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서울은 큰 도시일까?

by 정자까야

가을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어..혜선아.


가을아 통화 가능해?


혜선은 지난번 가을과 만난 이후 가끔 전화를 걸어왔다. 대부분 사업 관련된 내용이었다. 대출, 이자 등 금융 관련 문제는 솔직히 가을도 모르는 영역이지만 혜선의 말을 성심껏 들어줬다. 그렇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어. 괜찮아. 말해.


다음주 월요일에 지원기관에서 실사 나오거든. 우리 사무실로. 그냥 간단하게 사무 환경 확인하고 장부 몇 개 보고 가면 된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괜히 긴장돼서.


아..그래? 요건 되나 확인차 나오나보네..회사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될거야. 걱정 마.


가을은 혜선을 안심시키려 했으나 혜선의 불안은 여전했다.


그럼 될 것 같은데..모르겠어. 이런건 처음이라..회사 다닐 때처럼 팀 동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나한테는 중요한 일정인데..상의할 사람도 없고..나 지금 중국에 출장 와 있거든. 토요일에 귀국하는데 준비할 시간은 없고..어떻하지 고민만 하다 가을이 너한테까지 연락했어..미안해 정말..


가을은 듣고만 있었다. 혜선의 절박함이 느껴져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토요일에 귀국한다고? 가을은 물었다.


응. 직원들보고 그 날 사무실 나오라고 하기도 미안하고. 얘기도 못꺼냈어. 그냥 나 혼자라도 가서 준비할까 싶어..


혜선의 말을 들으며 가을은 사무실 벽에 붙은 달력을 흘깃 쳐다봤다. 토요일..로펌 동료들과 골프를 치기로 한 날이다. 겨울과의 만남도 이 일정 때문에 일요일로 미루었던..


준비할 시간이 주말밖에 없는거지?


응..선약 있는거지? 괜찮아. 혹시나 해서 한거야.

혜선은 애써 밝은 티를 내며 말했다.


일요일은 선약이 있어. 토요일은..회사 행사가 있고..가을은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그럴 것 같았어. 일정 넉넉하게 얘기한 것도 아니고..미안해. 괜히.


아니야..못들어줘서 내가 더 미안하네..


가을은 전화를 끊고 의자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서성였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저 현가을입니다. 네..네..이번주 라운딩 관련해서요. 네..갑자기 아버님 댁에 갈 일이 생겨서..네..네..정말 죄송합니다. 네 제가 김변호사에게 부탁해서 자리는 메꾸겠습니다. 네..죄송합니다.


전화를 끊고는 길게 숨을 내밷었다. 거짓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누군가를 변호하는 것이 업인 사람이다. 지금은 자신을 변호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자신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 누군가가 처음 자신에게 사랑을 알려줬던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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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혜선이 알려준 주소를 인터넷에서 확인했다. 주차할 공간이 부족하니 대중교통으로 왔음 좋겠다는 말에 공덕역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혜선의 사무실은 직원 서너명이 근무할 정도의 중소 오피스였다. 혜선은 복도에서 가을을 반갑게 맞았다. 사무실로 들어가서는 직원들 근무 공간이며 회의실, 차를 준비해놓은 고객 대기실과 자신의 사무 공간까지 가을을 데리고 돌아보았다.


어때? 작지만 있을 건 다 있지? (웃음)


네가 나보다 낫다. 난 언제 이런 데서 일해보냐..사무실 잘 꾸며놨네.


둘은 우려놓은 차를 한 잔씩 따라 회의실에 앉았고 혜선은 준비한 서류를 가을에게 보여줬다.


그쪽에선 이렇게까지 요청하진 않았는데 내가 PPT도 준비했거든. 가을 네가 실사자라고 생각하고 한번 들어줘봐.


혜선은 회의실 조명을 낮추고 벽 한 켠에 준비된 PPT자료를 띄워 회사의 비전에 대해 설명했다.


가을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자료 화면의 밝은 빛과 혜선의 낭랑한 목소리에 흡사 과거의 특정 시기로 돌아간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화면의 내용은 보이지 않았고 혜선의 음성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은 몽환적인 어지러움. 함께 봤던 영화가 주마등처럼 스쳐갔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 없는 역설.


가을이 혼자만의 시간 여행을 하는 사이 발표는 끝났고 회의실의 불은 켜졌다.


어땠어?


좋은데? 딕션도 좋고..


그래? 난 연습인데도 떨리더라. 가을이 네 얼굴 살필 여력도 없더라구. 네가 졸고 있었다해도 난 몰랐을거야. (웃음)


가을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을은 혜선의 사업에 대해 추가적인 대화를 나누곤 갈 채비를 했다.


가을아. 저녁 약속 있어?


아니..딱히.


그럼 우리 치맥이나 하러 가자. 오늘 네가 애써 시간 내서 도와줬는데 이렇게 보내는건 아닌것 같아. 수임료는 내가 맥주로 낼게. (웃음)


가을은 혜선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좋을대로.


둘은 주민센터를 거쳐 큰 길을 따라 걸었다.


거의 왔어. 혜선이 말하며 앞장서는 순간 사잇길에서 남녀 서너명이 큰 길로 쏟아져나왔다. 이미 한 잔 한 것처럼 무리 중 두어명은 큰 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겨울씨. 한 잔 더하고 가요. 네? 좋다구요? 와..오늘 김여름 계탔네..오늘 이 형님 덕에..여름아..두고두고..아..미희씨. 여기에요. 여기..


가을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혜선은 뒤를 돌아봤고 가을은 혜선에게 손짓을 했다. 혜선이 다가가자 가을은


혜선아. 너 괜찮으면 맥주 말고 저녁이나 먹자. 갑자기 시장하네..


혜선은 웃으며 방향을 틀었다. 밥 집은 공덕역으로 내려가야 많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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