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에 줄행랑은 없다.

by 정자까야

김봄은 사업계획서 한 부를 펼쳐놓고는 고심했다. 부장은 며칠 전 김봄을 부르더니 사업계획서 한 부를 내밀며

김대리. 이 사업 좀 검토해봐. 이즘 인바운드 외국인 관광객이 많잖아. 이 기회를 활용해서 우리 회사 브랜드를 노출할 거리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정부 예산 중 우수 민관 협업 작업에 대한 지원이 편성된 모양이야. 정부 문화부처 산하 기관과 콜라보를 하나 기획해보라고 사장님이 말씀하시니..김대리가 맡아줬음 좋겠어. 혹시 그 쪽에 아는 사람은 없나?

사업계획서를 받아들고 부장실에서 나온 순간부터 사무실 데스크에서 고심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 생각나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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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수+싸가지. 발신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름은 전화기를 무음으로 돌려놓는다는 걸 깜빡했다. 회의중이었던 여름은 전화를 받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의중입니다. 잠시 후 전화드리겠습니다.

회의가 끝나 여름은 봄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일인가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여름의 음성은 철저히 사무적이 돼 있었다.

네. 아깐 본의아니게 죄송했습니다. 알았다면 문자로 드릴 걸 그랬습니다. 봄의 음성도, 격식을 갖춘 사무적인 말투였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연락드린 건 아닙니다. 이번에 저희 회사랑 여름씨 회사가 콜라보를 기획하고 있는데 관련해서 말씀 좀 나누고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시간 되시면 제가 찾아가 잠깐 뵙고 싶은데 괜찮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름은 알겠다고 답했다. 일은 일, 개인사는 개인사라는 건가. 맞는 말이기도 해서 딱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김봄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은 간단히 목례로 인사를 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저희 관계가 좀 그렇죠? 잘 지내셨냐는 인사는 서로 겸연쩍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이 서류 좀 한 번 봐주십시오.

여름은 봄이 들고 온 서류를 빠르게 훑었다.

정부 예산이 신청한다고 나오는게 아니라 출품작 중 우수작으로 선정돼야 하는군요. 콜라보 기획간 경쟁구도네요.

네. 저희 말고 타 경쟁사도 여름씨 회사나 타 정부기관과의 콜라보를 추진할 겁니다.

근데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있나요? 어차피 이 업무는 저희 본사 기획파트에서 진행할텐데..

알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저희가 딜링해야 하는 건 본사쪽일테죠. 근데 너무 밑도끝도 없어서 어떤 기획안을 초안으로 제시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여름씨에게 그쪽 에서 주로 관심갖는 테마나 트렌드가 있는지 여쭤보고 초안을 잡으려 연락드렸습니다. 그리고..

여름은 중간에 물어볼 말이 있었지만 봄이 더 할 말이 있는듯해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리고..전 여름씨를 잘 모르고, 사실 알 필요도 없지만..겨울 선배 말로는 이즘 찾기 힘든 낭만주의 선두주자라고 해서..(웃음) 기획에 도움될만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여름은 커피를 한 잔 마시고는

봄씨는 손자병법의 지피지기백전백승, 아니 정확히는 지피지기백전불태를 모르십니까. 적을 알아야 위태롭지 않은거죠. 겨울씨를 얻으려면 경쟁자를 알아야지 왜 알고싶지도 않다고 하십니까.

김봄은 여름의 말을 듣더니 조금 흥분했다.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오나요? 일 얘기 하러 왔지 개인사는 중요한게 아닙니다.

일은 일이고 개인사는 개인사다. 잘 알고 있습니다. 봄씨가 그걸 철저하게 구분해서 저한테 연락한 점 높이 평가합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게 디폴트 값인 이즘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였다면 아무리 일이어도 연락못했을 겁니다. 전혀 모르는 다른 분과 일하는게 더 편했을테니까요.

상당히 감정적인 편이시군요. 실망인데요. 봄은 여름을 쏘아보며 말했다.

저희 첫 만남을 한 번 복기해보시길 바랍니다. 갑자기 불러내서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린 봄씨가 그런 말 한다는게 저로선 오히려 납득이 안가는군요.

여름은 차분하게 할 말을 마치고 커피를 마셨다. 일은 일이고 개인사는 개인사지만 부당하게 대우받은 과거는 짚고 넘어가겠다는 심산이었다.

김봄은 의외로 차분하게 따지는 여름을 보고 자신의 태도가 그렇게 느껴질수도 있겠다 싶었다. 잠시 침묵하더니

일전에 그렇게 느끼셨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앞뒤 안가리고 행동하는 편이라 오해를 종종 삽니다. 여름씨를 무시한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진지한 봄을 보고 여름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좋습니다. 그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사업 얘기를 같이 나눠보시죠.

여름은 봄이 알고자 했던 조직의 내부 중점사안과 신규 사업의 방향, 일선 지사에서 진행되는 기획안에 대해 자신이 아는 한, 외부로 나가 문제될 것이 없는 범위에서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대화의 말미에는 사업계획서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댈 정도로 상당히 진지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건..조직 차원에서 나온 얘기는 아니고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말씀하시죠. 봄이는 집중하고 있었다.

최근의 한류 붐을 타고 외국인 관광객이 상당하잖아요. 명동 같은 곳은 내국인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돕니다. 이들이 콘서트 장에서 내뿜는 에너지를 어떻게든 발산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던데..콘서트가 상시 있는것도 아니고..그래서 야외에서, 터진 공간감을 맛보며 짧은 시간동안 그런 경험을 제공하면 어떨까 싶더군요.

어떤..김봄이 물었다.

가령 도시의 큰 공원을 이용하는거죠. 공원은 모두의 공간이라 조용히 명상을 원하는 이도 있을테니 아주 특정한 시간, 이를테면 매주 토요일 14시부터 한 시간 정도..짧은 시간 가수들과 사전 협의된 노래들을 플레이리스트로 틀어주는 겁니다. 공원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서요. 해외 팬 뿐만 아니라 국내 팬들도 상당히 방문하겠지요. 관광 상품으로 자리잡으면 주변 상권도 살테고 이를 후원하는 기업의 브랜드 노출도 자연스럽게 될테니..서로 윈윈 아닐까 싶어서요.

아..좋은 생각이네요. 공원 전체 스피커 활용이 불가피하게 안된다면 이어폰으로만 플레이리스트 음원을 제공해도 되고..어차피 공원안 팬들은 같은 음악을 들으며 일체감을 느낄테니..공원 내 K pop 떼창도 가능하겠군요. (웃음)

실현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은 많을겁니다.

네..하지만 이번 기획안 초안 중 한 꼭지로 검토해볼만 한 것 같습니다. 봄은 꽤 만족한 눈치였다.

몇 가지 얘기를 더하고 둘은 조금 편한 자세로 고쳐앉았다.

역시 이런 얘기는 내부자 아니면 알기 어렵군요. 챗GPT나 제미나이 아무리 돌려도 알 수 없는 내용이죠.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초안 작성에 도움되셨다니 다행이네요.

김봄은 식은 커피임을 알고도 습관적으로 커피를 입에 갖다댔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개인사는 얘기안하기로 했지만..대답 안하셔도 됩니다. 그저 궁금해서..

말씀하시죠. 여름은 애당초 일과 개인사를 딱히 나누고 있지도 않았다.

겨울 선배 어머니가 가을씨를 한 번 보자고 했던 건 알고 계시나요?

여름은 봄을 슬쩍 보고는

알고 있습니다. 답했다.

겨울 선배가 어머니를 못이길 겁니다. 아니 이긴다는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결국 어머니와 갈라서지 못할거에요. 그건..머리로 이해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의식이 지배하는 영역이랄까..

네..그 말씀 일리있고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봄씨는 그래서 포기하실건가요? 여름은 다소 엷은 웃음을 지었다.

봄은 당황하여 잠시 얼굴이 상기됐다.

그럴리가요. 전 이 애정사가 어느 방향이든 정리될때까지 끝까지 갑니다. 이제껏 후회하고 살진 않았습니다.

근데 왜 그런 걱정을 하시나요? 어차피 언더독의 숙명인것을.. 여름이 물었다.

글쎄요. 오늘 말씀 나누다보니 겨울 선배가 사람 잘못보진 않았구나 싶더군요. 근데 확실히 저랑은 다른 면이 있어서..경쟁에서 낙오한다면 그 상처를 견딜 수 있을까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저야 결론이 날 때까지는 이 악물고 덤비지만 일단 결론이 나면 빨리 수습하고 일어서는 성향이라..한동안 너무 힘들고 방황해도..어떻게든 또 살고 있겠지만..그쪽은 성향상..상처가 깊을 것 같아서..


김봄은 잠시 호흡을 거르더니

혹시 모르실 싶어 말씀드렸습니다. 쏟은 매몰 비용이 상당하여 결말을 짐작하며서도 멈추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주제 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비꼬는 말씀이 아니니 달게 듣겠습니다. 말씀대로 그런 성향의 사람은 훨씬 더 고통받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두려워 중간에 멈출 수는 없습니다. 경제학 전공하시고 그런 쪽에서 일하시니 그리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봄이 기다리자 여름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업이니 매몰 비용이니..그건 우리가 이 상황을 공유하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한 용어일 뿐..겨울씨와의 인연을 그런 각도로 접근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저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감정에 충실할 뿐이고 그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에 제가 들이는 시간과 정성은 제 개인적으론 큰 기쁨입니다. 오히려 소득이라면 소득이지 비용은 결코 아닙니다. 겨울씨와 한시간을 보내는 것이 같은 시간 코인이나 주식으로 몇 백만원을 버는 것보다 행복합니다. 이 말에는 추호의 거짓도 꾸밈도 없습니다.

그렇군요.

봄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다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정황이란 게 있다. 일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말머리를 돌려야 그나마 남은 전력을 추스려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 이 사람은...그런 것도 모르는 것인가. 손자병법에는 지피지기 백전불태뿐만 아니라 36계 줄행랑도 있다..봄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의 여름은 모 아니면 도이고 정황상 도가 유력한데..정말 이 사람 괜찮은걸까 싶었다.

알겠습니다. 각자의 운명대로 사는 거겠죠. 저는 저대로 여름씨는 여름씨대로..사실 저도 누구 걱정할만큼 여유롭진 않습니다. 아무튼 오늘 일은 감사했습니다.

둘은 인사하고 헤어졌다. 여름은 돌아오는 길 핸드폰에 적힌 김봄의 이름에서 싸기지라는 글자를 지우며 씩 웃었다. 다음엔 왕재수라는 말도 지워지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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