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잘 지내?
수정은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경희, 미희요? 네 잘 지내요. 언니. 경희 결혼한 건 아시죠? 겨울은 경희의 결혼식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지. 통화도 했었어. 내가 그 날 가족 행사가 있었나 해서 못갔지. 갔으면 끝나고 미희랑 해서 봤을텐데.
맞아요. 얘들도 언니 못본지 오래됐다고..다 같이 한 번 봤음 좋겠다고..
다들 미혼일 때나 자주 봤지. 결혼하면 쉽지 않아. 가족 행사도 많고..애 생기면 말할 필요도 없고.
수정과 겨울은 나란히 오후 반차를 내고 평온한 금요일 오후를 즐겼다.
금요일은 그냥 기분 좋은 날인데 너 만나 커피 한 잔 하니 더 이상 좋을게 없네. 수정은 진심이 느껴질 정도로 밝게 웃었다.
저두요. 언니. 오늘을 위해 지난 4일을 갈아넣었어요. 둘은 별 말 아닌 말에도 연신 웃음이 터졌다.
근데 여긴 어떻게 안거야? 인테리어가 특이하네..수정의 말에 겨울은 그냥 검색해서 왔다고 답했다.
카페 한 켠 벽면에 빔으로 영상을 틀어주고 있었다. 뉴스 채널이라 수정은 음악 방송으로 바꾸고 싶었지만 대화에 지장은 없어 직원을 찾진 않았다.
겨울아 맨날 네가 공항까지 와서 미안해. 다음엔 내가 터미널쪽으로 갈게. 수정은 겨울이 매번 자신을 위해 공항 대합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미안했다.
아니에요. 언니. 저 공항 가는 거 좋아해요. 정말이요. 여행가는 기분 들거든요. 제가 근처 살면 주말마다 그냥 마실 삼아 올 것 같아요.
겨울의 말에 수정은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뭔가 생각난듯이 박수를 쳤다.
맞다. 그러고보니 네 연인 중 한 명이 이 근처 산다 그랬지?
언니. 연인 중 한 명이라뇨..제가 무슨 카사노바도 아니고..겨울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긴. 사귀는 것은 아니니까 연인이라 하긴 뭐한가..그럼 세 사람..뭐라 불러야 하는거야? 수정의 물음에 겨울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는 사람? 지인? 겨울의 자신 없는 대답에 수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너 어디 관공서에 인적 사항 적고 있니? 라며 겨울을 놀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세 사람 네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소중한 인연들이야.
수정의 말에 겨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고..지금으로선 실감이 안나요. 제가 누구를 선택하면, 아니 어떤 힘에 이끌려 누군가와 제가 결국 부부라는 연을 맺게 되면 나머지 두 사람과는 더 이상 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요..갑자기 어느 날을 계기로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된다는게..
그러게..패자는 링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말야. 수정이 공감한다는 듯 말했다. 커피 한 모금을 더 넘기며 수정은 이어 말했다.
남편이 운전이 서툴러 내가 항상 보조석에서 같이 길을 보거든. 고속도로 밤길 운전하다 보면..특히 비오는 날..가로등도 없고..진짜 무섭잖아.
맞아요. 언니. 너무 무섭죠. 겨울이 맞장구를 쳤다.
그런 길 운전하다 보면 우리랑 같이 가는 차 몇 대가 그리 반가울 수가 없어. 서로가 서로에게 가로등 역할을 하면서..알게 모르게 그 짧은 순간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더라구.
겨울은 몇 번 경험했던 그 장면을 떠올렸는지 두 손을 포개고는 수정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차들의 목적지가 우리랑 같을 수는 없잖아. 어느 순간 한대씩 갈림길에서 사라지는거지. 아쉽지만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고 그러다보면 또 새로운 차가 합류해서 한동안 서로를 의지하고..
아..겨울은 수정이 말하고픈 바를 직감하곤 짧은 외마디 탄성을 밷었다.
세 사람과 겨울 너의 인연도 그런 걸거야. 인생의 어느 순간 서로를 의지하게 되는 각별한 인연들인거지. IC에서 두 대의 차는 떠나겠지. 슬프고 먹먹한 감정이 들겠지만..너무 비통해할 필욘 없어. 그들도..그들의 목적지로 잘 가고 있는거니까.
그렇게 비유하니 공감이 되고..조금은 슬픔을 덜어낼 수 있을 것도 같아요. 그러더니 이내..그래도 역시 슬프겠죠? 겨울의 다소 본능적인, 순수한 질문에 수정은 웃었다. 질문을 한 겨울 자신도 따라 웃었다.
님의 침묵이었나.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겨울은 고등 시절 교실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딱 그 문구가 맞네요. 만해 님의 시를 남녀간의 사랑으로 해석하는 건 너무 좁은 시야라고 배운 것 같지만..그만큼 절절하게 다가오는 시구도 없을 거에요.
맞아. 시는 가슴으로 우선 느껴야지..가슴이 뛰어야 나라 사랑도 하고 독립 운동도 하는거 아닐까..수정은 겨울의 아버님도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겨울에게 물었다.
아버님.. 살아 계셨으면 어떤 시를 쓰셨을까?
겨울은 모르겠다며 슬쩍 웃고는..
아마 사무실이나 도서관에 계시진 않았을 것 같아요. 두 권 시집 제목이 지명이었던 거 보면..전국을 돌아다니며 내 나라 사랑을 읊고 계시지 않았을까..
일리가 있어. 사람들이..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그런 사람들이 있는 거 같아. 운명 같기도 하고..누군가는 팔자라고도 하겠지. 시인은..천상 시인인 건가..그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 있다고 느끼질 못하나봐.
네. 아빠는 그리 살았을테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겉으론 못마땅하게 대했겠지만..아마도, 아마도 속으론 뿌듯해하지 않으셨을까..
다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일단은 살아야지. 어떻게든. 수정이 말하는데 겨울의 전화가 울렸다.
아..봄이구나. 왜? 오늘? 아..미안해. 선약 있어서. 그래. 나중에..알았어.
전화를 끊자 수정이 말했다.
지인 중 한 명? 겨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현재 1순위인 가을씨..그 분은 왜 금요일에 안만나? 데이트하기에 제일 좋은 시간이잖아?
아..가을씨는 평일엔 거의 일해요. 주중 열심히 일해야 주말을 자기 시간으로 갖는데 부담이 없나 봐요.
그렇구나. 수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결혼하면 우리 겨울이 심심해서 어쩌냐..
아..그건..아직 알 수 없는거고..그리고 저도 일하면 되요. 할 일은 언제나 있으니까요. 겨울의 자포자기 농담에 수정은 한 술 더 떴다.
집은 일찍 사겠네..부부가 일만 하면..
두 사람이 웃는 사이 다시 겨울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여름씨. 네..네..별 일 없어요. 아뇨. 일전에 얘기했던 수정 언니..네? 맞아요. 캐나다 언니. (웃음) 네..반차 내고 공항에서..아..여름씨도 집 근처라구요? 아뇨..아직..네...다음에 뵈요. 네..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통화하는 겨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수정은 묘한 웃음을 짓더니 겨울에게 말했다.
집이 근처라는 지인?
네..오늘 전화기 불 나네요. 금요일은 원래 다들 각자 일정이 있는데..
겨울이 너 괜찮으면 그 지인 지금 잠깐 볼까? 들으니 이 근처인거 같은데..수정의 제안에 겨울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괜찮겠어요? 언니..나 생각해서 일부러 그럴 필요 없어요..난 언니 만나려고 시간 낸 거에요.
아냐. 그 사람 예전부터 보고 싶었어. 겨울이 너 배려해서 그런거 아니니 걱정 말고. 너야말로 부담갖는 거 아냐?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할까봐? 수정의 농담섞인 질문에 겨울은 당황하여 두 손을 내저었다.
언니. 그럼 나가면서 전화할게요. 일단 자리 옮겨요.
두 사람은 자리를 일어섰다. 빔이 깜빡이면서 뉴스가 이어졌다. 교통사고 소식이었다. 겨울은 흘깃 뉴스를 보곤 카페의 문을 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량 한 대가 천안 IC에서 빠져나가더니 갑자기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가드레일을 들이박은 이후에나 차는 멈췄다. 화면 영상에는 경찰과 구급차의 사이렌이 가득했다. 운전자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인터체인지에서의 사고율은 직선 거리에 비해 월등히 높다. 곡선 도로로 접어들며 속도를 줄이는 중에 발생하는 예측 불허의 상황이 잦기 때문이다. 그 전 함께 직선 도로를 달리던 차들은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IC로 접어든 그 차의 안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