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씨. 가을 남자가 봄 남자도 되면 반칙 아닌가요? 겨울은 가을의 산뜻한 옷차림을 보곤 놀라며 말했다.
봄이잖아요. 말 그대로.
가을은 애써 덤덤한 척 말했지만 평소 입던 스타일과 달라 본인도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혜선은 가을의 다소 무거운 컬러를 걷어버리고 밝은 셔츠와 가벼운 가디건으로 코디를 해주었다. 가을이 이런 일까지 부탁한 것은 아니었다. 혜선은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라며 가을에게 다가갔고 가을도 그런 혜선이 의식이 되기 시작했다.
겨울에게 터놓고 얘기할 타이밍을 놓친 듯해 가을은 애가 탔다. 지금 와서 혜선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계속 안고 가자니 혜선의 마음 씀이 부담이 될 것이 뻔했다. 가을은 진퇴양난의 무거운 봄을 맞았다. 가벼운 옷차림과는 달리.
도대체 그런 코디는 누가 해주는 거에요? 겨울은 가을의 옷 매무새를 다시 한 번 보곤 물었다.
그냥 인터넷이죠 뭐. 가을은 얼버무렸다. 빨리 다른 얘기로 넘어가길 바라며. 다행히 겨울은 옷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 역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 가을에게 웃으며 방향을 물었을 뿐.
말씀하신 드로잉 카페는 어딘가요? 저 오랫만에 손에 물감 묻힐 각오하고 왔어요. 겨울은 웃으며 말했다.
네. 여기서 한 100미터 정도 걸으면 되요. 두 블럭 정도 앞에 있어요. 가을은 인터넷으로 위치를 확인하며 길을 안내했다.
그나저나 제가 제안한 코스지만 그림에 안목 있는 겨울씨 데려가려니 민망하기 짝이 없네요. 전 진짜 그림에 대해선 전혀 몰라서. 가을은 평소 전시회도 다니고 미술 관련 책도 읽는 겨울을 의식하곤 말했다.
아니에요. 전혀요. 누가 들음 미술관 큐레이터나 도슨트 정도 하는 줄 알겠어요. 그냥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미희 따라 미술관 몇 번 가고 어깨너머 배운게 다에요. 그런 얘기 말아요. 가을씨.
가을은 혜선의 말을 따라 드로잉 카페를 예약하긴 했지만 자신에게 낯설고 자신감 없는 곳으로 겨울을 데려가는 오늘의 일정이 편하진 않았다. 겨울이 자신의 서툰 그림 실력을 속으로 비웃는 것은 아닐지 내심 걱정이 됐다. 겨울이 그런 성품의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음에도.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리드하지 못하는 분야에서 자신에 대한 겨울의 존경의 정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가을에게 리더란 존경의 다른 이름이었다.
카페는 가을의 예상보다는 규모가 있었다. 군데군데 본인들같은 커플도 보였고 간혹 홀로 온 이도 보였다. 원장이 두 사람을 맞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보조 선생님 두어분이 수강생들의 드로잉을 봐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업종 특성 때문인지 남성은 가을을 포함해 수강생 서너명이 전부였다.
원장은 두 사람에게 물감 범벅인 앞치마와 팔토시를 가져다주며 오늘의 수업 목적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두 분 처음이신거죠? 자유롭게 원하는 그림을 그리시면 되요. 회화로 치면 프리토킹 같은 거에요. 주제는 없고..최근에 본 장면 중 인상 깊었던 것이나 이즈음 자신의 마음 속에 떠나지 않는 잔상 같은게 있다면 그려보세요. 의학적 소견은 아니지만..저희가 그림 속에 투영된 심리적 기제같은 게 보이면 그에 관해 말씀 나눌 수도 있구요. 아크릴 물감이니 색도 원하는대로 조합해서 칠해보세요. 작품은 가져가실 수 있게 잘 포장해드릴게요.
원장의 설명이 끝나고 가을과 겨울은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나란히 앉았다. 예전 스케치북 정도의 하얀 캔버스를 이젤에 걸어두곤 두 사람은 한동안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곤 마주보고 웃었다. 동병상련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무슨 생각해요? 가을이 물었다.
아무 생각도 없어요. 그래서 그게 문제에요. 겨울은 웃으며 대답했다. 가을씨는요? 겨울의 질문에
별 수 있나요. 겨울씨랑 똑같아요. 그리곤 캔버스에서 조금 더 멀찍이 떨어졌다. 그러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라도 하듯이.
가을을 보며 겨울은 한마디 덧붙였다. 고마워요. 가을씨. 제가 오늘 뭘 그릴 지는 모르지만..이런 경험은 처음이에요. 항상 남이 그린 그림만 보고 그에 대한 해석만 들었지 오늘처럼 나를 그림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타인이 아닌 나를 바라보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가을은 그렇게 말하는 겨울을 말없이 바라봤다. 겨울은 가을의 시선을 느꼈는지 흘깃 가을을 보곤 웃으며 말했다.
가을씨. 가을씨가 봐야 하는 건 캔버스지 제 얼굴이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그 정도는. 가을은 가볍게 농을 했다. 겨울씨가 훌륭한 건 감사한 걸 감사하다고 표현할 줄 알고 미안한 걸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너무도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 그럴 수 있는 예의와 용기를 가진 사람들..많지 않아요. 겨울씨가 제 짝인게 전 너무 행운아입니다.
가을의 말에 겨울은 얼굴이 붉어졌다. 가을을 보고 웃음으로 감사를 표하곤 다시 갠버스를 응시했다. 무엇인가 그려보고픈 의욕이 일었다. 원장의 말을 떠올려보았다. 요 며칠 간 내 마음에 남아있는 잔상. 내가 원했던 것. 내가 정말 그 안에 들어가고팠던 장면..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겨울은 퍼뜩 무엇인가를 떠올리곤 빠르게 밑그림을 그렸다.
잔잔한 음악이 들리고 밝은 햇살이 비추는 화실은 그저 평화로웠다. 간혹 수강생과 선생님들간 대화가 들릴 뿐이었다. 겨울은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채우다 목이 말라 그제서야 주문한 음료가 생각났다. 음료를 마시며 옆 자리의 가을을 보았다. 가을은 의자를 이젤 쪽으로 바짝 당겨앉고는 무엇인가를 집중해서 그리고 있었다. 겨울은 그런 가을의 등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자신이 흔들릴 때 같이 우왕좌왕 않고 중심을 잡아 줄 남자의 등이었다. 어릴 적 영화를 보고 오는 길, 항상 골아떨어진 겨울을 업어주던 아빠의 그 등.
겨울은 다시 캔버스에 집중했다. 마지막 칠로 화룡점정하고 났을 때 겨울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레 피곤도 몰려왔지만 뿌듯함이 더 컸다. 만족하며 그림을 보다가 인기척에 뒤를 보니 가을이 자신을 보고 있어 깜짝 놀랐다.
놀랐네요. 언제부터 서 있었어요? 겨울이 물었다.
좀 전에요. 몇 번 헛기침을 했는데 겨울씨가 못듣길래 그냥 있었어요. 집중하고 있는걸 깨기 싫었어요. 겨울씨 원래 예쁘지만 집중하는 모습은 더없이 예쁘네요.
가을의 칭찬에 겨울은 그저 고개를 숙여 감사할 따름이었다. 최근 들어 변한 가을의 태도는 당황스러웠지만 싫지 않았다. 장소 물색에 공을 들이고 복장에 신경쓰고 더 자주 자신을 칭찬하는 일련의 변화들. 겨울은 가을의 변화 뒤에 여성의 존재를 느꼈지만 여동생 정도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원장은 두 사람의 그림을 한참을 보더니 겨우 입을 떼서 말했다.
솔직히..정말 잘 그리셔서 놀랬어요. 붓놀림이 프로 같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것을 간단 명료하게 몇 번의 터치로 나타냈거든요. 생각보다 쉽지 않은 거에요. 특히 남자 분이 그린 이 까치 그림. 정말 훌륭하네요. 까치가 이른 아침 나뭇가지 하나를 입에 물고 힘차게 비행하는 모습이네요. 아마도 집을 짓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겠죠?
원장이 질문하곤 가을을 쳐다보자 가을은 알아듣곤 대답했다.
네. 어느 날 출근 중에 까치 한 마리가 제 머리 위로 퍼드득 날아올라 제가 깜짝 놀라며 위를 쳐다봤는데 입에 나뭇가지 하나를 물고 있더군요. 그게 먹이는 아닐테고 집을 짓기 위해 재료를 나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가장의 무게가 느껴졌어요.
맞아요. 저도 그리 느꼈답니다. 좌고우면 않고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한 마리 새의 비상으로 표현한거죠. 아마도 남자분은 가정을 이뤄 튼튼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오손도손 살아갈 미래를 그린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가을은 수긍의 의미인지 고개를 끄덕였고 겨울은 그런 가을을, 가을의 그림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반면 여성분은..확실히 그림에 조예가 깊다는 게 느껴져요. 빛의 밝기를 계산한 그림의 구도나 붓터치의 느낌. 섬세한 표현력이 마치 뭐랄까. 인상파의 느낌이 강하게 난다고 해야 하나요. 혹시 학교 미술 선생님이나 그 쪽 아니신가요? 원장의 질문에 겨울은 아니라고, 과찬이시라며 수줍게 답했고 가을은 역시..라는 표정으로 겨울을 보았다.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즐겁게 술 한 잔을 하고 있고..아마도 화가 본인처럼 보이는 여성 분이 한 켠에서 이 따뜻한 모임을 즐기고 있네요. 환한 웃음이 이 여성분의 심리를 대변해요. 이 분위기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는. 자신이 중심이 아닌 가에 있다는 건 행복을 바라지만, 적극적으로 이를 쟁취하는 스타일이라기보단 마음속으로 바라는데 그치는 다소 소극적인 타입이라는 것처럼 보여요.
원장의 말에 겨울은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듯 얼굴이 다소 홍조를 띄었다.
이건 남자분처럼 이런 장면을 본 건가요 아님 마음속에 품고 있는..?
후자인 것 같아요. 지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그 설명을 따라 제 마음 속에 그린 장면이었는데..부러웠거든요. 그 장면 속 일부가 되고 싶다는..
그렇군요. 원장은 그림을 가까이서 다시 보더니
여자분께서는 아마 이런 모임을 아주 옛날에 가졌었거나..어쩌면 아예 그런 게 없는 환경에서 사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결핍에서 오는 그리움. 바람. 이런 것들이 들어가 있어요. 멋진 그림입니다. 저도 당장 이 모임에 가입하고 싶네요.
원장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커플이 오셨으니 덕담이라면 덕담인 해설을 하자면 남자는 강한 책임감으로 가정을 지킬 것이고 여자는 환한 웃음과 따뜻한 인성으로 가족 구성원들을 결속시킬 것 같네요. 천생 연분 같습니다.
가을은 환히 웃었고 겨울은 멋적은 미소를 지었다. 원장은 두 사람의 그림을 잘 포장해서 돌려주었다. 겨울은 그림을 서로 선물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겨울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인사하고 카페 문을 열고 나가자 선생님 중 한 명이 원장에게 물었다.
저 여자분 연예인인가요?
아닌 것 같아. 어릴 때 지망생이었는지도 모르지. 정말 예뻤지?
네. 모델해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요. 보조 선생님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곤 한가지를 더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해석을 하셨어요? 남자 분의 그림은 확실히 가정을 원하는 게 느껴졌지만..여자 분의 그림은 뭐랄까..아직은 청춘이 그리운..결혼을 늦출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지던데..
원장은 선생님을 보곤 웃으며 말했다. 그건 원장이 돼봐야 아는 거야. 나도 이선생 해석에 동의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 여긴 꿈보다 해몽이 중요한 곳이라구. 커플들이 기분 좋게 돌아가는 것. 그게 우리 월급이란 거 이선생은 아직 몰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