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과 수정이 자리잡은 지 10여분이 지나 여름이 도착했다.
여름은 수정을 보곤 90도 가깝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수정은 그런 여름을 보곤 웃었다.
허리 끊어지겠어요. 반가워요. 겨울이 어학 연수할 때 룸메였어요. 김수정입니다. 수정은 일어서서 여름에게 손을 건넸다. 여름은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치고 수정과 악수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여름이라고 합니다. 겨울씨 통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여름은 원탁 테이블 남은 좌석에 앉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겨울은 그런 여름의 모습이 낯설고 흥미로웠다. 친구들과는 오랜 지인들처럼 바로 경계를 허물었던 그가 수정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편하게 있으세요. 면접 자리 아니에요. 수정도 그런 느낌이었는지 여름에게 긴장 풀라고 농담을 했다.
네..감사합니다. 그리곤 아무 말도 없이 있는 여름을 보곤 겨울은 끝내 웃음이 나왔다.
언니. 아무래도 언니가 어른이다 보니 여름씨가 많이 긴장되나 봐요. 괜찮으면 술 한 잔 씩 해야겠는데요? 겨울이 여름보다 많이 말하는건 오랜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난 맥주 좋아. 여름씨는요? 수정이 여름을 보고 물었다.
저도 좋습니다. 맥주. 여름의 대답은 여전히 단답형이었다.
근처라더니 진짜 빨리 왔네요. 집에 안가고 뭐하고 있었어요? 주문을 마친 겨울이 여름을 보며 물었다.
아..음..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근처 노래방에서 노래 좀 부르다가..갑자기 겨울씨 목소리 듣고 싶어서..
여름의 대답에 수정과 겨울은 웃음을 터트렸다.
항상 예측 밖이고 엉뚱하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막상 뵈니 겨울이 말대로네요. 수정이 웃으며 말했다.
네..잘하는 건 아닌데..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서..퇴근 후 특별한 약속 없으면 두어곡씩 부르고 들어갑니다.
그렇군요. 겨울이 노래 진짜 잘하는데..혹시 들어봤어요? 노래방 같이 간 적 있나요? 수정은 말하며 겨울과 여름을 번갈아보았다.
겨울과 여름은 서로 바라보곤 누가 말할지 양보하다가 여름이 입을 떼었다.
노래방은 안가봤지만..노래를 들어본 적 있는데..말씀대로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환상적이라는 형용사에 겨울은 얼굴이 붉어졌고 수정은 소리 내 웃었다.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부터 현재의 상태까지..많은 걸 알 수 있다던데..여름씨가 겨울이에게 빠지긴 빠진 것 같네요. 그리고..
수정은 맥주를 한 잔 마시려 잔을 들자 여름이 득달같이 잔을 들어 수정과 잔을 마주쳤다. 겨울도 뒤늦게 건배 대열에 합류했다.
왜 겨울이가 여름씨한테 헤어나오지 못하는지도 알겠어요. 보면 볼수록 미남이시네요. 첫 눈에는 모르겠더니..그냥 전형적인 잘생김이 아니라..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붙들어요. 연민도 느껴지고 그냥 곁에 있고 싶어지는..아마 여름씨가 살아온 이력이 얼굴에 표현돼서 그런 거겠죠. 어르신들이 관상 관상 하시는데..여름씨는 복 받은 상이에요. 인기 많을 것 같아요. 특히 여자들한테..
수정이 농반진반으로 얘기하자 겨울의 표정도 왔다갔다했다. 수정이 여름을 좋게 본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좋은 기분이었다가 여름이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대목에선 묘한 조바심도 일었다.
여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꾸벅 했다.
더 좋은 건 그 성실한 예의바름이에요. 수정이 웃으며 덧붙였다. 다음에 또 볼 일 있음 좋겠어요. 그 때는 조금 편하게 대해도 되요. 여름씨만 괜찮으면 누나? 누님? 그렇게 불러도 되구요.
여름은 거듭 감사함을 표했다.
언니. 좀 이상한 질문인데..제가 잘못본 게 아님 언니는 여름씨한테 상당히 후한 점수를 준 거 같아요. 맞나요?
수정은 허공을 쳐다보며 즉답을 피했다. 수정의 묘한 표정에 셋은 모두 웃었다. 방금 말했잖아. 더 말이 필요해? 수정은 겨울에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서..참 이상해서요. 미희야 그렇다쳐도 경희도, 그 까탈스런 얘도 만난지 한시간도 안돼서 여름씨 인정하더라구요. 근데 언니도 그런거 보면 여름씨 안에 사람을 이끄는 뭔가가 있구나..그게 뭘까..궁금해서요.
여름은 과찬이라며 어쩔 줄 몰라했다. 목이 타는지 손을 가만히 두질 못해선지 연신 맥주를 마셨다.
내가 회사 면접관으로 자주 신입직윈 면접을 봤거든. 수정이 말하자 겨울은 퍼뜩 생각났다는 듯이
아..언니 회사 인사부였죠. 어쩐지..
수정은 웃으며 옛날 얘기라며 말을 이었다.
신입 직원들에게 필요한 게 뭔거 같아? 재기 넘치는 답변,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 숙련된 직원에게서나 나올법한 여유로운 마음가짐..그런걸까? 아니. 제일 보고 싶은 건 청춘다움이야. 모르는 건 모르는거고. 열심히 해보겠다는 마음. 패기. 절실함. 그런게 필요한거야.
그거야 다들 같은 마음 아닐까요? 겨울이 물었다.
말이야 그렇지.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 않는 신입직원이 어디 있겠어. 말이 중요한 게 아니야. 태도거든. 짧은 시간이지만 그 사람에게서 풍기는 삶을 대하는 태도. 눈빛, 자세, 인상 그 모든 것이 신호를 보낸다고.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겨울과 여름이 공감하면서도 완전히 이해했다는 표정은 아닌지라 수정은 부연했다.
가령 면접관들이 앞에 있는데 상체가 흐트러진다든지, 쩍벌 자세로 대답한다든지, 대답 중에 허공을 보며 한숨을 쉰다든지 그런 것들. 절실함이 있다면 그런 게 무의식적으로 밖으로 나올 수가 없는거지. 아마 당사자들은 모를거야.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걸.
그제야 겨울과 여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 얘기 장황하게 하려고 오늘 여름씨 보자고 한 거 아니니 여기까지 할게요. 여름씨 얘기 좀 들려줘봐요.
수정은 여름에게 궁금한 것들에 대해 물었고 여름은 성실하게, 과장하지 않고 답변했다. 수정은 매번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였고 겨울은 때론 예상치 못한 여름의 말에 여름의 얼굴을 몆 번씩 쳐다보곤 했다.
수정은 핸드폰 시간을 흘깃 보더니 여름의 눈을 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여름씨..겨울이의 매력은 뭘까요?
여름은 오늘 가장 환한 웃음을 웃더니 말했다.
다큐에서 봤는데..백제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 부여박물관에 있는 금동대향로라고 하네요. 전 아직 실물을 보진 못했지만..
겨울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여름을 돌아봤다. 지난 명절 보성을 거쳐 부여를 다녀왔던 걸 여름에게 말한 기억이 없다. 잊고 있던 대향로의 아름다움이 눈앞에서 연기처럼 퍼져나가는 듯했다. 겨울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백제의 아름다움을 그렇게 표현하더라구요. 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전 겨울씨의 매력이 그 여덟자의 한자에 다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정은 브라보를 외쳤다. 겨울은 그저 곁눈질로 여름을 몇 번 쳐다보았다. 여름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호프집을 나와 수정과 여름은 겨울을 기다렸다. 화장실을 잠시 다녀온다고.
수정은 여름에게 말했다.
여름씨. 겨울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줘요. 겉에서 보기엔 겨울이가 누군가를 선택해서 그 삶을 구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그 반대일 거에요. 어떤 일이 있어도.. 여름씨가 겨울이를 포기하지 않아줬음 해요. 겨울이야말로 구원받아야 하는 아이일지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