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eepless in Chuncheon
어디야? 청량리 역 내렸어? 그래..40분. 빨리와.
다희는 한참 전부터 핸드폰 시간만 확인하고 있었다. 선영이 멀리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선영이 다가오자 다희는 말도 없이 플랫폼으로 뛰어 내려갔다. 선영도 쉬지 않고 달렸다. 겨우 기차에 올라타 숨을 거칠게 내쉬려니 곧 문이 닫혔다. 둘은 웃으랴 숨 쉬랴 정신이 없었다.
기집애. 좀 빨리 나오지. 왜 이리 애간장을 녹여. 다희는 자리를 잡고 나서야 선영을 쏘아붙였다.
미안 미안. 내 생체 리듬이 토요일은 11시 기상이란 말야. 선영은 아직도 숨이 가쁜지 미간을 찌뿌리며 웃었다.
두어달 전부터 기대했던 날이다. 다희와 선영은 고등학교 친구 혜연을 보러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춘천이라니..
다희와 선영은 1학년 때, 혜연과 선영은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선영이 매개가 되어 셋은 2학년 때부터 같이 몰려다니던 사이가 됐다. 다희는 셋 중 가장 외향적인 편이었고 혜연은 말이 없는 편이었다. 다희가 말하면 혜연이 웃었다. 둘은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일견 달라 보였으나 뗄 수 없는 사이였다. 늘 붙어다녀 선영이 가끔 핀잔을 줄 정도였다.
혜연은 간호대학을 졸업했다. 결혼도 셋 중 가장 먼저 했다. 그렇게 두 친구와 사는 결이 조금은 달랐다. 그래도 셋은 꾸준히 만났다. 별 일 없는 날이면 만나서 수다로 스트레스를 날렸다. 해외 출장이 잦았던 다희는 귀국 후 항상 두 친구를 찾곤 했다. 그러다 혜연은 별안간 춘천으로 이사를 갔다. 남편이 춘천으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처음엔 발령 기간이 끝나면 다시 상경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는 동안 그 곳에 빠져버렸다나. 아예 집을 사서 춘천에 눌러앉았다. 남편은 오히려 서울 발령이 나서 주말부부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됐다.
어쩔 수 없이 셋의 만남이 상대적으로 뜸해졌다. 다희는 선영이를 자주 불러낼 수밖에 없었다. 가끔 몇 달에 한번씩 혜연이 서울 나들이겸 상경하여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늘 다희는 혜연을 보고 싶어했는데 마침내 기회가 왔다. 남편이 주말에 집을 비우게 됐다고..혜연이 다희와 선영을 춘천으로 초대한 것이다.
셋이 같이 1박이라니..꿈이야 생시야? 다희는 선영에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정말 언제적 얘긴지. 아니 그런 적이 있나..고등학교 수련회나 이런 거 말고. 선영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왜..한번인가 있었지. 서울에서. 우리 호텔 잡고 논 적 있었잖아. 대학 때..기억안나? 남산 옆이었던 것 같은데..
다희는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뒤적이며 말했다.
아..맞다. 기억나. 그 때 다들 학교 시험기간 비슷해서 끝나고 호텔에서 한 잔 했었지..도대체 그게 몇 년 전인지..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 ITX 열차는 미끄러지듯 춘천역으로 진입했다. 혜연은 반갑게 개찰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셋은 서로를 부등켜안고 폴짝폴짝 뛰었다. 웃고 떠드는 통에 사람들이 흘깃 쳐다보곤 지나갔다.
차는? 선영이 물었다.
밖에. 한 잔 할지 몰라서 두고올까 하다가..혜연이 웃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당시 수줍음 많던 소녀의 모습은 세월따라 조금씩 희석됐지만 여전히 웃음이 많은 친구. 다희는 그저 혜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춘천의 명물 닭갈비를 먹고 구봉산의 전망 좋은 까페에서 미뤄온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한참 고등학교 얘기로 웃고 있는데 혜연이 시간을 보더니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왜? 아직 할 얘기 많은데..선영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내일도 있지만..오늘보다 날이 안좋을 것 같아서. 춘천 왔는데 소양강은 보고 가야지. 가자. 거기서 한 잔 하면서 얘기하면 되.
셋은 차안에서도 내내 얘기했다. 혜연은 얘기에 빠져 신호를 몇 번이나 놓쳤다. 뒤에서 출발하라는 경적이 몇 차례 날아왔다. 그런 상황 자체도 웃겨서 셋은 차 안에서 깔깔댔다.
주점에 도착한 시간은 소양강에 윤슬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을 때였다. 병 맥주를 부딪치며 건배를 몇 차례나 하고 난 뒤였다.
사람들이 왜 소양강 소양강 하는지 알겠네. 진짜 아름다운 강이야..근데 이쪽이 상류인가? 선영이 물결의 이동을 보며 물었다. 다희도 고개를 들어 물결을 바라봤다.
아냐..지금은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고 있어서 그리 보일 뿐이야. 상류는 반대야. 혜연이 맥주를 마시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순간 뭔가 생각난 것처럼 표정이 굳었다가 풀렸다. 다희가 놓치지 않고 물었다.
뭐야..뮈 갑자기 생각난 듯한 표정인데?
혜연은 다희를 잠시 바라보다 웃었다. 웃음 속에 복잡한 심경이 섞여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다희는 놀라서 물었다.
아냐. 옛날 생각이..나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일이 있어. 별 거 아닌데..타이밍을 놓치니 계속 말 못하고 있다가 잊고 지냈네..
다희와 선영은 들고 있던 맥주를 내려놓고 혜연을 바라봤다. 빨리 말하라는 표정으로.
기억나? 나 고등학교 때 방송부원이었던거?
혜연은 1학년 말 무렵 갑자기 방송부에 입부했다. 방송부에 결원이 생겼다는 공고를 보곤 망설임 없이 입부 신청을 했고 그 결연함에 선배들은 별 이견없이 혜연을 후배로 받아들였다. 다희와 선영은 2학년 때 이미 방송부원이었던 혜연을 만났기에 그런 것까지는 알지 못했었다. 조금 전 혜연이 말하기전까지는.
그래서? 그게 소양강 물결이랑 무슨 관계인데? 다희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는 걸 직감한듯이 혜연을 다그쳤다.
내가 방송부 입부한 건 어떤 선배 때문이었어..
그 순간 흐르는 정적이라니. 모두가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설마..여름 선배? 선영이 경악하며 물었고 다희는 눈이 커 보일 정도로 놀랐다.
그래. 여름 선배. 다희가 선배 좋아하고 있는 거 알아서 그동안 말도 못했었어. 바보 같지? 혜연은 다희와 선영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니..언제부터? 왜 말 안했어..그냥 하면 되지. 나도 떠벌리고 다녔잖아. 너 혼자 왜 힘들게..
다희는 친구가 속으로 삭이느라 힘들어했을 걸 생각하곤 안타까워 말했다.
그러게..근데 다희 너 알잖아. 나 그리 외향적인 애 아니었잖아. 그냥 속으로 삭일 수 있을 정도의 애정이었어. 아파서 힘들어하고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혜연은 말끝에 가볍게 웃었다.
혜연의 웃음에 친구들도 따라 웃었다. 벗들이 말이 없어 혜연은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함을 느꼈다.
학교 다닐 때..너희들 몰랐겠지만 나 1학년 때 학교가 재미없었어. 친구도 없었고. 너희 2학년 때 만나곤 달라졌지만..1학년 때는 적응을 못하겠더라구. 공부만 하는 아이들. 대학만 바라보고 가는 교육. 왜 사는지 모르겠고. 앞으로도 내내 이렇게 재미없을 것 같은 막막함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학원도 다니지 않았으니 학교 끝나고 터덜터덜 걸어 집에 왔지. 그러던 어느 날..거기 어디지? 우리 학교 앞에 있던 천 있잖아..
양재천. 선영이 말했다.
그래 양재천..거기 우리 학교 교복 입은 학생이 우두커니 물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게 보이더라. 그 날 뿐만 아니라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선영과 다희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다희는 특히나..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에게 듣는 김여름이라는 이름이라니.
당연히 누군지 궁금해졌어. 알아보니 우리 윗 선배이고 나름 공부 잘 한다고 소문 났더라. 근데 전교에서 노는 학생이 중요한 시기인데 학원 안가고 맨날 뭐하는거지 싶더라.
네 얘기 아니야? 선영이 농을 쳤고 셋은 또 깔깔 웃었다.
같은 부류라고 느꼈어. 하염없이 천을 바라보는 그 선배의 뒷모습을 난 하염없이 쳐다봤어. 저 사람도 나처럼 인생에 대해 고민이 많구나 싶었어. 가끔 그가 돌을 집어 던지면 그 돌이 내 마음에 퐁당 빠지는 느낌이었어.
헤연이 가슴에 손을 대며 그 때를 회상하자 다희와 선영은 일제히 야유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아파서 힘들어한거라며.
선배가 방송부인거 알고 있어서 방송부 결원 공고 보고 바로 입부한거야. 일주일에 두어번 선배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어. 그 전보다 훨씬 의욕도 생기고 학교 가는 게 더이상 싫지 않았지..
뻔히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는 친구들을 의식했는지 혜연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혼자 감상에 취했나보다. 진도 빨리 나갈게. 혜연은 웃으며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방송부가 춘천으로 수련회를 왔어. 2학년을 앞두고 있었고 선배는 곧 졸업반이었지. 3학년은 거의 활동을 안했으니 사실상 선배와 추억을 쌓을 마지막 시간이기도 했지. 그 때 소양강에서 음료를 마실 시간이 있었는데 운좋게도 선배와 내가 남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게 됐어. 심장이 어찌도 뛰던지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구.
혜연은 당시가 떠올랐는지 활짝 웃었다.
다희는 턱을 괴고 혜연의 말을 들었다.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혜연은 그 때를 회상하며 즐거워했다. 그런 친구를 보며 다희도 즐거웠다. 그리곤 생각했다. 김여름. 고등학교 때 도대체 몇 명을 홀리고 다닌거야..
둘이 말없이 음료만 마셨어. 둘 다 쑥맥이었으니. 선배는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소양강에만 눈길을 주다가..
윤슬이라고 하나..이 반짝임.
들으라는건지 혼잣말인지 그렇게 운을 떼더라.
그러곤 또 말없이 있다가
상류가 이쪽인가? 물결이 흐르는거 보면..
그리 얘기하길래 내가 말했어. 아니 말했다기보다 나도 모르게..말이 나왔어.
물결로는..상류를 알 수 없어요. 바람 때문일 수도 있어서요.
아..선배는 고개를 끄덕였고 어렵게 말을 한 나는 왠지 지금이 기회라고 느껴서 길게 부연했어.
바람 때문에 실제로 강 표면이 강 심층부랑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지만..그런 경우는 드물대요. 실제로는 바람 때문에 강의 표면이 들어졌다가 다시 그 자리에 내려앉는 건데 그 파동이 계속 옆으로 퍼지니 육안으로는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대요. 마치 파도타기 응원처럼요..
아..그렇구나. 파도타기를 떠올리니 바로 이해가 됐어. 표면과는 달리 심층부는 여전히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고 있는거네..당연한 얘기지만..중력은 바람보다 강했구나..
문득 느꼈어. 그 때야 비로소 선배가 날 보고 얘기하고 있다는 걸.
과학을 좋아하나 보네..선배의 말에 난 자연을 좋아한다고 말했지. 아직도 기억나. 선배의 아재 개그. 그래서 자연과학인가..라던.
선영은 피식 웃었고 다희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못들을 소릴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날..선배와 친해졌다고 생각해서인지 밤에 잠이 안오더라. 나와서 숙소 주변을 걷는데 거짓말처럼 배회하던 선배를 또 만난거야..
맥주를 마시던 선영은 하마터면 맥주를 뿜을 뻔했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너 이런 얘기 남편은 알고 있냐? 장난스레 물었다.
별 일 아니었다니까. 그냥 그게 다야. 나 혼자 상상이고. 근데 남편에겐 얘기 안했어. 혜연의 웃음에 벗들은 같이 웃으며 맥주를 부딪쳤다.
그래서? 밤에 만나 뭘 했는데? 키스라도 한거야?
다희는 궁금증에 끝을 알고 싶었다.
숙소 입구 난간에 걸터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어. 왜 양재천에서 그리 물을 바라봤는지..덕분에 성적이 곤두박질쳐서 만회가 어렵다는 얘기. 주로 청소년기에 갖고 있을법한 고민들..서로에 대해 알게 된 시간이었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눈이 딱 마주쳤거든? 혜연은 어느새 이야기에 몰입해있었다. 선영과 다희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침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난 진짜 그 순간..키스하고 싶었어.
혜연은 술 기운인지 심장이 당시를 기억한건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다희의 음성 또한 술 기운인지 심장이 누군가를 떠올린건지 높아져 있었다. 혜연은 그런 다희의 품에 안기며 깔깔 웃었다.
거기서 끝. 선배는 아쉽게도 시선을 피했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밤 공기가 차다며 들어가자고 했어. 난 너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방에 들어가 그 날의 대화를 떠올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
그리고 우린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고..난 선배를 마음에 품고 살았지만 내색한 적은 없었어. 연모 아닌 연모가 희미해질 무렵 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고..그리고 역시 자연을 사랑해서 이곳 춘천에서 기꺼이 여생을 보낼 반려자를 만나게 된거지. 이상..마음에 품었던 한 소년 때문에 무사히 고교 시절을 날 수 있었던 한 소녀의 이야기였습니다. 긴 얘기..넋두리같은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혜연은 맥주 병을 들었고 셋은 힘차게 건배를 외쳤다. 맥주를 넘기며 다희는 생각했다.
내가 만났던 혹은 만나고 있는 많은 남자들. 그들은 나의 마음의 강 표면에 일었던 물결이었나.. 마음 깊은 곳에서 느리고도 묵묵하게 흐르는 물결은..끊임없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그 물결은 한 사람..오직 그 사람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일까..
다희는 맥주를 더 주문했다. 술로 잠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치 십수년전 친구의 밤마냥 오늘 밤 쉬이 잠들지 못할것만 같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