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은 주량의 차이만 있었을 뿐 각자의 기준에서 취해 있었다.
근데..아라씨 이름이 뭐라고 했죠?
미희는 몇 번을 물었는지 모른다.
아이고 미희씨. 도대체 몇 번을 말합니까. 외우기 어려운 이름도 아니고..영어수학 몰라요? 영수요 영수.
죄송해요..미희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이내, 근데..설마 성이 국씨는 아니죠? 라며 겨울을 붙잡고 웃었다. 겨울은 웃음을 참느라 힘든 표정이었고 여름은 더는 못참겠다는 듯 웃음을 뿜었다.
그냥 아라씨라고 할게요. 그건 잊히지가 않네요. (웃음)
좋으실대로 하세요. 영수는 체념한 듯이 말하며 혼자 맥주를 한 잔 했다. 겨울이 그러지 말라는듯이 잔을 들었고 그 덕에 다시 네 명은 술잔을 부딪혔다.
저 이런 분위기 너무 좋아해요. 학교 다닐 때 선배, 친구들과 이런 류의 호프집 자주 다녔어요. 아련하게 당시의 느낌도 들고..시간 여행하는 몽환적 분위기도 좋네요. 게다가 동석한 이들이 절친과 친애하는 분, 그리고 그 분의 절친이라니..
겨울의 넋두리같은 말에 영수는 여름을 보며 말했다. 친애하는 분이라..
그럼 나머지 두 명은 뭔가요? 영수의 물음에 겨울이 말문이 막혀 침묵이 흐르자 미희가 불쑥 끼어들었다. 존경하는 분, 막역한 분..뭐 그 정도랄까..
차라리..이건 어때요? 세 명이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영수가 농을 쳤다.
여름은 그 농에 질색하는 표정이었지만 겨울은 흥미를 갖고 영수에게 물었다. 영수씨 왜 그렇게 생각해요?
뭐..사실 갑자기 떠오는 거긴 한데 (웃음) 굳이 설명하자면..변호사 양반은 좋은 놈..뭐 저야 모르지만 어쨌든 겨울씨가 존경한다 하니..그리고 그 대학 후배..유투브에 나와 공개 구혼 비슷하게 했다는 그 친구는 나쁜 놈..이유야 단순하죠. 딱 하는 폼이 나쁜 남자 스타일..그게 또 매력이긴 하지만.(웃음) 그러면 남아있는 이상한 놈은 여름이가 되겠네요..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포지션 애매한 인간. 그리고 얘 고등학교 때부터 별명이 사차원이었으니 딱 맞네요. 이상한 놈.
영수는 갑작스럽게 지어낸 얘기가 얼추 스토리가 되자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다들 같이 웃으며 건배를 했다.
자꾸 물어서 죄송해요. 근데 왜 사차원이었어요? 전 전혀 모르겠는데..겨울의 궁금함이 계속됐다.
학교 끝나면 집에 바로 안가고 인근 하천에서 뭘 하는지 한참을 앉아있다 가질 않나..성적은 전교 1등 찍었다가 수직 낙하해서 반에서도 헤매질 않나 지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학생이 있어도 돌 보듯이 하질 않나..아니 그리고..겨울씨 모르겠다구요? 얘 행동하느거 보면서도 이상한 생각 안들었나요? 결혼 적령기 총각이 가능성도 별로 없는 연애대전에 참가해서 답도 없는 짝사랑을 수개월째 하고 있는데..아니 지가 무슨 조자룡이야 뭐야..수십명의 적으로 둘러싸인 적진을 향해 단기필마의 항전을 하고 있으니..겨울씨야 그 진흙탕 대전의 한가운데 있으니 잘 못느끼실 수도 있겠지만..밖에서 보는 이 친구 상태는 아주 가관이라구요.
여름은 팔짱을 낀 채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필요도, 그럴 마음도 없다는듯이. 겨울은 영수와 여름을 번갈아보며 놀라워했다. 그런 일도 있었냐는 듯.
아가씨 보기를 돌같이 하던 분이 왜 이렇게 처절한 사랑을 하게 됐대..미희는 여름을 보며 측은한 듯 놀리는 듯 한마디 농을 했다.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여름에 쏠리자 여름은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공주가 아팠습니다..여름의 뜬금없는 말에 영수는 씹던 노가리를 뱉을 뻔했고 미희는 미친 놈 쳐다보는 표정을 지었으며 겨울은..겨울은 흥미롭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세 명의 형제 중 맏이는 천리를 보는 망원경으로 공주가 아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알렸죠. 둘째는 자신의 양탄자를 가져와 형제들을 태우고 천리를 날아갔지요. 덕분에 이즘으로 치면 골든 타임을 지킨 셈이죠.
모두가 여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도대체 이 이야기의 끝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특히 겨울의 표정은 점점 더 진지해졌다.
막내는 공주에게 자신의 사과를 주었죠. 어떤 병이든 낫게 하는 세상 단 하나뿐인 사과를..
잔을 부딪치자는 이는 없었다. 모두 어서 다음 이야기를 해보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공주는 병을 떨치고 일어나 자초지종을 듣고는 세 명의 형제들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전했습니다. 겨울씨.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아시죠?
여름은 겨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수와 미희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는 표정으로 겨울과 여름을 번갈아봤다.
겨울도 여름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알고 있어요. 공주는 사과를 준 이를 자신의 반려자로 택했죠. 두 형들은 자신의 보물을 다른 사람을 위해 또 쓸 수 있지만 막내는 더 이상 가진 게 없었으니까요..
영수와 미희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두 사람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름은 말했다. 맞아요. 막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죠. 남겨놓을 수 없었던 거에요.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에..
뜨거운 무엇인가가 피를 데우고 침을 마르게 하여 여름은 갈증을 느꼈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모두 자신이 사과를 준 막내라고 생각할거에요..하지만 현실은 사과는 한 개 뿐이고..막내도 한 명뿐이죠. 누가 그 막내였을지는 오직 공주의 선택에 따라 가려질 뿐..다른 누구도 그걸 가려낼 수 없어요.
여름은 잠시 숨을 고르곤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보물은 망원경일 수도, 양탄자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사과임을 한번도 의심한 적 없고..그렇기에 이런 처절한 애정의 행로를 버틸 수 있는 겁니다. 아가씨를 돌 보듯 했다는 말은 맞지 않아요. 그저 그 땐 사랑을 몰랐을 뿐이에요. 이후 몇 번의 인연을 만났죠. 다만 마음 속 사과를 내어줄만큼 처절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이게 불행인지 행운인지..전 행운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사과를 한번도 꺼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니..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가 머쓱하여 여름은 죄송하다며 건배 제의를 했다. 영수는 이 분위기 어쩔 거냐며 여름을 몰아세웠고 미희는 공주 이름으로 삼행시를 짓는 것으로 잘못을 씻으라며 맞장구를 쳤다. 여름은 괴로운 표정으로 운을 띄워 달라고 했다.
정. 미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정녕 선택하지 못하시겠오?
여름의 대담한, 도발적인 첫 문장에 영수와 미희는 겨울을 흘깃 쳐다보았다. 겨울은 동요없이 여름을 응시할 뿐이었다.
겨. 영수는 겨울이 말이 없자 먼저 말했다.
겨울 왕국의 공주여. 여름은 겨울의 눈을 바라봤다.
울. 겨울은 애써 침착하려 했다. 떨리는 음성은 어찌 할 수 없었지만.
울지 마오. 그대가 불행하면 그 선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소이다..
여름의 삼행시가 끝나자 모두 잠시 침묵했다. 짜식 평소 겨울씨 삼행시 많이 지어봤구나. 이게 즉석으로 나올리가 없어..영수는 그리 말하곤 건배를 외쳤다. 미희는 멋진 시라며 환호했고 겨울은 미소와 함께 건배 대열에 합류했다. 환하게 웃지 못한 건,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당장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