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봄은 겨울에게 전화를 걸지 한동안 고민하다 결국 하지 않았다. 겨울이 올지 안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짙은 남색 반목 폴라티를 입은 김봄은 거울 앞에서 그루밍 토닉, 드라이, 컬크림 등의 순서로 머리를 단장했다. 잘 다려진 양복을 걸친 후 신발장 앞에 준비된 종이백을 들고 집을 나섰다. 대학 연극 동아리 선배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서.
봄에게는 선배고 겨울에게는 후배였다. 성격이 둥글둥글해 선후배와 잘 지냈다. 재학 당시 겨울 선배의 팔짱을 끼고 다닐 정도로 친했기에 아마도 선배는 오지 않을까 싶었다.
전화를 걸어 같이 가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뒤이어 드는 생각. 한달여 전 유투브로 나름 화제가 된 자신의 인터뷰가 선배를 망설이게 하지 않을까. 그 날 이후로도 선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을 대했지만 오늘 일정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것이다. 자신과 봄을 모두 아는 사람들의 모임인지라 틀림없이 뒷말이 나올 것이기에. 그 와중에 식장에 나란히 온다? 겨울이 부케를 받는 차례냐고 사람들은 틀림없이 수근댈 것이리라. 촬영 당시 어쩌면 이런 파장까지 순간적으로 염두에 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김봄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도착 직후 신부 대기실에 가서 신부와 눈인사를 나눴다. 동아리 선후배들이 예식장 복도 등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인사를 건네자 유투브 잘 봤다는 덕담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을 건네는 이들이 있었다. 일을 벌인 자신도 이 정도로 신경이 쓰이는데 얼결에 엮이게 된 겨울 선배는 오죽할까 싶었다. 선배에게 미안했지만 다른 사람에겐 그런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짐짓 여유있게 농으로 받아치고 더 뻔뻔하게 식장을 누볐다.
연극 동아리 출신답게 예식은 정형적이지 않았다. 주례는 없었고 사회도 신부의 친구가 맡았다고 했다.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목소리를 듣곤 김봄은 웃었다. 신부의 친구 역시 김봄이 잘 아는 동아리 여자 선배였다. 주위를 둘러보며 겨울이나 경희, 미희 선배를 찾았으나 어두운 조명과 인파 때문인지 보이지 않았다. 역시..오지 않은 것일까.
식이 진행되었고 김봄은 체념하며 예식을 지켜보았다.
네 듬직한 신랑의 등장에 양가 어르신이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시네요...혹시 조명 감독님 제 목소리 들리시면 이 식장의 모든 불을 꺼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태양처럼 환한 미소를 지닌 우리의 아름다운 신부가 등장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문이 열리면 모두 큰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김봄은 웃었다. 사회를 맡은 박선배. 학교 다닐 때는 수줍음 많던 소녀 같았는데..진행이 꽤나 재미있고 매끄러웠다. 며칠 전부터 밤낮으로 연습했을 선배를 떠올리니 슬쩍 웃음이 나왔다.
신부는 아버지와 함께가 아닌 홀로 등장했다. 부모님들은 모두 식장 앞에 앉아 계셨다. 이런 구성은 트렌드인가 혹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나 김봄이 생각하는 동안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하객 중 어린 아이와 동석한 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가 갑자기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무대로 난입을 했다. 하객들은 순간 놀랐지만 이내 아이의 무구한 행동임을 알고 웃었다. 진짜 돌발 상황은 그 다음에 발생했다. 사회자가 황망한 마음에 식순을 건너뛴 것이다. 가령 A 다음 B가 나오는 것으로 신랑신부와 입을 맞췄는데 별안간 C가 나온 셈. 신랑, 신부가 당황하여 우물쭈물했지만 사회자도 멘붕이 됐는지 정정할 생각을 못하고 계속 식순 C를 고집스럽게 진행했다. 양가 부모님들도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당황해했고 하객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다못한 신랑이 사회자에게 다가가 식순 B가 빠졌음을 알렸다. 박선배는 남은 멘탈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식을 마쳤다.
식이 마무리됐고 박선배는 조용히 단상을 내려왔다. 동기들 몇이 선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을 뿐 누구도 선배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식이 끝난 식장은 더없이 평화로웠지만 지금 이 순간 박선배의 내면만큼은 전쟁터일 것임이 분명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참담함..그런 것이였을까. 식을 망쳤다는 죄책감과 신랑신부에 대한 미안함 등으로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리라.
김봄도 그저 멀찍이서 박선배를 보고 있었는데 순간 겨울 선배가 박선배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겨울은 반대 방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박선배의 등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녀는 뒤돌아봤고 겨울을 알아봤으며 겨울이 건넨 몇 마디 말에 그 품에 안겨 울었다. 김봄은 그 장면을 멀리서 말없이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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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은 별도 층에 있었다. 친구들이 함께 식사하자는 것도 마다하고 김봄은 겨울 일행을 찾았다. 미희 선배가 뷔페 음식을 나르는 것을 확인하곤 뒤따라갔다. 다행히 선배 일행이 앉은 원탁 테이블에 빈 자리가 있었다.
여기들 계셨네요. 한참 찾았는데. 김봄은 세 선배에게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야..김봄. 너 한동안 겨울에게 접근 금지인거 몰라? 미희가 농반진반으로 쏘아붙였다.
아..왜요. 그거 유트브 때문에요? 아니 그럴 수도 있지. 뭘 접근 금지까지..저는 뭐 고백 못하나요. 그리고 김배우한테 살짝 말한건데 그걸 진행자가 난데없이 소리내 읽어 그 사단이 난거 아닙니까. 제가 의도한 건 아니라구요.
김봄도 농반진반 받아쳤다. 미희는 여전히 핀잔주는 눈빛이고 경희는 슬쩍 웃고는 계속 식사를 했다. 겨울은 김봄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됐어. 봄이 말도 틀린 건 아니야. 나도 영상 봤는데 사회자가 끼어든건 사실이니까. 지나고 나면 이런 것도 다 추억일거야.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니 봄이 네 용기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날 생각해준 네 마음 잘 받았어. 좀 과하긴 했지만. (웃음)
봐요. 선배들이랑 겨울 선배가 왜 클라스가 다른지 알겠죠? 김봄은 두 선배에게 따지듯 물었지만 내심 그렇게 말하는 겨울에게 미안함만 더 커졌다.
김봄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세 명의 선배와 옥신각신하면서. 유투브 인터뷰의 파장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해 내심 안도하면서.
후식을 들고 오자 겨울 선배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경희 선배에게 묻자 아마 화장실 간 모양이라고 대답했다.
김봄은 혹시 몰라 정장 상의와 종이백을 주워들고 식당 입구쪽으로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건물 오른편으로 밖으로 터진 테라스가 있었고 겨울이 밖을 보며 난간을 잡고 서 있었다.
김봄도 겨울과 마찬가지로 난간을 잡고 겨울과 나란히 섰다.
여름씨가 절 만난 얘기 하던가요? 옆으로 다가와 불쑥 말을 붙인 김봄을 보곤 겨울은 놀랐다가 이내 웃었다.
아니. 그런 얘기 안하던데. 둘이 만났어? 무슨 일로? 겨울은 처음 듣는 얘기라며 궁금한 듯 봄에게 물었다.
대답 대신 김봄은 맑은 하늘만 한동안 쳐다봤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꼭 말한다 하지 않는다의 문제라기보단 삶의 태도 같은 걸 뜻하는 것 같아요. 팬미팅에서의 인터뷰. 제가 서동요를 부른거죠. 결과전으론.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리 돼도 나쁠거 없다는 마음이었을지도 몰라요. 미필적 고의라고 할까요. 그게 제 스타일이죠. 겉으로 표현하고 제 노력을 보상받고 싶은.
겨울은 김봄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말했다.
넌 너만의 색이 있는 거니까.
맞아요. 저와 비교당해 기분 좋을 사람 없듯이 저도 누군가와 비교당해 위축되고 싶진 않아요. 선배 말대로 각자의 스타일이 있고 본인만의 색이 있는거죠. 하지만 오늘만큼은..
김봄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곤 다시 말했다.
오늘만큼은 부럽네요. 삶을 대하는 진중함이요.
겨울이 말없이 쳐다보자 봄은 말을 이었다.
회사 업무로 도움이 필요해서 여름씨를 만났어요. 여름씨도 공사를 구분해서 최대한 애써줬고..고마웠죠. 인터뷰 사건 이후 선배에게 전화하기가 뭐해 전 말 할 기회가 없었지만..여름씨는 선배와 통화하면서 그냥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저였다면 아마 말했지 싶어요. 그런 일이 있었다고..선배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소재였으니 그걸 빌미삼아 연락할 수도 있을테고.
근데 말하지 않았다니..글쎄 뭐랄까..인정하기 싫지만 (웃음) 여름씨란 사람 꽤 괜찮은 사람 같아 요. 상대를 배려하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좀 전에 선배 찾다가 박선배 만났거든요. 감정을 잘 추스렸더라구요. 괜찮냐고 하니..겨울 선배 덕분에..괜찮아졌다고..하객 중 모르는 분들의 험담..
남의 결혼식을 그렇게 망쳐놓나..정도껏 해야지..
그런 말도 들리고..식 끝나고 아직 신랑 신부에게 미안함도 전하지 못해 마음이 너무 무거웠는데..겨울 선배의 위로 몆 마디에 무너졌다고..실컷 울고 나니 속이 오히려 시원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더군요.
김봄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과장되고, 뭔가 듵떠있어 어수선하고, 한없이 가볍고..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여름이란 사람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멀리서 선배가 박선배 안아주는 거 보면서...느꼈어요. 진중하고 배려깊은 언행에서 풍기는 아우라를.
자요. 받아요. 김봄은 이야기의 말미에 겨울에게 종이백을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미안했고..그 미안함 받아줘서 고마웠어요. 나름 정성들여 포장한거에요..세상 하나뿐인..진품이구요. (웃음)
봄은 겨울에게 먼저 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겨울은 종이백 안 곱게 포장된 선물을 풀어보았다. 액자였다. 그리고 그 안의 낯익은 문구. 겨울은 맑은 하늘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