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가 떠나자 엄마는 바로 캐리어를 꺼내들었다.
겨울아. 우리 몇 시 기차였지?
1시요. 용산. 겨울도 주섬주섬 옷을 챙기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실종되고 엄마가 홀로 생계를 책임졌던 막막한 시기. 엄마를 살뜰하게 챙겼던 고마운 분이 있었다. 엄마는 외국 음식을 현지화한 프랜차이즈로 큰 성공을 거뒀는데 초반에는 부도의 어려움을 몇 차려 넘겼다. 당시 초기 투자자였던 분 중 자금을 회수하지 않고 끝까지 엄마를 믿어준 이가 있었는데 엄마는 이후 그 분과 의자매처럼 지냈다.
겨울이 어린 시절부터 왕래가 잦아 겨울도 이모라 부르며 잘 따랐다. 작년 이모는 대장암 판정을 받고 요양차 고향인 보성으로 내려갔다. 이후 돌아온 첫 명절. 엄마는 한 달 전 KTX를 예매하면서 겨울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해놓은 터였다.
광주송정역에 내려 역사 밖으로 나오자 이모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언니. 우리가 득량까진 간다니까 왜 여기까지 왔어?
엄마는 언니에게 안기면서도 핀잔부터 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광주에서 얼마 안걸려. 어머. 겨울이 넌 볼수록 예뻐진다.
겨울도 이모와 깊고 따스한 포옹을 하며 웃었다. 이모는 겨울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겨울 본인도 이모에게 마음을 열고 지내지만 무엇보다도 엄마가 의지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감사했다. 거의 유일했다. 외로운 엄마의 친구가 되어준.
엄마는 운전자 옆 보조석에 앉아 쉴 새 없이 얘기했다. 이모는 운전중에도 적당한 추임새를 넣으며 엄마의 말을 잘 들어줬다. 뒷자석에 홀로 앉은 겨울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창밖의 풍경을 보며, 서울에 있을 몆 몇 이를 떠올렸다. 최근 친구들과, 그리고 여름과 함께했던 주말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자꾸 웃음을 머금었다.
간혹 운전석에서 백미러로 바라보던 이모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이모는 빙그레 웃었다. 겨울이 혼자 웃고 있는 것을 보곤 이모는 겨울안에 누군가의 방이 생긴것이라 짐작했다.
세 사람은 가는 길에 녹차밭에 들려 사진도 찍고 차도 한 잔 마셨다. 엄마와 이모는 따뜻한 녹차를, 겨울은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넌 이렇게 추운데 아이스크림을 먹니? 엄마는 한마디 했고
놔둬. 이즘 따뜻한 음료 고르면 나이든 사람이라며? 겨울이가 아직 젊은거지. 라며 이모는 엄마를 되려 나무랐다.
엄마가 자신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고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한다는 걸 겨울은 알고 있었다. 다만 엄마는 그 표현법에 대해 부모로부터 배우지 못했고, 생계 유지라는 미명하에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깨고 자식에게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관심은 과도한 간섭으로, 애정은 삐딱한 시선과 가시돋힌 발언으로 변질됐다. 그것이 본인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가족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엄마는 알고 있는듯 했다.
겨울은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그런 방식에는 면역이 안됐다. 왜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해? 겨울은 엄마에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이모가 없었다면 모녀의 보성 여행은 시작부터 냉기가 돌았을지도.
이모의 집에 도착해 짐을 풀고는 겨울은 동네를 천천히 돌았다. 발길 닿는대로 걷다보니 꽤나 멀리까지 나왔다. 인근에 바다가 있다는 이모의 말이 떠올라 내친김에 바다까지 가고 싶었다. 방향을 몰랐지만 조금의 이성과 상당한 본능을 믿고 갔다. 조금씩 바다 냄새가 났다. 속초터미널에 내렸을 때 코를 찌른 바다내음은 이런 것이었나요? 겨울은 누군가에게 물었다. 답을 기다리지 않고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바다라니.
겨울은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느끼는 해방감인가. 두 팔을 쭉 뻗고 소리를 내질렀다. 바다야 내가 왔어. 설산을 보며 외쳤던 여주인공의 그리움이 오버랩됐다. 겨울은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마냥 외쳤다. 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내요. 한번더 외쳤다. 저 보고 싶지 않아요? 전 너무 보고 싶어요..
데크길을 따라 걷자니 갯벌에 설치된 미술품 한 점이 눈에 띄였다. 두 마리 공룡의 긴 머리를 이용해 하트 모양을 만든 예술 작품이었다. 갯벌과 잔잔한 바다, 차분한 하늘까지 완벽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겨울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저렇게 큰 공룡도 외로움을 타는구나..서로가 얼마나 의지가 될까..그런 마음도 들었다. 이내 어처구니 없어 웃음이 났지만. 큰 덩치와 외로움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싶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이모와 엄마는 바로 겨울을 태우고 여수로 향했다. 이달까지가 철인 키조개를 먹여주고 싶다는 이모의 말에 엄마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이모가 아프기 전에도 엄마는 이모의 말을 존중했다. 이모는 실리보다는 정이 우선인 유일한 존재였다. 이모가 아프기에 엄마는 전보다 더 조심하고 배려하는 느낌이었다. 겨울에게 그런 엄마는 상당히 낯설었지만 싫지 않았다.
이모가 돌아가시면 누가 엄마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두려웠다. 언니? 가당치도 않다. 명절인 오늘도 최소한의 예의만 갖추고 떠났지 않나. 엄마와 언니의 관계는 사뭇 비즈니스같은 허무한 느낌마저 풍겼다. 언니는 엄마의 요구를 완벽히 해냈다. 늘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고 의사가 됐으며 의사 남편을 얻었다. 그리곤 엄마를 떠났다. 엄마도 언니를 찾지 않았다. 미션 클리어. 그것으로 관계는 일단락됐다.
겨울 자신? 자신은 그런 존재가 될 그릇이 아니다. 엄마를 안쓰럽게 여기고 엄마의 행복을 바라지만 그 역할을 할 수는 없다. 능력도 없거나와 그럴 마음도 없다. 자신은 엄마를 품을 수 없다고 늘 생각해왔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엄마의 뜻을 최대한 존중하는 정도. 딱 그 정도 선이었다.
그럼 누가 엄마의 곁에 있어야할까. 엄마의 괴팍한 성정상 아무도 그러지 않을 것이고 결국 엄마는 철저하게 고독한 노후를 보내게 될 것이다. 겨울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게 내버려둘 순 없다. 어린 두 딸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했던 사람을..그렇게 헌신짝처럼 내칠 수는 없다..
육수에 야채를 우려내고 그 위에 키조개를 살짝 데친다. 키조개와 야채, 갓김치를 삼합으로 먹는 키조개 샤브였다. 엄마는 겨울의 복잡한 속내를 모르는지 이모와 연신 서울과 보성 이야기를 나눴고 겨울은 조용히 들으며 식사를 했다.
중간에 화장실을 들렸다 나오는데 이모가 복도에서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아. 이모..오래 못살지도 몰라. 항암치료 받고 있지만..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해. 네가 엄마 친구가 돼주렴. 쎄 보이려 할 뿐 여린 사람이란거 너도 알잖니..엄마가 걱정되는구나..
이모는 자신의 건강보다 엄마를 더 걱정했다. 겨울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이모. 그런 말 말아요. 이모 없으면 엄마도, 저도 못살아요. 제발 약한 말씀 마시고 이겨내세요. 이모는 할 수 있어요. 저도 더 신경쓸게요. 죄송해요. 그간 한번도 못와뵙고..
자신을 나무라는 겨울을 이모는 꼭 안아주었다. 이모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모는 겨울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눈을 맞추고 웃었다. 겨울도 웃어보려 했으나 입꼬리는 도무지 올라가지 않았다.
보성으로 돌아오는 길. 가로등이 없는 고속도로는 운전하기 쉽지 않았다. 이모는 가끔 상향등(쌍라이트)을 켜서 도로를 확인하며 운전했다. 이모가 없는 엄마의 인생은 상상할 수도 없다. 엄마는 더 외로워지고 그만큼 더 완고해질 것이다. 이모..제발 살아줘요. 이모 자신을 위해서, 엄마를 위해서..그리고 저를 위해서요.
겨울과 엄마에게 이모의 존재, 아빠에 대한 잔상은 두 개의 빛, 두 개의 상향등이였다. 아빠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세월따라 희미해져 상향등 하나는 그 밝기가 예전같지 않았지만 이모의 존재로 어떻게든 삶은 굴러가고 있었다.
이제 이모라는 상향등마저 희미해진다면 겨울과 엄마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삶을 운전해야 할까..
겨울의 고심을 알았던 것인지..이모는 거울 너머 겨울을 흘깃 보곤 다시 한번 상향등을 켜고 힘껏 악셀을 밟았다..마치 아직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