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감동의 계절.

by 정자까야


명절은 여름에게 늘 휴식같은 시간이었다. 여름의 본가와 외가 모두 수도권에 있어 이틀 정도만 할애하면 친척들과의 인사는 충분했다. 나머지 기간은 주로 부모님과 단촐하게 식사하거나 여름의 개인 시간으로 채웠다.

형이 한 명 있었어. 아버지는 가끔 감상에 젖어 말씀하시곤 했다. 엄마가 첫 임신을 했을 때 처음엔 모든 게 순조로웠어. 제일 조심해야하는 4개월의 기간도 잘 버텼지. 그런데 어느 날 퇴근을 하고 오니 엄마가 마루에 앉아서 아빨 힘없이 쳐다보더구나. 병원에 다녀왔는데 양수가 새고 있다고.

우린 대형 병원을 찾아 정밀 검사를 받았고 초진 때와 같은 결과를 받아들고 낙담했단다. 엄마는 바로 휴직을 하고 병원에 입원했어. 직립 보행이 양수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질 않았으니까.

엄마가 그만하라는 눈치를 줬지만 아버지는 얘기를 계속했다.

엄마는 하루 종일 누워있었어. 그게 그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 아빠는 회사에 출근해서도 늘 엄마와 아이 생각뿐이었고.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지. 일은 아무래도 좋았어. 엄마와 아이만 괜찮다면..회사에서 일을 못한다고 욕먹는건 아무것도 아니었지. 승진? 그런 건 염두에도 없었고.

엄마는 두어달 사투를 벌였다. 여름아 생각해봐라. 건강한 사람이 이틀만 누워있어도 없는 병도 생기는데..임신한 몸으로 두달여를 누워있는다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지...그 때 엄마는 루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 앤 책을 많이도 읽었지. 결코 좌절하지 않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맞닥뜨려도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열심히 살아갔던 무한 긍정의 아이콘 앤에게서 기운을 얻고 싶었던 거겠지..

아버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속이 타는 느낌인지 물을 찾으셨다.

하지만 엄마의 이런 처절하고 절실한 노력에도 양수는 계속 새나갔다. 엄마와 아빠는 절망했어. 선택을 해야하는 시기가 온거야. 더 늦추다가는 산모까지 위험할 수 있는. 잊을 수 없어. 그 날 아빠는 버스를 타고 엄마에게 가고 있었어. 날이 궂어서 길이 참 많이 막혔지. 엄마가 의사의 말을 전했고 아빠는 의사의 말을 따르자고 엄마한테 얘기했어. 말하는 아빠도 듣는 엄마도 얼마나 울었던지..말을 하는건지 그냥 우는건지 구분이 안될정도로..버스 안이라 펑펑 울지도 못하고 소리를 어떻게든 참아야했던 그 날..하늘도 쉴 새 없이 울며 찻장을 때렸었다..

그 날이 부모님께 어찌도 생생했는지..여름의 엄마는 침묵했고 아버지는 음성이 크게 떨렸다.

그리고 엄마는 끝내 사산을 했단다. 뱃속에서 아이를 지우기엔 아이가 너무 커있었어. 유도분만으로 아이는 세상에 나왔고 곧 숨을 거두었지. 새하얀 보자기에 덮혀있는 그 아이를 간호사는 화장터로 데려갔지. 아빠는 간호사에게 한번만..한번만 그 아이를 안아보고 싶다고 부탁했단다. 간호사로부터 건네받은 그 아이는 너무도 따뜻했다. 손을 떼어버리는 뜨거움이 아니었어. 그건..손을 더 모으게했던 따뜻함..너무도 감동적인 따스함이었단다. 고마워서, 미안해서, 보고 싶어서 아빠는 쉴 새 없이 울었어. 차마 그 흰 보자기를 열어보진 못했지. 간호사가 떠나며 말해주더구나. 남자 아이였다고.

아버지는 길게 한 숨을 쉬었다. 설거지를 할 준비를 하는 엄마를 흘깃 보더니 아버지는 얘기를 이어갔다.

널 갖는 것도 쉽지 않았어. 사산 이후 한동안 우린 아기 생각이 없었다. 너무 지쳤던거지. 시간이 지나 다시 아기를 원하게 됐을 때 그 땐 아기씨가 엄마를 찾지 않았단다. 시험관, 인공수정 다 해봤지만 소용 없었어. 엄마아빠는 너무 힘들었단다. 다 포기하려는 그 순간에..여름이 네가 찾아왔어. 기적이었지. 자연 임신이었고 햇살 밝은 여름날이었다. 네 이름..너무 성의없이 지은 거 아니냐고 주변 성화가 있었지만 엄마아빠는 기억하고 싶었던 거야. 그 감동적인 계절을.

여름은 당장이라도 나가 소주 한 병을 사 오고 싶었다. 아버지와 술 한 잔 나누고픈 마음 컸으나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버지는 혼술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술은 좋은 날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시는 것이라 생각하셨다. 그래서 집에는 소주는 물론이고 맥주 한 병 없었다. 엄마는 아들의 마음을 읽었는지 탁자에 진열돼 있던 양주와 잔 두개를 내어놓았다. 아버지는 이런 엄마를 보곤 웃더니 여름에게 잔을 채워주셨다.

엄마는 과일을 깎아 내오며 여름에게 물었다. 엄마아빠가 널 자유롭게 키운다고 키웠는데 넌 그걸 느꼈니? 구속하지 않으려 나름 노력한거야. (웃음)

여름은 웃었다. 여름도 알고 있었다. 여름이 하고자 하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막지 않으셨다. 여름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셨다는 걸 시간이 지나며 여름도 느꼈다. 아버지가 걱정 반 호기심 반 면담을 요청한 적이 두어번 있었을 뿐. 고교 시절 성적이 급등락을 했던 시절이 그 중 한번이었다. 그 뒤로는 성적에 대해서도 아무 말씀이 없었다. 아들이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알게 됐고 그래서 오히려 부모 입장에선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하셨다. 그 정도 아이라면 믿고 맡겨도 충분하단걸 직감하셨다고. 여름으로서는 그런 부모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너희 형 일도 있고..널 힘들게 얻어서..엄마아빠는 널 자유롭게 키우자고, 남들처럼 너를 구속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네가 건강하게 자라고 영특하고 교우 관계도 좋다보니 엄마아빠도 인간인지라 욕심이..무의식중에 생겼던 것 같아. 그 때 그 일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남들처럼 너 공부 안한다고 잔소리하며 너와 우리 모두를 지옥으로 몰고 갔을지도 몰라.

엄마는 무엇인가를 떠올리며 얘기했고 아버지도 공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얘기했는지 모르겠는데..그 날 이모들이랑 해서 서울랜드에 놀러갔었거든. 벚꽃 흐드러진 봄날이었지. 코끼리 열차였던가? 그 열차 이름이?

아버지는 엄마를 보며 확인을 구했고 엄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끼리 열차를 기다리는데 네가 보이질 않는거야. 그 때 네가 대여섯 정도 됐으려나? 보통 어른 한 명이 네 손을 잡고 다녔는데 그 날은 사람이 많다보니 서로 널 챙겼으리라 여긴거지. 엄마도, 이모들도, 아빠도 너와 같이 있지 않았어. 혼비백산한 우리들은 너를 찾아 헤맸고 네 이름을 부르는데 멀리서 네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어. 난 인파를 밀치며 그 음성을 쫓아 정신없이 앞으로 나갔고 먼발치에서 뒷모습이 너같은 아이가 다른 남자 어른의 손을 잡고 가는 걸 봤단다. 난 정신 나간 사람처럼 괴성을 지르며 너어게 달려갔고 너라는 걸 확인하곤...널 지켜줬을 그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단다.

절 데려가던 그 사람은 누구였어요? 유괴범이었나요? 여름은 궁금함에 물었다.

당시 널 찾았다는 생각에 너무 기뻐서 난 그 남자를 의심할 여유도 없었어. 그 남자는 미안하다며..자기 애인 줄 알았다고 하곤 사라졌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말이 되는 변명인가 싶은게 네 말대로 유괴범이지 싶다..

아버지는 언더락도 아닌 양주를 그대로 털어넣으셨다. 여름도 조심스럽게 잔을 입에 갖다댔다.

그 때 이후로 마음을 다잡았다. 널 두번 다시 잃지 않겠다고. 널 잃는다는 건..육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심적인 것도 포함된 의미였어. 부모와 자식간 갈등의 골이 깊어 네가 우리와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면 그 날 서울랜드에서 널 유괴당해 다시는 널 보지 못하는 비극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긴거지. 그 날의 소동은 많은 것을 깨달게 했어. 그 날 네가 우리의 외침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났을 테고 이렇게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지 않았겠니..

아버지는 지긋이 여름을 바라보셨다.

여름아 한 잔 해라. 넌 우리에게 찾아온 보석이다. 언젠가 네가 데려올 또 하나의 보석이 궁금하구나. 얼마나 멋질까. 두 보석이 서로를 빛내는 장면이라니..

아버지는 술은 역시 즐거운 기분으로 마셔야 한다며 술 잔에 가득 술을 담으셨다. 엄마는 이런 아빠를 나무랐고 여름은 그저 이런 두 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려보았다. 그의 옆에서 그를 나무랄, 인생의 희노애락을 함께하며 더없이 그를 사랑할, 한 여자를. 어쩌면 그처럼, 어떤 연유인지 계절을 이름으로 딴, 그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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