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는 뜬구름 같은 것

by 정자까야

그 일은 아직 진전 없지? 여름은 병화가 다가오자 스치듯 물었다.

응. 주중엔 회사 일로 치이고 주말에 짬내서 알아보는데 아직은 좋은 소식 없다. 미안하네.

미안하긴. 부탁한 사람은 나야. 내가 미안하지..더 미안한 건 그만하자고 말을 못하겠다는 거야. 여름은 병화의 어깨를 툭 치며 미안함을 전했다.

알아. 나도 그만둘 생각은 없어. 친구의 운명같은 사랑에 일조하고픈 마음 크다.

병화와 여름이 물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영수가 다가왔다.

두 사람. 아까부터 뭔 얘길 그리 해. 나 빼고 뭐 계획하는 거라도 있냐?

아니. 전반에 우리 공격이 좀 안풀렸잖아. 내가 여름이한테 윙이 더 달려야한다고 코치 좀 해줬다.

병화는 영수에게 말하며 여름에겐 찡긋 사인을 하고 자리를 떴다. 여름은 영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아니. 지나 열심히 뛰지. 여름이 죽을만큼 뛰더만. 뭐 손흥민만큼 하길 바라는거야? 영수는 병화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저 녀석. 신혼 때라 힘들거야. 회사 일 한참 바쁠 나이지, 집에 오면 배우자한테 최선을 다해야지, 그 와중에 친구라고 있는게 황금 같은 토요일 오전에 조기 축구하자고 불러내니..내가 웬수같겠지? 영수는 껄껄 웃었다.

영수는 날 풀리면 축구 한 번 하자며 친구들을, 말 그대로, 들들 볶았다. 그리고 잡은 첫 번째 게임. 영수 본인이야 전직 선수(이곳에선 선출이라 불렀다)였으니 두 말 할 필요 없고, 셋 중 희상이가 제법 공을 찼다. 다소 육중한 몸인데도 드리블 실력이 탄성을 자아냈다. 하프 타임에 친구들은 희상이에게 공 좀 찬다며 칭찬했지만 정작 본인은 별 일 아니란 듯이 대꾸했다.

초등학생 때 클럽에서 좀 뛰었어. 뭘 그리 놀라냐.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나 오후에 데이트 있다고.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데 공이 보이겠니? 아니 축구를 하려면 좀 빨리 보든가. 일정 애매하게 11시가 뭐냐.

희상이가 툴툴댔고 영수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야..이게 그나마 빠른 거였어. 너희들 일정 다 맞추는게 쉬운 일이냐 어디..라며 나름 변명을 했다.

후반전. 여름은 전반보다 더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결과는 2:5 패. 끝나자 다들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부드러운 햇살과 사람들의 웃음. 필요한 것은 이 정도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 희상이는 여름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여름아. 먼저 갈게. 아..그리고 파이팅이다. 너의 전쟁 같은 사랑.

여름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전쟁이라..살아남기 위해 난, 누군가의 심장에 내 진심을 적중시켜야 하는건가.

간다. 병화도 축구화를 들쳐메고는 여름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희상이의 말을 들었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넌 총으로 승부 볼 생각이냐? 경쟁자는 대포를 준비할지도 모르는데..

녀석. 속마음을 읽었나. 여름이 뜨끔하여 어색하게 웃는 사이 영수가 다가왔다.

오늘 뭐해? 겨울씨 안만나?

아..오늘 선약 있다고 해서. 여름은 통상적인 일처럼 말했다.

아..선약? 아마도 그 분이겠지? 여름은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근데 왠지 너..여유가 느껴진다. 아님 포기한거야?영수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여름 옆에서 연신 물을 마셨다.

너는 오늘 뭐하는데? 여름이 물었다.

영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멋적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랑 같이 갈래? 오후에 미희씨 보기로 했거든. 영수는 본인이 말하고도 어처구니 없었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여름은 머금었던 물을 내뿜으며 기침을 몇 차례 했다. 겨우 진정시키고는 흥분해서 물었다.

미희씨? 겨울씨 친구 미희씨?

그래..그 미희씨. 영수는 아무래도 신경쓰였는지 계속 여름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라. 어쩔 셈이야? 너 지금 상당히 위험해. 상대방이 그냥 만났다 헤어질 수 있는 그런 가벼운 존재가 아냐. 나와 겨울씨 모두에게 중요한 사람이라구.

여름은 날이 선 상태로 말했다.

알아. 입장 곤란한거. 여친과는 헤어졌어. 이별을 말한건 최근이었지만..사실상 오래됐어. 둘 다 미적거렸을 뿐. 그러니까..내가 양다리를 걸치거나 그런건 아니야..

영수는 계속 얘기했다.

그 날 우연히 넷이 만나고 미희씨랑 자주 카톡했어. 나랑 잘 맞더라구. 같이 얘기하면 재밌고 편했어. 뭐..오늘은 그냥 가볍게 보는거야. 미희씨도 그렇고..상대 없는 청춘남녀가 토요일 오후에 만나 밥 한 끼 하는게 죽을 죄는 아니잖아?

영수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어 여름은 조금 신경을 가라앉혔다. 물을 조금 더 마시고 호흡을 기다듬으려니 영수가 말을 이었다.

너 곤란한 상황같은 거 안만들테니 걱정 말고. 혹시 아냐. 내가 사랑의 큐피트 역할을 하게 될지. 여튼 넌 안간다는 거지?

영수는 여름의 어깨를 힘껏 치고는 웃으며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멀어지는 친구를 보며 여름은 제발 아무 일 없기를 바랐다. 겨울씨도 알고 있을까, 모른다면 나도 침묵해야 하나..그런 생각을 하면서.

인근 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걷는 사이 전화벨이 울렸다.

어 다희야?

어디에요? 네? 김포공항 근처? 삼총사 오빠들이랑 조기 축구 했다고? 참 별거 다하네..시간 되면 나 좀 도와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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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했다 하니 그냥 그 차림으로 오라해서 왔지만 광화문역에서 축구 유니폼을 입고 있으려니 여름은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데 누군가 뒤에서 여름을 와락 껴안았다. 깜짝놀라 뒤를 보니 다희가 웃고 있었다.

깜짝이야. 십년 감수했네. 다희야..왜 안하던 포옹을 하고 그러냐. 사람들 많은데서. 여름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오늘 참 여러 명이 놀래킨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왜? 우리가 불륜 관계도 아니고. 오빠 사귀는 사람 있어? 없잖아. 나? 나야 한 명한테 메인 몸도 아니니 문제될 거 없고.

네 이상한 논리에 반박할 생각 없으니 본론부터 말해. 도와달라는 게 뭐야? 다희의 청은 차마 거절하기 힘들었다. 이게 다희가 얘기한 지구의 인력인지도 모르지만.

아. 오빠. 별 거 아냐. 나 걷기 이벤트 신청했는데 주중에 야근하느라 거의 못 걸었거든. 일기 예보 보니 내일 황사비가 내린다느니 대기질이 매우 나쁨이니 해서 오늘 모자란 걸음 수 다 채워야 할 것 같아.

그래? 얼마나 부족한데?

2만보 좀 안되. 다희가 핸드폰을 확인하며 답했다.

2만보면..세시간 좀 넘게 걸리려나..여름은 다희의 보폭으로 얼추 계산해 보았다.

혼자 걷기 심심하니 페이스메이커 해달라는 거구나? 더 힘든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기며 여름이 물었다. 오전에 너무 달려 걷는 거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정도였기에.

점심은 사 줄게. 다희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여름도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러더니 다희를 잠시 응시하고는

오늘 뭔가 이상하다. 유니폼, 런닝화 차림에 썬크림은 알겠는데 립스틱은 왠지 좀 과한데?

아..이거. 아니 남친 중 한 명이 선물이랍시고 줬는데 여태 안바르다 한 번 해봤어. 이상해? 선 넘었나?

아니..뭐. 내가 네 남친도 아니고 뭐라할 건 아니지만..선 넘은 건 아니고..그 자체론 예쁜데 오늘 복장이랑 좀 안맞는다는 거지.

그니까 언밸런스하다 이거지? 다희는 이즘 유행하는 유행어를 특유의 동작과 함께 말했다. 여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야..그건 선 넘었어. 여름은 다희의 털털함에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내숭이란게 1도 없는 녀석. 여름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계획은 이거야. 지금 2시쯤 됐지? 일단 좀 걸어. 한시간 정도. 서대문역 근처 가면 나만의 맛집 있거든. 거기서 점심 먹자. 오빠 김치볶음밥 좋아하지? 거기 진짜 잘하거든. 그럼 4시 쯤 되겠지? 그리고 용산 근처..이촌동이나 그 즈음까지 계속 걷는거야. 소화도 시킬 겸. 한 6시 넘어서 한강 공원 보면 맞은편 여의도부터 해서..일몰이 멋질 거라구. 어때?

사는게 계획대로 된다니? 여름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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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에 있는 분식집은 여름의 취향 그대로였다. 대학 다닐 때부터 김치볶음밥 집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여름 때문에 친구들은 상당히 피곤해했다. 배달이 기본인 집이라 가게 안 테이블은 3개가 다였다. 그나마 두 곳은 예약 표시가 돼 있었다.

이런 분식집도 예약을 하나보네..여름은 신기한듯 다희에게 말했다. 여기 찐 맛집이라니까. 일전에 방송국에서 취재하려 했는데 사장님이 거절하셨대.

아니 왜? 돈 내고 방송해달라고 하는 마당에? 여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나 사장 아주머니랑 친하거든. 여기 몇 년째 단골이라..물어보니 방송 타면 처음 몇 달은 손님이 많대. 돈은 잘 버는데 그 사이 단골들이 다 떨어져 나간다고..

아..자리가 없어서? 배달도 늦고?

그렇지..다희가 대답하는 사이 김치볶음밥이 나왔고 여름은 허겁지겁 먹기 바빴다. 맛도 맛이었지만 여름으로선 오늘 첫 끼였다. 다희가 반 정도 먹었을 때 여름은 한 번 더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다희는 그런 여름을 보며 말했다.

방송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은 속된말로 다 뜨네기라고..아주머니가 그러더라. 고객은 맞는데 단골은 될 수 없다고. 방송빨 끝나면 1회성 고객도 안오고 단골도 떠나니..잘못하면 가게 접게 된다고..

이해했어. 아주머니께서 현명하시네..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손님 두 세 팀이 들어왔다가 예약석 표시를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여름이 식사를 다 하고 후식으로 매실차를 마실 때까지도 예약 손님은 오지 않았다. 여름은 밖에 나가 기다렸고 조금 시간이 지나 다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카드 리더기가 고장난건가? 여름의 물음에

아니. 주인 아주머니랑 조금 얘기하느라..오래 기다렸으면 미안. 다희는 웃으며 여름의 옷소매를 끌었다.

둘은 일상에 관해, 친구들에 대해, 미래를 그려보며 발길 닿는대로 걸었다. 방향이 헷갈리면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큰 틀에서는 다희의 계획에 맞게. 산책하듯 걸어 큰 변수는 없었다. 어느덧 6시가 조금 지나 여의도를 바라보며 한강 변에 서 있게 된 두 사람.

노을이 아름답게 한강을 물들이고 있었다. 한 때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맞은 편 고층 빌딩은 낙조를 받아 더 반짝거렸다. 말 그대로 눈이 부셨다. 여름은 손을 펴 이마에 대곤 한강과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옆에서 노을을 말없이 쳐다보는 다희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긴 머리를 한가닥으로 질끈 동여매곤 유니폼을 입고 허리에 손을 올려 한강을 바라보는 옆 모습이 광고 모델 같은 인상이었다. 오똑한 콧날과 투명하게 빛나는 눈빛이 더없이 예뻤다. 다희는 뭔가 얘기할 게 떠올랐는지 혼자 웃음을 머금다가 여름을 보며 말했다.

오빠. 실은 아까 식당에서 말하고 싶었는데 오빠가 하도 열심히 먹어서..말할 타이밍을 놓쳤어. 다희는 긴장을 풀려는 듯 애써 웃었다.

가게를 운영하는 건 인생과도 같은거야. 뜨네기 손님에게 의지할 순 없듯이 인생도 스쳐 지나는 인연에 연연하면 안되겠지. 오빠. 영화 노팅힐 기억나? 물이보나 마나 오빠는 그 영화 열번은 더 봤겠지. 거기서 여주가 남주에게 고백하는 장면..서점에 세계적 명화 원본을 선물로 들고 와서는..알지? 그 때 뭐라 했는지 알아? 인기는 뜬구름같은 거라고..자기도 그저 여자일 뿐이라고..남자 앞에 서서 사랑을 바라는..

여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줄리아 로버츠 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인기 많아. 그리고 오빠가 휴 그랜트는 아니지만..다희는 잠깐 미소를 머금고는 말을 이었다.


난 지금 여주인공의 마음처럼 말하고 있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을 바라는. 답을 기다릴게. 준비되면 언제든 말해줘.

그리곤 다희는 여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여름은 움직일 수 없었다. 다희는 긴장해서 꼼짝도 않는 여름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다희의 숨소리가 바로 곁에서 느껴졌다. 얼굴을 떼곤 천천히 멀어졌다. 여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세계적 명화는 집에 가서 확인해봐. 준비했던 선물이야. 다희는 돌아서서 걷다가 뒤돌아보며 한마디를 보탰다.

아..물론 원본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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