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두가지 약속
오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네요.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겨울은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여름에게 말했다.
왜 그러세요. 초면에 식사한 사람처럼. 여름은 웃으며 대답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보더니
아직 시간 괜찮으세요? 물었다.
저는 괜찮아요. 커피 한 잔 하시게요? 겨울의 질문에
봐 둔 곳이 있어요. 겨울씨도 잘 아는 곳이에요.
여름이 대답했다.
여름과 겨울은 족발집을 나와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왔다. 좀 전까지 사람들, 차량들로 붐비던 도심에서 순식간에 고즈넉한 주택가로 장소가 바뀌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늑한 곳이네요. 겨울의 말이 울림이 되어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얕은 언덕을 하나 넘자 대사관 저택 같은 단독 주택들이 나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장충동에 이런 곳이 있었군요. 겨울은 혼잣말처럼 말하곤 여름을 따라 가다가 여름이 어느 대저택으로 들어가는 걸 보곤 한 번 놀라고 그 주택의 대문 뒤에 표시된 스벅 마크를 보곤 또 한 번 놀랐다. 이런 곳에 스벅 매장이..
겨울은 여름을 따라 들어가면서도 과거엔 대저택이었을 이 곳 매장의 풍경 곳곳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사이 여름은 부지런히 좌석을 찾고 있었다. 방의 코너에 2인용 테이블이 있었다. 여름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맡았다.
겨울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여름씨 날다람쥐 같던데요.
겨울씨가 품위를 말해서 그나마 경보 수준에서 자제한 거에요. 평소였다면 뛰었을거라구요. 여름은 자리에 만족한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곤 일어나 블라인드를 한 쪽으로 접었다. 아직 남아있는 햇살이 창을 통해 쏟아지고 깨끗하게 정돈된 잔디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냥 자리도 아니고 최고 명당이네요. 일전에 왔을 때는 자리가 없어 고생했는데..행운도 겨울씨를 좋아하나 봅니다.
너무 좋은 곳 알려주셔서 고맙다고, 전직 직원으로서 부끄럽다고, 언제 한 번 친구들을 데리고 와 놀래키고 싶다고 겨울은 얘기했다. 친구들 얘기를 하던 중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겨울은 앞뒤 맥락도 없이 여름에게 대뜸 물었다.
여름씨. 마지막 키스는 언제였어요?
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멍한 표정을 짓자 겨울은 한참을 웃더니
아뇨. 쌩뚱맞은 질문 맞는데..미희가 세 구혼자에게 궁금하니 한 번씩 물어보라고 해서..저한텐 약간 숙제 느낌이라.
아..여름은 미희를 떠올리곤 그 엉뚱한 질문을 이해하고 웃었다.
여름은 잠시 생각하더니 당시가 떠올랐는지 웃으며 말했다. 말하자면 좀 긴데..괜찮겠어요?
밤 새고 내일 출근하죠 뭐. 전 준비됐어요. 겨울은 자세를 고쳐 앉곤 여름의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음. 마지막 키스는..
.
.
.
그해 봄 회사 홍보팀에서 여름 포함 세 명의 대리를 불러놓곤 조직 문화 캠페인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니까..저희 세 명 각자의 지사에 발령난 새내기 직원을 한 달 뒤 신촌 고깃집으로 데려오라는 거죠? 모임 얘긴 하지 말고?
그렇죠. 대리님들도 동기고 그 새내기 분들끼리도 동기신 거죠. 단순히 선배와 저녁 먹는 자리인 줄 알고 나왔다가 자기 동기들 만나 깜짝 놀라는..그런 서프라이즈 자리에요. 신입 직원들의 직장 적응을 돕는 프로그램이랄까..나중에 홍보팀이 그 날 모인 사람들 대상으로 설문도 하고..후기도 사보에 실을 예정입니다. 아..물론 수고비도 따로 책정했습니다. 홍보팀 과장은 봉투를 꺼내 보이면서 웃었다.
아이디어는 참신하고 좋은데 문제는 여름의 지사에 있었다. 다른 두 동기는 성별이 선후배간 같았다. 여자 선배와 여자 후배. 남자 선배와 남자 후배. 그런데 당시 여름의 지사에 새로 발령받은 후배는 여성이라 여름 입장에선 다소 신경이 쓰였다. 잘못하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었다. 괜한 일로 후배를 신경쓰이게 하는 건 아닌지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회사 일의 연장선이라 생각했고 후배에게도 좋은 추억이 될 수 있겠다 싶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쨌든 미션은 완성해서 민폐끼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저..조주임임.
조주임은 커피를 한 잔 타다가 뒤에서 여름이 부르자 깜짝 놀라 인사를 했다. 홍보팀 미션을 받은지 벌써 일주가 지났다. 그간 고민만 하다가 흘려보냈다. 시간이 갈수록 후배가 선약을 잡을 가능성이 커져 여름은 압박감에 우선 지르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아뇨. 인사까지야. 우리 출근하면서 벌써 인사했잖아요. 여름은 주임의 회사 생활 긴장감이 느껴져서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주임님 이제 입사한지 석달쯤 됐죠? 아..그렇죠. 신입 연수 한달 빼면 배치받은 건 두달 정도 됐겠네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여름은 신중하게 연기했다.
주임님이 지사 생활 잘 하고 계시긴 한데 제가..나름 노하우가 있거든요. 좀 알려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저녁에 식사 한 번 같이 할래요?
말하면서도 여름은 이건 누가 봐도 데이트 신청 아니냐며 자책했다. 온갖 구실을 대도 남자 선배가 저녁에 따로 식사하자고 하는 걸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 여름 자신도 모르게 땀이 흘렀다. 거절당하면 어쩌지? 내가 말했다고 소문내지 말라고 하고 진실을 얘기해야 하나? 별 별 생각이 다 들 무렵..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주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언제...? 라고 끝을 흐린 채 물었다.
아..그제서야 날짜를 얘기 안한걸 깨닫고는..
삼주 뒤 금요일 저녁이요. 아직 선약 없죠?
데이트 신청 치곤 아주 이상한 방식이긴 했다. 이번주도, 다음주도 아닌 삼주 뒤 금요일이라니..그 정도면 선약 있는게 더 이상한데 왜 이 사람은 그게 그리 중요한듯이 묻는걸까..상당한 확률로 조주임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까.
조주임은 살짝 웃음을 머금더니 조용히 말했다.
저..다음주도 괜찮은데요.
겨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름의 말을 듣다가 이 대목에서 소리 내 웃었다. 여름도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예상치 못한 조주임의 발언에 여름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 의연하게 대처했다.
가려는 그 식당...예약이 그 때나 되서요.
아..조주임은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이내
인기가 많은 곳인가 보네요..다른 곳 가도 되는데..
겨울은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여름도 다시 생각해봐도 웃긴지 말을 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조주임이란 분. 캐릭터가 벌써 사랑스럽네요. 겨울의 말에
좀 엉뚱하죠? 나중에 듣기론 우리나라 공대 최고학부 출신이라고..
공대요? 공대생이 여름씨 회사에는 왜?
MIT 공대 원서 내고 기다리는 중에 안되면 우리나라에서 취업하고 살 생각에 입사했다고. 국내에 남으면 다른 인생을 살고 싶었대요. 그래서..
네..마저 얘기해주세요. 끝이 너무 궁금해요.
그렇게 어찌어찌 3주가 지났어요. 주임님 모시고 신촌으로 갔죠...
대리님. 퇴근하고 어딜 그렇게 다니세요? 조주임은 지하철에 나란히 앉은 여름에게 그간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며 말을 건넸다.
아..그냥요. 커피 한 잔 하러.
커피 마시려고 매일 그렇게 퇴근하자마자 뛰어가요? 전 어디 학원이라도 다니시는줄 알았어요. 조주임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말해놓고 나니 웃기긴 한데..거짓말은 아니에요.
여름의 말에 조주임은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요. 대리님이 거짓말할 사람 아니란거. 근데 저도 그런 소리 듣지만 대리님도 간혹 사차원 느낌이 나네요.
여름이 웃자 조주임은 이내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라고 말을 이었다.
전혀요. 제 고등학교 때 별명이 사차원이었어요. 절친들은 아직도 간혹 그리 불러요. 남들과 다르다는 거..나쁜 거 아니잖아요. 전 외려 좋아요. 저만의 인생을 잘 살고 있다는 걸 인증받은 느낌이라.
조주임은 웃었다.
하나 더 물어봐도 되요? 조주임의 계속된 호기심에 여름은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냈다.
만나는 사람 있으세요? 조주임은 고개를 돌려 여름을 슬쩍 보곤 물었다.
음..아뇨. 아쉽게도..
아쉽다는 건..조주임의 말에 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
누굴 만나고는 싶어요.
아..네..조주임은 짧게 반응했다. 그러더니 이내 말하길. 저도 물어봐 주실래요?
엉뚱한 조주임의 요청에 여름은 당황하면서도 시키는대로 물었다.
만나는..
아뇨. 없어요. 만나는 사람. 여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주임은 대답했다. 그리고 사귀고는 싶어요. 아쉽게도.
여름이 여기까지 말하고 겨울을 보니 겨울은 테이블에 엎드려 거의 울고 있었다. 한참 후 고개를 들고 입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겨울은 말했다. 웃음을 겨우 참고는.
정말 러블리한 캐릭터에요. 조주임님. 언젠가 기회되면 만나보고 싶어요. 평생 언니동생하며 살고 싶은 사람이네요.
네. 맞아요. 순수하고 명랑 만화 같은..
여름은 계속해서 회상했다.
둘은 동병상련이라며 서로의 애정 전선을 위해 파이팅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예정된 식당까지 둘은 내내 이야기하며 걸었다. 한 번 터진 조주임의 입담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늘 조용조용하던 그 사람 맞나 싶을 정도였다. 식당에 도착할 무럽에는 오누이처럼 친한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내내 얘기하며 걷다가 길을 두어번 놓치는 바람에 여름이네가 제일 늦게 도착했다. 식당 문을 열자 이미 와 있는 동기들과 후배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해줬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조주임은 얼굴이 굳어 멍한 표정이었다. 자리에 앉아 자초지종을 들은 연후에나 조주임은 웃었다. 선배들에게 차례로 인사하고 동기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모는 게 홍보팀의 바람대로 흘러갔다. 여섯 명의 청춘은 조금의 알코올이 휘발유가 되어 쉽게 불타올랐다. 멋진 기획이었다느니, 설계자가 천재 아니냐느니 홍보팀에 대한 찬사가 난무했다. 각자의 생활과 회사에 대한 애정,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뒤섞여 대단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너무 시끄러워 대화가 잘 안될 정도였다. 옆 테이블에서 민원이 들어와 톤을 좀 낮춰달라는 식당측의 요청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톤은 다시 높아졌고 포기한 옆 좌석 손님들은 자리를 떠났다.
그날의 모임은 식당 주인에겐 상당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대단한 민폐 손님들이었다. 조주임은 맥주를 마시다가 울기까지 했다. 걱정하는 동기들에게 살면서 한번도 이런 모임을 가져본 적 없었다고. 감동했다고. 그래서 눈물이 난다고 말해 좌중을 웃게 했다.
이 대목에서 여름은 목이 말라 식어버린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겨울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무슨 생각해요? 여름의 질문에
부러워요. 그런 조직 문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어요. 설계한 사람도, 수행한 사람도 모두가 위너네요. 외국계 회사라 그런지..아마 앞으로도 그런 경험 해 볼일은 없겠죠. 얘기만 들어도 설레요. 그 자리에 끼고 싶어요. 진심으로.
겨울의 표정에서 진심으로 부러운 기색이 느껴져 안타까울 정도였다. 여름은 거의 다 왔다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후 다들 일상으로 돌아갔고 벚꽃 날리는 시즌이 됐어요. 그 날 야근을 하고 있는데 조주임이 다가와 말하더군요.
대리님. 오늘은 커피 마시러 안가세요?
네..일이 좀 밀렸어요. 커피만 마시느라 일을 못해서. 두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오늘은 절 위해 커피 한 잔 드셔주심 안되나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여름과 조주임은 회사 옆 건물에 있는 카페에 마주보고 앉았다.
돌려말하지 않을게요. 성격상 그리 할 수가 없어서..
조주임은 바로 고백을 이어갔다.
저..이곳 지사에 처음 왔을 때부터 대리님 좋아했었어요..
여름은 놀랬고 조주임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겨울은 조금은 짐작했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선한 사람 같았어요. 사람 좋아하는데 이유 있나요..대리님이 제 마음 알아주길 기다릴 여유가 없었어요. 전 이미 미국에 원서를 보낸 상태였고. 그 쪽에서 연락이 온다면 남느냐 떠나느냐 결정을 해야 했기에 선배와 그 전에 관계 정립이 됐음 했어요..
하지만 대리님은 무슨 일인지 퇴근 후 항상 사라졌어요. 어딜 갔는지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12시의 신데렐라도 아니고..전 속이 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그러던 차에 대리님이 제게 데이트 비슷한 걸 신청하셔서..너무 깜짝 놀랐고 기뻤어요. 3주를 얼마나 설레면서 기다렸는지 몰라요...
그런데 신촌 그 장소에 나가 그것이 회사의 몰래카메라 같은 것임을 알았을 때..웃고 있었지만 속에선 눈물이 흘렀어요. 선배의 마음이 내게 없다는 걸 확인한 밤이니까요.
조주임의 말을 들으며 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 날 조주임이 눈물을 흘린 것은 감동해서도, 재미있어서도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조주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대리님. 저 MIT에서 합격 통지 받았어요. 다음 주에 떠나요. 오늘 본부장님께 말씀드렸고..인사부에 사직서도 제출했어요.
갑작스런 이별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의 여름에게 조주임은 말했다.
대리님. 두가지 부탁이 있는데 꼭 들어주셨으면 해요.
여름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다음주에 하루 휴가내고 공항에서 저 출국하는 거 봐주심 좋겠어요.
여름은 언제냐고 묻고는 핸드폰에 일정을 메모했다.
나머지 하나는요? 여름의 질문에
그건..그 날 말씀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조주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여름은 당황하여 그러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 약속은 꼭 지키겠다며.
여름은 이야기를 멈추고 겨울을 바라보았다. 배를 잡고 웃었던 겨울의 눈은 어느새 충혈된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겨울은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게 끝입니다. 여름이 대답했고 겨울은 무슨 말이냐며 여름을 응시했다.
나머지 하나의 부탁. 겨울씨 질문에 대한 답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