르는데..(웃음) 안도 타다오 노출 콘크리트는 너무 유명하잖아..빛의 십자가도 그렇고..아까 잠깐 둘러볼 때 건물 내부가 전부 노출 콘크리트고 햇살이 건물 내부로 쏟아져서...잠깐 그런 생각 들었거든.


역시..선배는..눈썰미가 대단해요. 맞아요. 일전에 상철이랑 통화할 때 그러더라구요. 안도 타다오가 설계했다고.


겨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그거 알아요? 제가 오기 전에 검색해 봤는데 노출 콘크리트 공법이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고..단지 외벽 마감을 할 돈이 없어서 그리 했다네요..


아..그렇구나. 몰랐어..


세상 일이 의외로 그런 것 같아요. 의도했던 대로 흘러가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대부분은 우연에 우연..뜻하지 않은 사건이 도화선이 되죠. 제가 선배 주변 멤도는 이유기도 해요..


무슨 뜻인지 한번에 이해하지 못한 겨울. 봄은 너털 웃음을 웃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뭐 대단한 건 아니구요. 그게 제 전략이라구요. 우연..우연..뜻하지 않은 행운..어처구니 없지만 그게 지금의 제가 기대는 최고의 카드에요. 마지막에 선배 곁에 있는 사람..누굴지 누가 알겠어요. 선배? 어머님? 아무도 몰라요. 어떤 일이 있을지..선배 주변을 멤돌다가 무주공산일 때 선배를 채 가는 게 제 작전이라구요. (웃음)


봄이는 손을 흔들고 극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남겨진 겨울은 봄이의 말을 생각하며 천천히 지하철 역으로 걸었다.


Ps.

김 봄. 밀어내도 모른 척 다시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실패를 빨리 잊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전략가같다. 가을처럼 진중하지도, 여름처럼 낭만적이지도 않지만 봄은 봄만의 색을 갖고 있다. 울고 불고 않고 깔끔하게 다음을 기약하는..이른바 역사의 쓰리쿠션은 이 전략가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미래를..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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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지하철로 향하다 문득 여름의 집이 이 근처임을 깨달았다. 겨울이 스벅에서 근무할 당시 여름은 거의 서울을 횡단하여 커피를 마시곤 했다. 수 년 전을 회상하며 겨울은 웃었다. 지금은 겨울의 인생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을 위해서 지금은 너무도 큰 의미가 된 그 사람을 포기했었다. 그 때..여름을 만났으면 어땠을까..겨울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이 가정은 부질없다. 겨울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신의를 저버리고..마음 끌리는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겨울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기에.


걸음을 멈추고 겨울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고 깨끗한 겨울 하늘. 다시 만났으니 됐어. 그 때의 여름씨에게 미안해하지 않을거야. 그렇게 말하듯이 겨울은 찬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여름의 번호를 눌렀다. 못만나도 어쩔 수 없지만..집에 가서 후회하는 것보단 낫다는 심정으로.


신호음이 두세번 울리다 여름의 음성이 들렸다. 마침 근처 카페에서 작업 중이었다는 여름.


여름이 알려준 카페로 가니 여름이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여름씨. 추운데 뭐해요?


아..겨울씨. 갑자기..서프라이즈 뭐에요? 너무 좋네요. 이런 이벤트. (웃음) 들어가요. 겨울씨 온다길래 작업 하던거 덮었어요. 일이 되겠어요? 안에서 기다릴 수 없어 나온거에요. (웃음)


겨울은 그런 여름을 보며 여름이 사랑했던 연인들은 참 행복했을거란 생각이 스쳤다. 더불어 지금은 그 대상이 본인임이 너무도 감사했다.


커피 한 잔 해요. 아님 겨울씨 좋아하는 사과 쥬스..

(웃음)


겨울은 머플러를 풀며 귀엽게 눈을 흘겼다.


여긴 웬일이에요? 설마 저 보려고? (웃음)


설마요..겨울은 웃으며 대답했고 여름도 무안함에 크게 웃었다.


동아리 후배가 연극 보조 연출한다고 초대해서..연극 보러 왔어요. 봄이랑요..끝나고 여름씨 집이 이 근처인거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다른 곳 갔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는데 다행이에요.


아..그러셨구나. 전 주말에 특별한 일 없음 집 근처 카페에서 자주 시간 보내요. 책도 읽고 글도 쓰구요.


그래요? 몰랐네요. 전 시간 있을 때마다 춤 추러 다니는 줄 알았는데요..(웃음)


아..그건..가끔 가요. 아주 가끔..(웃음)


겨울은 보고 왔던 연극 내용이나 감상에 대해 들려줬고 여름은 특별한 말 없이 경청했다.


여름씨. 오늘은 왠지 말이 없으시네요?


아..겨울씨. 겨울씨 오기 전 유투브 영상을 하나 봤는데 거기 나온 여배우가 자기 이상형이 말 잘 들어주는 사람..특히 충고 같은 거 하지 말고 그저 들어주는 사람이라길래..웃으며 보다가 뜨끔했거든요. 난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인가 싶어서..그리고 그저 말을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미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진짜일까 싶기도 하고..


아..그래서 절 대상으로 실험을 하셨던 거군요?


아니..실험이라기보다는..자기 반성이랄까요..여름은 허공을 보고 웃으며 대답했다.


여름씨..그 마음 오래오래 간직해주세요. 미인이든 아니든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는 없을거에요. 그런 얘기 있잖아요. 잔소리는 싫지만 더 싫은건 충고라고..(웃음)


아..겨울씨가 그리 얘기하니 더 와닿아요. 생각보다 더 좋은 영상이었네요. (웃음)


여름씨. 우연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영향이 있다고 봐요? 겨울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우연이요? 글쎄요. 회사에서 제일 많이 듣는 얘기가 운칠기삼이긴 해요. 세상일 운이 7할이라는 거죠. (웃음) 근데..갑자기 왜요?


겨울은 잠시 망설이다 봄이와의 대화를 들려주었다. 여름은 이번에도 조용히 경청했다.


겨울의 말이 끝나자 여름은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는


봄이라는 사람. 생각보다 괜찮은 친구에요. 처음에는 그저 왕재수라고만 생각했어요. 아니 싹아지도 없었죠. 미안해요. 겨울씨..그래도 겨울씨 후배인데..


겨울은 여름의 다소 거친 언어에 왠지 모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낯선 이에게, 그것도 연적에게 고분고분할 리가 없는 봄이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근데 시간이 좀 지나면서 겨울씨한테 간접적으로 듣는 모습은..그래도 그 친구가 오냐오냐하는 집에서 자라지만은 않았구나 싶더군요. 기본은 있는 친구에요. 그냥 기본이 없는 예의 없는 인간이었다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무시해버릴텐데..그럴 수도 없으니 저로선 참..경쟁자들이 이렇게 괜찮으면 안되는데..씁쓸한거죠. (웃음)


그리고..여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봄이씨의 그 말..우연을 기다린다는..세상 일 의외로 많은 일들이 우연이라는..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실 언더독인 두 명은 전략이 같을 수밖에 없구요. 제가 가진 최고의 카드도..우연이니까요.


겨울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씨. 세상이 얼마나 우연으로 가득찼는지 제가 일례를 들려줄까요?


겨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웃음을 참느라 힘들어했다.


왜요? 어리둥절해하는 여름에게


아뇨. 여름씨. 그리 말하고 싶은데 어찌 참았나 해서..(웃음)


(웃음) 아니..겨울씨. 들을 땐 듣고 말할 땐 해야죠. 연애란게 티키타칸데..


네 네..말씀하세요. (웃음)


네..그럼..(웃음) 농담 아니구요 겨울씨. 저 일하는데 민원인이 오셨어요. 1년 전인가..뭔가 저희 회사 업무처리가 맘에 안드셨나봐요. 그걸 따지려고 손수 걸음한건데..마침 담당이 자릴 비워서 제가 응대를 했거든요.


어느새 겨울은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그 분 말씀 듣고 있는데 그 분이 절 빤히 보시는 거에요. 그래서 왜 그러시냐 물었더니


혹시 과장님..며칠 전에 공덕 사거리에서 할머니 횡단보도 건너는 거 도와주시지 않았나요?


이렇게 물으시는 거에요. 근데 소름 돋았던게 제가 실제로 그 며칠 전에 출장 때문에 횡단보도 건너는데 할머니 한 분이 불편한 다리를 끌고 건너시느라 신호등이 깜빡이는데도 절반도 못가셨거든요. 사람들이 이미 반대편으로 다 건너고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제가 할머니 옆에서 손 들고 부러 천천히 걸었어요. 신호등은 빨간색으로 바뀌었지만 대기 중인 어떤 차도 움직이지 않았고 경적도 울리지 않았어요. 전 감사함에 대기하고 있던 차들을 향해 고개른 숙여 인사를 하며 걸었구요.


민원인은 그 때 맨 앞줄에 대기하고 있던 차 중 하나였던 거에요. 그 때 운전을 하면서 참 보기 좋은 장면이라 인상 깊었고 그 때 할머니를 도왔던 사람을 유심히 봤는데..지금 보니 저랑 똑같았다고..


겨울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름씨. 정말이에요? 진짜 믿기지 않네요..지난번 미켈란젤로 언덕도 그렇고..믿기 힘든 에피소드가 왜 이리 많은 거에요? 진짜 지어낸 얘기 아니죠?


그런 반응 당연해요. 저도 너무 놀라 말이 안나왔으니까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세상일 숨길 수 있는게 없구나 싶어 무섭기도 했고..여하튼 그 민원인은 무슨 연예인이라도 만난듯 반가워하며 제 손을 잡고 흔들었고..민원은 없던 일이 됐어요. 이런 훌륭한 청년이 있는 조직이 그럴 일이 없다며..단순 실수였을테니 정정만 해달라고 웃으며 떠나셨죠.


그럴만해요. 여름씨가 회사의 위상을 높이셨네요. 멋진 일 하셨어요. (웃음)


누구라도 그리 했을거에요.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글쎄요. 모를 일이죠. (웃음) 어찌됐든 여름씨 말대로 우리 일상에서도 영화 같은 우연이 발생하긴 하네요.


그럼요. 겨울씨. 벌써 잊었나요? 우리가 어떻게 다시 만났는지?


아..겨울은 짧게 탄식했다. 퇴근 길 붐비는 지하철에서..겨울은 여름의 바로 옆에 있었지만 서로 알지 못했다. 지하철이 잠시 크게 흔들려 겨울이 균형을 잡지 못해 반사적으로 옆 승객의 소매를 잡기 전까지는.


세상은 우연으로 가득 찼고..결과론인 것 같아요. 그 우연이 인연으로 이어지면 필연인 거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우연으로 남는..여름은 무엇인가를 잠시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우연히 일어난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할 것 같아요. 아까..운칠기삼이요? 기도 3은 있잖아요? 사람의 영역이겠네요. 그 3할의 기. 운을 운으로 끝나지 않게 노력하는 영역..


겨울의 말에


그럴수도요. 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에 다녀온 겨울은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고..집에 가봐야겠다고 여름에게 양해를 구했다.


엄마가 혼자 저녁 드시기 싫으신가 봐요. 원래 제가 연극 보고 집에 바로 올거라고 했거든요. 미안해요. 여름씨.


아뇨. 바로 귀가 안하고 절 떠올려주셔서 감사하죠. 우연한 만남이었잖아요..오늘도. 기분 좋은..우연이었죠.


겨울은 활짝 웃으며 지하철역을 향해 뛰었다. 겨울의 뒷모습을 보며 여름은 떠올렸다. 우연히 보게 된 겨울과 가을을.


그 날 여름은 평소 갈 일이 없던 지역의 백화점을 찾았다. 회사 동료의 결혼식이 인근에서 있었고 너무 일찍 도착한 여름은 유명했던 그 백화점의 카페에서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일행 중 한 명의 얼굴을 알아봤다. 겨울의 어머님. 여름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어머님은 여름을 지나쳐 갔다. 다행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카페로 간 여름. 그리고 그 곳에서 겨울을 보았다. 겨울이..어떤 남자를 안고 있는 모습을..


식장에서 여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왁자지껄한 하객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랑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질 않았다. 집에 돌아와 문을 닫고 음악을 들었다. 기억하는 건 그것 뿐이었다. 며칠 뒤 겨울을 대학로에서 만났을 때..겨울을 울게 만든 썰렁한 농담은..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그저 우연히..마음 속 불안과 절망이 입밖으로 나왔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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