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야근인가요?
퇴근 무렵 여름은 겨울에게 카톡을 보냈다. 겨울은 한시간 여가 지난 후 여름에게 전화를 했다.
여름씨 미안해요. 카톡 묵음이라 이제나 봤네요.
아니에요. 일하는데 전화하고 싶지 않아서 부러 카톡으로 보냈는데 그러길 잘했네요. 많이 바쁘죠?
큰 불은 잡았어요. 잔불 끄면 열시 경엔 퇴근할 수 있을거에요. (웃음)
제가 만나는 분 직업이 소방관이었군요, (웃음)
아시는 줄 알았는데..눈치가 좀 없으시네요. (웃음)
근데 소방관이 불 끄는게 직업 아닌가요? 왜 방화범이 됐죠?
네?
왜 사람 마음에 불을 지르고 다니시나 해서요.
아..(웃음)
모르셨나 보군요. 눈치 없는건 저랑 마찬가지시네요. (웃음)
겨울은 여름과의 통화가 늘 좋았다. 별 얘기 아닌 날도 있고 오늘처럼 농담이나 주고받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자꾸 웃음이 나왔다. 목소리를 듣고 그의 하루가 괜찮았다는 것을 확인해서 좋았다.
남자친구처럼 굴어 미안하지만..식사는 하면서 일하세요. (웃음)
네 유념하겠습니다. (웃음)
겨울은 전화를 끊고 잠시 여름을 떠올리곤 웃었다. 건물 내 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 야근을 하다보니 시간이 얼추 열시경이었다. 아직 남은 동료 두어명에게 인사한 후 건물을 빠져나왔다..
여름은 전화를 끊고 동료들이 모인 식당으로 향했다. 팀장님부터 대리님까지 모두 와 있었다.
김과장 여기. 출장 다녀오느라 고생했어. 팀장님이 자리 하나를 내어줬다.
차장님. 오면서 들었습니다. 승진 축하드려요. 근데 좀 멀리 가시네요. 애들 아직 어린데..
박차장은 승진 후 지방 발령이 났다. 주말 부부를 해야할 거리다. 아직 어린 애들을 배우자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상황. 웃고 있지만 얼굴 한켠에 드리운 그늘을 여름은 보았다.
백화점에서의 우연한 목격부터 최근 어머님과의 만남, 오늘의 인사발령까지 여름의 1월은 힘겨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친구 영수는 운동을 할 무렵 가장 중요한 것이 멘탈임을 알았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는다며..여름은 영수가 말한 멘탈이 진심으로 필요했다. 학창시절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고전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수가 몸으로 익힌 그 멘탈이 필요했다.
9시가 넘고 팀장은 자리를 정리했다. 다른 날과 달리 박차장은 맥주 한 잔 더하자며 팀장과 팀원들을 붙잡았다.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을 두고 떠나야하니 이런저런 감정이 교차한듯했다. 여름은 정말 미안한 마음으로 박차장의 청을 고사했고 나머지 동료들과 헤어져 여의도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겨울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사람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쳐다보는 듯해 조금 더 눈길을 주니 여름임을 알았다. 놀란 마음에 그 자리에 멈춰섰다.
여름씨..깜짝 놀랬어요. 무슨 일 있어요?
여름은 웃으며 다가왔다.
아니..겨울씨였군요. 누군가 했어요. 멀리서 보는데 겨울씨 닮은 사람이 걸어와서..이런 우연이 있네요.
(웃음)
겨울은 체념한 듯 웃었다.
알겠어요.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네요. 엇갈렸음 어쩔뻔 했어요? 담부턴 전화해요. 여름씨 헛탕치고 상심해하는 거..그런 거 싫어요.
여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워서 어디 들어가야할텐데..여름씨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늦게 나왔네요. 카페도 다 닫았고..어쩌죠?
여름과 겨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인근 편의점을 보곤 서로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실내로 들어오자 여름에게서 술냄새가 풍겼다. 겨울은 여름에게 술 한 잔 하고 오는 길이냐고 물었고 여름은 인사발령으로 지방 발령 받은 동료에 대해 이야기했다.
부산이요? 그렇게나 멀리 가셨어요?
네..차장님은 거기 연고도 없으신데..
겨울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물었다. 여름씨도..대상이 될 수 있는거죠? 젊거나 미혼인게 제외 사유는 아니겠죠?
네..안타깝게도..여름은 슬픈 표정이었다.
다음 번 인사는 언젠가요?
아마..여름에 있을것 같아요. 상하반기 한번씩 하니.
아..여름이군요..겨울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이마를 찌뿌렸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름씨. 기왕 들어온 거 여기서 2차 어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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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씨. 안주할 것도 좀 골라오세요. 아까부터 우리 새우깡만 먹고 있다구요. (웃음)
네..아니 한 캔씩만 먹고 가자면서요. 와..겨울씨. 대박이네요. 이즘 편의점엔 먹태도 있어요.
둘은 테이블에 먹태며 마른 오징어, 새우깡 등을 펼쳐놓고 캔맥주를 두어개씩 앞에 두었다.
이 정도면 수라상 부럽지 않네요. 겨울은 웃으며 말했다.
정장을 차려입고 주말보다는 더 진하게 화장한 겨울은 커리어우먼의 느낌이 강하게 났다. 더없이 아름답고 매럭적이었다.
미안해요. 겨울씨. 복장에 어울리는 곳으로 모셔야 하는데..
여름씨 그러지 말아요. 제가 뭐라고 모시기까지 해요. 그리고 저 편의점 너무 좋아해요. 보세요. 저기 저 학생들. 얼마나 순수해요. 남녀 친구들끼리 와서 얼마 없는 돈으로 간식 먹는거..저런게 찐 행복이죠. 계산도 없고 비교도 없는..
부러 그렇게 말해준거라면 고마워요. 겨울씨는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면..그러니까 진짜로 편의점이 괜찮은 데이트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천사에요. 이즘은 고등학생들도 그리 생각 안할텐데.,
겨울이 아무 말도 없자 여름은 말을 이었다.
이즘 고등학생, 대학 초년생들은 이성을 만나도 너무 계산적이라고 하더군요. 상대가 기념일에 얼마나 좋고 비싼 선물을 사주는지, 상대가 자신을 위해 평소 얼마나 돈을 쓰는지 그런 걸 신경쓰고 친구들끼리 물어보고 한다고..
겨울은 여름을 잠시 쳐다보더니 캔을 따서 여름에게 건넸다.
여름씨..일부 그런 학생들이 있을 수 있죠. 근데 그건 조선시대에도 그랬고 로마시대에도 그랬을거에요, 언제나 어느 시대에나 그런 사람들은 있지 않았겠어요? 사람들은 밥에 돌이 하나만 섞여있어도 돌밥이라 하지만..사실 그 밥은 돌이 하나였을뿐이에요. 나머지는 맛있는 밥이었다구요. 아직 저 나이대는 순수함이 대세일거에요. 당연히 청춘은 돌밥이 아니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그렇게 믿고 싶네요..
겨울씨한테 한 수 배웠네요. 그 긍정적인 시선.더없이 공감해요. 제가 들은 그 얘기가 지극히 일부이고, 그것이 대세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래요. 이즘은 때묻지 않는 시기가 점점 어려지는 것 같은 불안함이 있어요. 그런걸 목도할 때마다 너무 슬픈거 있죠. 인생 한 번 뿐이고 나이가 들수록 원하든 원치않든 점점 계산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맞닥뜨리게 될텐데 왜 그렇게나 어리고 젊은 나이부터 그리 되려고 애쓰는지 모르겠어요. 평균 수명이니 다 떠나서 로미오, 줄리엣의 사랑, 춘향과 이몽룡의 애정은 다 저 정도 나이에서 시작된 것일텐데..그냥 사랑 하나만 보고, 다른 거 다 필요없고 오직 사랑 하나 보고 만났으면 좋겠어요. 인생에서 아주 짧은 시간 있다 사라지는 그 순수의 시대가 너무 그리워요..
여름은 캔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여름을 보며 겨울은 안주 하나를 집어 여름에게 건넸다. 여름은 웃으며 두손을 모아 받았다.
가난이 창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문밖으로 나간다는 말..여름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겨울이 물었다.
여름은 잠시 무엇인가를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충분히 일리 있고 새겨야 할 말 같아요. 결혼을 앞둔 청춘남녀에겐 특히나. 경제력 중요해요. 창문으로 가난이 들어오지 않게 경계하고 싶어요. 할 수만 있다면..그런데 겨울씨. 가끔 그런 생각도 들어요. 환기는 해야 하니 창문을 내내 닫고 살 수는 없잖아요. 창문을 열었을 때..좋은 기운, 맑은 공기만 들어오면 좋겠는데 세상 일 맘대로 되나요..가난이 들어올 수도 있다고 봐요. 중요한 건 그 순간이지 않을까. 사랑이 나가지 않게..노력하는거. 서로 한 번 더 인내하고 한 번 더 배려하면..가능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걸 믿고 싶은거에요. (웃음)
창문으로 가난이 들어올 수는 있다..사랑만..문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된다..
겨울은 혼잣말처럼 여름의 말을 읊었다.
그럼 이번엔 제가 겨울씨에게 물을게요. 세상엔 연애 대상과 결혼 대상이 따로 있다고 보시나요?
여름은 두번째 캔을 따서 겨울에게 건넸고 둘은 가볍게 건배를 했다.
둘이 같으면 더 좋을테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을거에요.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보면 둘이 같은 경우라도, 전자에서 후자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경우보단 후자를 염두에 두고 전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니..둘이 나눠지지 않는 현실은 큰 의미 없고 우리 잠재의식은 이미 둘을 구분하고 있는게 맞는 것 같아요. 근데 좀 복잡하게 설명한거 같은데..무슨 뜻인지 이해했나요? (웃음)
고개를 젓는 여름을 보며 겨울은 입을 가리고 크게 웃었다.
요는 대상이 따로 있느거 같다 이거죠? 저도 그리 생각하고..그게 솔직한 평가 같아요. 낭만을 쫓아 연애하고 현실을 인정하여 결혼하는거..속물이라고 비난할 생각 없어요. 어쩌면 그게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그게 디폴트값이죠. 비난받아야 할게 아니라 그게 지극히 평범한 삶인거..하지만 전 그리 살지 않으려구요. 낭만을 쫒아 연애하고 여전히 낭만을 쫒아 결혼까지 하길 바래요. 그 끝이 비록 파국일지라도..평균 이상의 것..그걸 꿈꿉니다.
둘은 다시한번 캔을 부딪혔다.
여름씨 말을 듣고 있자니 짐캐리의 대학 졸업 축사가 떠올라요.
짐캐리요? 미국 배우 짐캐리?
네..여름씨 들어봐요. 짐캐리의 아버지도 아들만큼 유머감각이 뛰어나셨나봐요. 하지만 밥벌이에 대한 번뇌로 회계사의 길을 걸었죠. 그런데 몸담고 있던 회계법인이 망해서 어린 짐캐리도 경제적으로 어려웠나..그랬을거에요. 그 때 생각했대요. 좋아하지 않는걸 하면서도 망할 수 있다면 차라리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망하겠다고..
여름은 겨울의 말을 듣고 무릅을 치며 말했다.
어차피 확률은 반반. 안전한 길이 안전한 길이 아니고 위험한 길이 어쩌면 그리 위험한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 멋진 축사였네요. 그 자리에 있던 학생들이 새겨 들었어야할텐데..
겨울은 웃음을 머금더니,
그 학생들은 모르겠고 우리나 새겨 듣자구요. (웃음)
여름은 겨울의 거침없는 화법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겨울은 뜨거운 심장을 가진 여자다. 무엇이 그 심장의 온도를 낮추게 하는걸까? 여름은 당장 겨울의 손을 잡고 도망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겨울씨. 가요. 저 믿고 따라와요. 많이 회자되는 말 있잖아요. 꿈에 눈이 멀라고..시시한 현실 따위 보지 말라고..우리..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구요. 짐캐리가 한 말..우리 이미 이해하고 있잖아요..돌아갈 수 있어요? 그 진실을 알기 전 세계로? 저는 못가요. 겨울씨는요? 겨울씨는 정말 돌아갈 수 있어요?
해맑게 웃고 있는 겨울을 보며 여름은 속으로 끝없는 독백을 되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