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속 태풍이여..부디 그 찻잔을..

by 정자까야

여름은 야근을 하려고 동료들과 식당에 가려던 참이었다. 전화가 울렸고 저장해둔 번호의 주인은 겨울의 어머님이었다.


어머님은 시간이 괜찮으면 잠깐 볼 수 있냐고 물으셨다. 여름은 컴퓨터 전원을 끄고 어머님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늦었습니다. 바로 출발했지만..


여름은 먼저 와 기다리던 어머님께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아니에요. 저야 이 근처에 있었으니까..일정 있었을텐데 와쥐서 고마워요. 시장하면 뭐 좀 들겠어요?


아니요. 어머님. 괜찮습니다.


그럼 차라도 한 잔 해요. 겨울의 엄마는 손을 들어 마실 것을 주문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할게요. 제가 왜 보자고 한지 아시죠?


여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일전에 백화점에서 저 봤던 거 기억하시죠? 스쳐 지났지만 전 선생님 바로 알아봤어요. 그 날 겨울이 만났나요?


그랬구나..여름은 떠올렸다. 여름을 스쳐가며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다 보셨구나..다 알고 계셨구나..


아뇨. 그 날 겨울씨 만나러 그 곳에 간 건 아니었습니다. 제 개인 일정 때문에 우연히 들렀고..어머님도 우연히 뵀던 겁니다. 얼굴 알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너무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건 됐구요. 사과받을 일 아니에요. 저도 알아봤지만 인사 안했으니 피차 마찬가지에요. 그 날 그럼 겨울이는 못본 건가요?


여름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숨길 것도 없고 숨긴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제가 가려던 곳이 그 카폐였습니다. 입구에서 겨울씨 알아봤고 그 옆에 누군가 있는것도..알았습니다. 제가 놀라기도 했고 겨울씨가 놀라는 게 싫어 자리를 피했습니다. 아마 겨울씨는 절 못봤을 겁니다.


그렇군요. 어머님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댔다.

그럼 보셔서 잘 알겠군요. 우리 겨울이 좋은 사람 만나 잘 사귀고 있어요. 곧 결혼도 할 것 같구요. 그 날도 제가 그 상대와 얘기나누고 나오는 길이었어요. 조만간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온다고 하더군요.


여름은 어머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제가 지난번 부탁드렸잖아요. 겨울이 놓아달라고. 겨울이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 줄은 몰라도..겨울이를 좋아한다면..상대가 잘 되도록 물러나야할 때를 알아야죠. 이제 제발 그만 멈추세요. 겨울이도 결혼하고 아이 낳고..평범한 행복 누리면서 살 수 있게 선생님이 도와주세요.


어머님..

내내 듣고 있던 여름은 겨우 한 마디를 뗐다.


겨울씨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거 알면서도 시작했습니다. 아니..시작했다기보다는 시작됐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저도 모르게 운명의 자석처럼 겨울씨와 인연이 됐고 도저히 떼어낼 수 없어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머님 말씀하신대로 겨울씨 그 분 잘 만나고 있고 어머님 바람대로 그 분과 결혼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제가 알면서도..제 의지로는 어쩔 수가 없어서..


여름은 전신이 떨렸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님 말씀 다 이해합니다. 부모로서 당연하다고도 생각합니다. 겨울씨가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한 현재의 뒤에는 어머님의 남모를 삶의 고단함이 있었겠지요. 겨울씨가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고 존중합니다. 다만..겨울씨가 선택할 수 있도록, 자기의 삶..자기가 선택할 수 있도록 어머님..조금만 더 지켜봐주셨으면 합니다. 어머님..어머님이 키운 딸입니다. 그 딸이 얼마나 현명한 여성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딸을 믿고..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길 간청드립니다.


겨울에 대한 여름의 절절한 사모곡에 겨울의 엄마는 내심 크게 놀랐다. 준비하고 외운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자리..위압적인 상대..떨리는 음성으로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는 누군가에 대한 변호는 깊고 깊은 애정이 아닌들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의 동요를 억누르고 겨울의 엄마는 말했다.


선생님 말씀 잘 들었어요. 저도..겨울이의 삶이 두 번 가능하다면 한번쯤은 순수한 애정을 쫓아가라 말하고 싶을거에요. 저도..이런 거 아실 필요는 없겠지만..저도 한 때는 그런 사랑을 꿈꿨으니까요. 하지만 선생님..인생은 한 번 뿐이잖아요. 두 번 사는 거 아니니까..한 번밖에 못사니까..그런 모험은 할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여름은 어머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어머님. 인생 한 번 뿐인거. 그렇기에 전 순수한 애정을 택할거고..겨울씨도 그러길 바랍니다. 두번이면 한번은 그럴 수 있을거라 말씀하셨지만..아니요. 안정적인 삶을 택한 사람은 두번째도 그런 삶을 택할겁니다. 결코 도전하지 못할거에요.


여름의 절실한 호소에 겨울의 엄마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겨울을 향한 이 청년의 애정이 생각보다 깊었고 자신이 쉽게 끊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자신에게 유리한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오히려 자신의 젊은 날과 대담한 선택, 등을 진 부모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모에게 끝까지 애정을 호소하던 남편이 생각나 심적 동요만 커져갔다.


어머님 아버님 진아를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제 사지가 절단나더라도..진아..배신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오로지 사람 하나만 믿고 이 못난 놈에게 진아를 맡겨주십시오.


부모님께 엎드려 울던 남편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진 겨울의 엄마는 황급히 자리를 정리했다.


됐어요. 전 할 말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그리고..제 마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좋으신 분 같은데 마음의 상처받질 않길 바래요. 겨울이의 행복을 위해 전 뭐든지 할 사람입니다. 선생님의 인생이 폐허가 되더라도..전 뜻을 굽힐 일 없습니다. 지금껏 겨울이를 위해 늘 그리 했습니다. 첫사랑, 두번째 사랑..다 그렇게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었지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겨울의 엄마는 조금 힘을 줘 말했다.


세번째는 만나지 않았으면 해요. 그 땐 이렇게 공손하게 대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겨울의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가 계산을 했다. 고개를 돌리니 여름이 일어나 있다가 자신을 보고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바르고 굳센 심지를 지닌 청년이다..지금껏 겨울이 만났던 어떤 남자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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