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희가 이미 여름을 만났다는 사실에 경희는 격분했다. 우연이었을 뿐이라는 겨울의 해명에도 토라진 마음을 달래기 어려었다. 많고 많은 곳 중 양꼬치집을 갔냐고, 거긴 같이 가기로 하지 않았냐는 식이었다. 이런 경희를 진정시키는 유일한 길은 그 수밖에 없었다.
네..겨울씨. 그랬군요. (웃음) 경희씨가 절 그리 보고 싶다 하시니 영광인데요?
아니요.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리 할 때가 아니에요. 경희의 화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구요. 애꿎은 불똥이 여름씨에게 향할지도 몰라서..전 좀 불안해요.
설마 욕이야 하시겠습니까. 아니 욕먹으면 또 어때요. 친구분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웃음)
그렇게, 가을 봄에 이어 마지막 순서로 여름의 인터뷰가 성사됐다. 경희, 미희가 가장 기다려왔던.
평일 저녁이 어떠냐는 겨울의 말을 경희는 단칼에 거절했다.
무슨 소리 하는거야? 겨우 두세시간 보자고 몇 달을 기다린게 아니라구. 아..너희들은 이미 만나서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하다 이거니?
겨울은 당분간 모든 의사 결정은 경희의 뜻에 따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여름이 당일 어떻게든 경희의 분노를 누그러뜨려주길 기도했다. 일대삼. 친구들과의 만남 만으로도 어색하고 긴장될텐데 분위기마저 바꿔줘야하다니..여름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으나 여름이면 할 수 있을거란 기대 역시 컸다. 그런 사람이었다. 응원하게 되고 기대하게 되는.
점심은 각자 해결. 15시 광화문 스탠딩 커피로.
경희로부터 온 지령. 여름에게 전달하면서 겨울은 경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다. 이 겨울에 무슨 스탠딩 커피인가. 주말 날씨를 확인하니 다행히 낮 기온이 꽤 올라가고 요 며칠 기승을 부렸던 바람도 잦아드는 듯했다. 아무리그래도 그렇지. 초면에 스탠딩 커피. 도대체 그 날 무슨 옷을 입어야하는지부터 고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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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당일. 겨울은 아침부터 안절부절했다. 집에서 청소도 해보고 안보던 TV도 봤지만 좀체 시간이 가질 않았다. 기집애. 시간을 애매하게 잡아서 암것도 못하겠네..그런 마음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긴. 그게 경희기도 했다. 늘 이상한 방식으로 연애를 했던. 오늘 우리는 경희의 무대로 초대된 것일까.
같은 마음이었는지 미희에게 전화가 왔다. 겨울아 시간 어중간하지? 점심이나 같이 먹을래? 겨울은 웃으며 대답했다. 미희야 살려줘 고마워..
약속 장소 인근에서 겨울과 미희는 식사를 하고 천천히 약속장소로 걸었다. 코너를 돌자 카페 입구와 주변에 놓인 스탠딩용 테이블 그리고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도 겨울과 미희를 보았는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항상 먼저 와 있었다. 그를 향해 다가가는 것은 늘 묘한 기분이었다. 런웨이를 하는 모델이 만약 긴장이란 걸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겨울은 미희를 꽉 잡았다.
일찍들 오셨네요. 여름은 웃으며 인사했다.
그 땐 술이 들어가 그랬나..구면인데도 처음보다 더 어색하네요. 미희도 웃으며 대답했다.
셋은 원탁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경희를 기다렸다. 경희는 거의 정시에 도착했다. 겨울과 미희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곤 여름을 쳐다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여름입니다. 경희씨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경희입니다. 반갑습니다. 경희는 짧게 인사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여름은 쑥스러워하며 손을 잡았다. 엉뜽한 장면에 겨울과 미희는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 와 본 사람 없지? 에스프레소 먹자. 여기 잘해. 아..여름씨도 괜찮죠?
경희는 주문하고는 돌아와 원탁 테이블에 가방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대게 에스프레소는 금방 먹고 가잖아. 근데 여긴 좀 있어도 괜찮아. 다리가 아파서 떠나는거지 주인이 눈치쥐서 가는 분위기는 아냐.
그러더니 다시 여름을 보고는
여름씨.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연애인 본 것처럼 너무 흥분돼요. (웃음)
여름은 침을 삼키곤 꾸벅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여름을 빼곤 모두 웃었다.
말씀이 없으시네요. 조용하신 편인가요? 경희는 팬미팅이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겨울과 미희는 경희와 여름을 번갈아볼 뿐이었다.
음..아무 말 안해도 경희씨가 좋아해주시니 굳이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서요. 여름의 말에 이번에는 다 같이 웃었다.
에스프레소가 나왔고 모두 이 진한 커피를 한 모금씩 넘겼다. 경희는 만족한 표정. 미희는 눈을 질끈 감았고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의아했을거에요. 난데없이 야외 스탠딩 커피라니. 근데 이즘 추워서 실내에만 있다보니..좀 터진 공간에서 만나고 싶었어요. 멋지지 않아요? 살짝 바람이 불어 머리칼 흩날리고 뭔가 바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움과 여유가 느껴지는. 어때요? 여름씨는?
너무 좋습니다. 왠지 유럽에 있는 느낌이에요.
아..유럽에서 오래 계셨나요? 경희가 기대섞인 물음을 건넸고 미희도 여름을 바라봤다.
여름은 슬쩍 웃고는, 아뇨. 열흘 정도 여행 다녀온게 답니다. 하지만..정말 그 때가 생각날 정도에요. 색다르고 멋진 경험이네요. 경희는 활짝 웃었다. 여름이라는 사람. 자신감이 있다. 자신의 살아온 삶과 어쩌면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도. 주눅들거나 반대로 오만하거나..그런 느낌이 없다. 멋진 청년.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너 여름씨한테 완전 빠진 것 같다. 이제 본지 30분 지났다고. 미희가 핀잔조로 말했다.
난 한눈에 반하는 타입인거 아직도 몰라? 경희가 내 절친이 아니고 내가 아직 평생의 사랑을 만나지 못했다면..아마 오늘 날 여름씨한테 소개해 준 그 친구는 큰 실수한 거였을걸?
겨울은 웃는건지 우는건지 복잡한 표정으로 애꿎은 에스프레소만 들었다놨다 했다. 여름은 몸둘 바를 몰라했다. 널 누가 말리겠냐..미희는 그런 표정이었다.
다음 일정 아는 사람? 경희가 물었고 다들 어리둥절해하자 실은 나도 몰라라며 경희는 핸드폰을 꺼냈다.
자..모여 봐. 다들 술병 게임 해본적 있지? 누가 술 마실지 결정하는 거. 경희가 켠 앱은 가운데 술 병이 옆으로 뉘여 있었고 그걸 돌리면 병이 돌다가 멈추는 단순한 게임이었다.
자..병을 돌리는 영광은 오늘의 주인공 여름씨에게 드릴게요. 병 입구가 가리키는 사람이 다음 일정을 정하는 겁니다. 어리둥절했던 일행은 이젠 자기만 아니기를 바랐다. 예측 불가의 일정에 겨울은 헛웃음만 나왔다.
여름은 병을 쎄게 돌렸고 병은 돌고 돌고 또 돌았다. 겨울을, 미희를, 경희를, 여름을..그리곤 다시 겨울을, 미희를, 경희를...경희를? 경희를? 아니 여름을..
여름을 가리킨 채로 멈춘 병에 한 명을 빼곤 모두 환호했다. 미희는 십년 감수했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다. 겨울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이들을 어디로 인도한단 말인가.
이거..돌린 사람이 걸리게 되는 게임 아닌가요? 여름은 못믿겠다는 듯 몇 번을 더 병을 돌려보았다.
10분 드릴게요. 잘 생각해보세요. 여름씨. 믿을게요. 경희는 처음엔 여름을, 나중엔 친구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겨울은 자신의 걱정이 기우임을 느꼈다. 경희는 여름을 보자마자, 그녀의 말대로, 여름의 든든한 우군이 되었다. 화가 풀렸냐구? 언제? 내가 화낸적이 있었나? 라는 느낌. 동시에 경희의 좀 전 살벌한 농담은, 두 조건이 아니었다면 농담이 아닐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두 조건 중 하나는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겨울은 에스프레소를 마저 마셨다. 여전히 진한 커피 맛이 입가에 멤돌았다, 이 커피. 경희를 닮았다. 너무도 진한, 농축된 애정의 화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