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는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보성으로 내려가는 이모는 KTX를 타러 용산역으로 가야했다. 겨울은 두어시간 후 미희와 약속이 있어 시간 여유가 있었고, 이모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으며 무엇보다도 엄마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겨울은 이모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모에게도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을. 정작 엄마에겐 한번도 안겨본 일이 없다.
그런 겨울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모는 걸으며 말했다.
겨울아. 너희 엄마가 말 안했겠지만..너희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나도 이 세상에 없으면 너희는 끝내 모를수도 있으니..너희 엄마가 화를 내더라도..
겨울은 순간 이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란 걸 알 수 있었다. 직감만으로도.
너희 아빠가 행방 불명 됐을 때 너희 엄만 아직 젊었지. 30대 후반이었나..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너희 언니는 흐릿하게나마 기억할지도 모르겠구나. 당시 엄마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식당 일부터 해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그걸로는 너희 두 명 뒷바라지가 어렵다고 느꼈는지 창업을 알아보기 시작했지. 처음 한 게 식당이었는데 장사가 꽤 잘됐어. 물론 이런 얘긴 다 너희 엄마한테 들은거야. 나도 당시에는 엄마를 몰랐으니까.
이모는 걸음이 힘들었는지 잠시 앉아가자며 벤치에 몸을 기댔다. 겨울도 이모의 옆에 앉았다. 명절에 봤을 때보다 이모의 건강은 더 안좋아진 듯 했다.
식당이 잘 돼서 엄마는 다른 식당 몇 개를 더 인수하려 했던 모양이야. 그 때 어떤 남자를 알게 됐지.
남자라는 말에서 겨울은 순간 숨이 막히는 충격을 받았다. 남자라니. 엄마에게 남자가 있었다고?
그 남자는 젊은 너희 엄마에게 호감을 가졌었어. 부동산 등 자산 관리를 해주는 회사의 직원이었는데 엄마가 다른 식당을 알아보러 다니면서 알게 됐나봐. 아무래도 점포 인수할 때 계약이니 대출이니 해서 컨설팅이 필요했겠지. 너희 엄마도 그쪽에는 문외한이었을테니.
그렇게 인수할 점포를 찾아 돌아다니다보니 붙어있는 시간이 많아지고..정이 들게 마련이잖아. 남자가 애 둘 딸린 여자에게 뭘 바랬겠냐만..그 남자가 가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구나. 중요한 건 아니었지. 어차피..
겨울은 여전히 평소보다 심한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이모의 말에 귀기울였다.
당시 인수 자금을 모으는 중에..나도 그 때 엄마를 알게 됐지. 나와 남편은 여유 자금을 투자할 곳을 찾고 있었고 마침 수완 좋은 아낙이 요식업을 확장한다는 얘길 듣고 관심을 가진 때였어. 너희 엄마와 붙어다니는 남자를 그 때 보게 됐었지. 한 눈에도 그치가 너희 엄말 원한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겨울은 당시를 어떻게든 기억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건 텅 빈 집과 늘 바쁘던 엄마의 모습 뿐이었다.
그러다가 사단이 난 거야. 자신의 구애에도 엄마가 응하지 않자 그 사내는 어렵게 끌어모았던 투자금을 들고 도주해버렸어.
겨울은 다시 한번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도주라니..그 큰 돈을 들고..
엄마는 하루 아침에 빈털털이가 됐단다. 잘되던 식당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투자자들은 돈을 갚으라고 아우성이었지. 자식에게 이런 얘기하는게 맞는 지는 모르겠다만..너희 엄마 머리채 잡혀서 길가에 나동그라지고..경찰서에도 불려가 조서 쓰고..사기로 고소당하고..그치랑 한 패였다고 일부는 생각한 모양이야.
사내가 있었다고 할 때의 배신감과 분노가 어느새 연민과 서글픔으로 변해 있었다. 겨울은 머리채가 잡힌 채 거리에 나뒹구는 젊은 날의 한 여자를 떠올리곤 울었다.
대부분의 투자자가 떠났어. 투자한 돈을 어떻게든 회수해서는. 난 그 때 네 엄마 곁에 남았어. 돈을 다 잃을까봐 겁이 났지만 네 엄마의 처절한 호소가 내 심장을 움직이더구나...내 평생 제일 잘 한 선택 아니었을까..오늘 이렇게 너와 네 엄마..셋이 함께 식사하니 그런 확신이 드는구나.
이모는 어떤 감정이 북받쳤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셨다. 겨울도 고개를 숙이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엄마가 어떻게 그 상황을 버텼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 딸들을 길거리 아이들로 만들지 않으려는 모성애와 집념이 그걸 가능하게 하지 않았을까..그리고 진아 본인은 극구 아니라고 하겠지만..남편에 대한 사랑이..지옥 같은 현실을 버티는 힘이었을지도..생사를 모르는 남편이 어쩌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게 살아가는 힘이 됐을거야 틀림없이.
엄마는 아빠를 사랑했군요..겨울은 허공을 보며 넋두리처럼 말했다.
그래. 너희 엄만 사랑이 부질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이모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너희 엄마를 배신한 그치도 처음엔 엄마를 사랑했던 것 같아. 도주후 지방을 전전하다 결국 잡혔는데..돈은 이미 탕진했고..사기죄로 조사를 받으면서 그랬다는구나. 애들이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고. 자신을 받아줬으면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고..
이모는 당시를 회상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역사란게 만약이란 게 없지만..만약 너희 엄마가 그치를 받아들였다면 너희 옆엔 나 대신 그 남자가 있을테지. 너희가 더 행복할지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겨울은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를..받아들일 수 없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다가도..현재가 행복하냐는 내면의 질문에는 선뜻 그렇다는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엄마의 선택은 양날의 검이 되어 돌아왔다. 한편으론 자신과 남편, 두 딸들로 이루어진 가정을 지켜냈다. 비록 배우자의 자리는 추억으로 채워야했지만.
허나 한편으론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보호 본능이 자신과, 자신의 피붙이를 향한 질퍽거리는 늪이 되었다. 그 늪에 사랑은 없었다. 오직 경쟁과 힘의 논리만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