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시간

by 정자까야

가을은 올해 들어 주말 중 하루는 웬만해선 겨울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 달에 두세번 정도였던 작년과 비교해선 확실히 만남이 잦았다. 겨울로서는 회사 잔업이나 가족의 대소사, 각종 경조사, 친구들과의 약속 등을 주말 중 나머지 하루로 채우다보니 자신만을 위해 숨 돌릴 시간조차 충분히 갖질 못했다. 여름은 겨울이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아도 겨울의 이런 강행군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위한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가슴 저미면서도 아무것도 요청할 수 없었다. 무엇을 바라는 순간 겨울을 둘러싼 이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기에.

겨울을 친구들과 함께 본 후 2주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다. 단 둘이 얼굴을 본 건 한 달이 다 돼 갔다. 여름은 입대했던 자신을 기다려줬던 지난 날의 인연이 새삼 떠올랐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떻게든 견뎌냈던 그녀의 고통과 인내에 대해 나는 충분한 보상을 했던가..그런 미안함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지나고 나서야 알 뿐이다. 얼마나 소중한 인연이고 그런 시절이었음을.

지난 주 일정을 물었을 때 겨울은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겨울이 침묵했기에 다음 주 일정을 묻기가 두려웠다. 그 주의 일정이 빡빡할 때 겨울은 종종 다음 주는 선약이 없다고 여름에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겨울의 침묵은 다음 주 일정도 여의치않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을 본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듯 했기에.

미안해요. 정말..여름씨. 내주에도 선약이 있어요. 여름씨를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해 너무 미안해요..토요일은 대학 후배 결혼식이 있어요. 제가 안가면 많이 서운해할 거에요..그리고 일요일은 가을씨 보기로..정말 미안해요...

겨울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겨울에게 죄책감 같은 감정을 들게 한 듯해 여름은 되려 미안했다. 아쉽고 서운하고 미안하고 보고싶은 마음이 뒤엉켜 말을 잇기 쉽지 않았다.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핸드폰을 거실 소파에 내려놓았다.

틀어놓은 TV 채널은 동계올림픽 하이라이트를 보여주고 있었다. 쇼트트랙 남자 결승전. 1위는 끝까지 인코스를 내주지 않았다. 2위와 3위는 둘만의 자리싸움을 할 뿐 1위를 추월하지 못했다. 그렇게 1위는 결승선을 통과했다. 2위는 3위 자리에서 치고 올라왔기에 나름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1위 선수에게 다가가 축하를 해주는 스포츠맨십도 보여주었다. 여름은 리모컨으로 TV를 껐다. 자신이 뛰고 있는 이 레이스에선 2위와 3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2위가 1위를 축하해주는..그런 일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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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혜선과의 시간이 부쩍 늘어난 것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딱히 거절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혜선은 주로 자신의 사업이나 관련된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가을은 자신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좋았고 자신도 겨울이나 어머님과의 관계 등과 관련한 조언을 혜선에게 들을 수 있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혜선이 다음 주 일요일에 비누 박람회에 같이 갈 수 있냐고 물었을 때 가을은 겨울과 선약이 있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데이트는 대개 토요일에 하지 않아? 일요일 만나는 건 좀 부담스럽잖아. 월요일 출근도 있고.

실망한 듯한 혜선의 음성을 듣고 가을은 이내 고민이 됐다. 최근 들어 겨울을 자주 만난 건 사실이다. 하루 정도 양해를 구한다고 이해 못할 사람도 아니다. 가을은 주초에 전화를 해서 겨울에게 부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회사 업무를 핑계로.

월요일에 출근하니 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가을씨. 이번 주 일요일 라운딩 가능해? 한 명이 갑자기 빠져서 누군가 채워야하는데..일전에 가을씨가 한 번 펑크낸 것도 있고 하니 웬만하면 한 번 부탁할게.

가을은 겨울에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일요일 약속을 못지켜 미안하다고 전했다.

회사 일이잖아요. 직장인들 주말에 공 치러 가는 거 업무의 연장이란 거 다 아니까..너무 미안해 마세요. 겨울은 조심해서 운전하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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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식장을 다녀오는 길 내내 겨울은 여름에게 전화를 할까 고민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월요일 가을의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 내내.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여름은 가을의 대용이 아니다. 빈 자리가 생기면 언제든 올 준비가 돼 있는 구직자가 아니다. 자신의 생활이 없다시피한 비서도 아니다. 여름은 충분히 대우받아야 할 사람이다. 경쟁자가 자리를 비워야 겨우 그 자리에 잠시 앉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존재가 아니다..여름은 그 존재의 가치에 십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겨울의 양심을 짓눌렀다. 겨울은 토요일이 다 지나갈 때까지 차마 여름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여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느니 그냥 여름을 그리워하며, 여름에게 미안해하며 하루를 보내리라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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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다희를 그리 보내고 여름은 종종 다희를 떠올렸다.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된 장면. 이후 해질 무렵이면 다희가 무의식적으로 생각났고 바로 뒤이어 정신이 혼미했던 문제의 그 장면이 떠올랐다. 여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주저하지 않고 다가오는 다희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여름은 현기증이 났다. 도발적이며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그 날의 다희는 그 짧은 장면으로 완벽하게 구현했다.

겨울에게 카톡을 보내고 답을 받고..힘든 회사생활 서로 위로하며 파이팅하자고 이모티콘을 보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주중의 모습이었다.

다만 지하철을 타고 퇴근할 무렵 한강 다리를 건널 때마다 보이는 해넘이 모습은 어김없이 그날의 다희를 불러내서 여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곤 했다. 몹쓸 녀석. 진짜 넌 거절하기 너무 매력적인 아이야..왜 하필 나였니. 너한테 훨씬 잘 어울리는 멋진 남자들 놔두고..


여름은..다가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치지도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자책했다. 그로인해 상처받을 다희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군 시절을 지켜줬던 그 연인처럼..다희는 응당 받아야할, 그 가치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또다시 나는 후회할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여름은 어쩌면 겨울과 재회한 후 처음으로, 겨울이 아닌 누군가를 더 생각하는 한 주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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