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미희를 만나기로 한 카페에 먼저 도착해서 이모와의 대화에 대해 생각했다. 엄마는 그 남자를 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단순한 사업 파트너로만 생각했을까. 이모가 알아볼 정도로 그 남자가 엄마를 원했다면 엄마도 그걸 모를 리가 없었을텐데..결국 결정적으로 아빠에 대한 미련이었던걸까.
아빠는 일본에 가서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걸까. 사채업자를 피해 도일했을 거라 짐작은 했다. 하지만 한번도, 단 한번도 가족을 찾지 않았다는 건 겨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수수께끼 같았지만 자신으로선 풀 길이 없어 보였다. 엄마를 이해하는 건, 엄마가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건, 이 자욱한 과거의 안개를 걷어내는 것 뿐임을 겨울은 직감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해결책 없는 의문만이 머릿속을 멤돌 무렵.. 누군가의 인기척에 겨울은 깜짝 놀랐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 니가 놀라는 바람에 내가 더 놀랐다 얘.
미희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엄마 때문에. 겨울의 짧은 대답에 미희는 짐작이 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말씀드린거야? 캠핑?
미희의 물음에 겨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무룩한거 보니..허락 못 받은거야?
아니..허락은 받았어. 쉽지는 않았지만..
겨울의 씁쓸한 웃음에 미희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취소할까? 너무 밀어부치는 것 같아서..너한테 미안해. 엄마와의 관계 이즘 나쁘지 않았잖아..괜히 이 일로..
아냐. 괜찮아. 미희의 말을 자르며 겨울이 말했다. 어차피 피할 수만은 없어. 그리고..나도 진짜 가고 싶어. 경희가 못가는게 너무 아쉬울 뿐이야. 경희 진짜 못간대? 내가 전화해볼까?
내가 몇 번이나 했어. 네가 해도 마찬가질거야. 애가 생긴 건가..뭐 그런 느낌이야.
미희의 말에 겨울은 낙담한 표정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소 처진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겨울이 밝은 음색으로 물었다.
근데 어디 가려고? 예약은 했어?
응. 춘천에 글램핑 장 좋은 곳이 있거든. 얘기한대로 4월 첫 주로 예약해놨어. 금요일 하루 휴가 알아봤지?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 내야한다.
미희의 엄포에 겨울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며칠 전부터 팀장님께 말씀드려놨어.
겨울의 말에 안도하며 미희는 말을 이었다. 거기 주말에는 경쟁 치열해. 나름 광클해서 잡은 거라고.
우리 그럼 불멍도 하는거지? 내가 뭐 준비할 건 없어? 고기라든가 김치 같은..
겨울의 말에 미희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다 사면 되. 이즘 하나로마트 같은 곳에서 다 사 가잖아. 넌 몸만..아 개인 세면도구나 갈아입을 옷..그런 것만 챙겨.
겨울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일은 가을씨 만나? 겨울은 캠핑 얘기를 더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미희는 화제를 돌렸다.
내일? 응..내일은 가을씨가 이색 데이트 코스를 잡았다고..
이색 데이트? 미희는 놀라움을 담아 물었다.
응. 화실을 가자고.
화실? 미희는 자신이 잘 못 들은 건 아닌지 되물었다.
응. 화실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 거래. 갠버스에 물감으로. 고등학교 이후 물감 써본적이 없는데. 겨울이 웃으며 대답했다.
드로잉 카페인가 보다. 확실히 이색적이긴 하네. 미희의 반응에
그렇지? 이즘 가을씨가 상당히 노력한다니까. 듣기론 그렇게 그린 그림으로 심리 분석이나 상대방과의 궁합? 뭐 이런 것도 봐준다고..
겨울의 웃음에 미희는 따라 웃으며 말했다.
친구야. 즐겨. 엄마 때문에 힘들기도 하겠지만 지금 너무 좋은 때 아니니. 괜찮은 남자가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네 주변에 있고. 모두가 네 마음 한 켠에 들어가려고 그리 애쓰는게..감사한 일이잖아.
겨울은 침묵으로 수긍했다. 미희는 말을 이었다.
가을씨..너무 안정적이고 기대고 싶은 사람인데 그리 노력까지 하면..냉정한 결혼 시장에서도 난공불락의 위치일테고..봄이 이 인간은..그 잘난 아이가 네 앞에선 한없이 어린 양이 되니..같은 사람 맞나 싶을 정도고..
둘은 봄이 얘길 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그리고 여름씨는..미희는 여름을 떠올리며 어쩐 일인지 살짝 콧등이 시려옴을 느꼈다.
여름씨는..바보잖아. 너만 생각하는.
미희의 말에 겨울은 내심 놀랐다. 여름을 생각하는 미희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졌기에. 혹시 미희가?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럴리가..그렇게 묻어버리려는데 미희의 관심은 계속됐다.
여름씨는 안만나?
아..여름씨. 갑자기 일본에 갈 일이 있다고..
일본? 미희는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응. 회사 일로. 일본 어느 지역과 관광 교류를 논의중이라고..나도 잘 몰라. 여름씨도..아직 구체적인 단계는 아니고 사전 답사 차원이라고 하더라구.
그렇구나. 미희는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그리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를 비웠다.
겨울은 미희가 떠난 자리를 한동안 응시했다. 한 달 전이었나. 미희는 겨울과 통화중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즘 누군가에게 관심이 간다고. 누구냐는 겨울의 집요한 질문에도 미희는 그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었다. 마음이 정해지면 누구보다도 먼저 알려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