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마포지사 김여름 과장입니다. 박상진 과장님 자리 계신가요?
여름은 출근 직후 동기인 상진이를 찾았다. 지난밤 일본 진보초에 대해 생각하며 전전반측하다 불현듯 무엇인가 떠올랐기에.
네 진주지사 박상진 과장입니다.
반가운 음성. 상진이는 동기 중에서도 여름과 꽤 친했다. 서울에서 근무하다 작년 초 진주로 발령이 났었다.
상진아. 여름이야. 잘 지내지?
여름? 웬 일이야? 잘 지내? 상진이는 반가운 마음에 한껏 높은 톤으로 여름을 맞았다.
여름은 웃으며 상진과 몆 마디 안부를 주고 받았다.
진주는 어때? 살기 좋아? 사람들은?
여기 좋아. 연고 없이 내려올 때만 해도 걱정했는데..사람들 잔 정 많고..업무적으로도 좋아. 경주만 천년 고도가 아냐. 진주성 한 번 와 봐. 진짜 감탄한다니까.
그래? 거짓말 하는 것 같진 않네? 여름은 웃으며 대답했다.
친구야. 오늘도 사무실 라디오에서 여수 밤바다 노래가 나오길래 내가 '아..갑자기 여수 밤바다 가고 싶네' 그랬더니 옆에 차장님이 '한시간이면 가요. 오늘 밤 가셔도 되요' 이러시더라.
여름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다가 사무실임을 깨닫고는 웃음을 꾹 참았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진주는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곳이랄까. 서울에선 진짜 꿈도 못 꿀 일이지.
상진이의 음성에 꽤나 큰 만족감이 묻어났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사무실 분위기도 좋네. 진짜 너 있을 때 한 번 가야할텐데..근데 상진아 언제까지 있어? 올해 말이면 2년 되나?
그치. 작년 초 내려왔으니. 와 보니 너무 좋아서 원래 2년 있을 예정이었거든. 근데..여름아 내가 얘기 안했지? 나 올 가을 결혼해.. 그래...그 사람...내가 또 누가 있겠냐..
상진이는 자기가 그리 능력자가 아니라며 웃었고 여름도 따라 웃었다.
예비 장인께서 정년퇴임 전에 식 올리면 하셔서..날짜를 좀 당겼어. 그래서 하반기 인사로 서울로 올려달라고 인사부에 고충 넣긴 했는데..모르지..들어줄지.
상진이는 얘기하다 뭔가 생각났는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니 김여름. 너 입사 후 한번도 지방 안가지 않았냐? 여름아 나 보려고 오지 말고 그냥 네가 진주로 와라. 나 대신 여기서 일 좀 해.
김과장과 박과장 모두 크게 웃었다.
상진아. 진주뿐 아니라 어디든 못가. 6개월만 더. 시간이 좀 필요한 일이 있어서. 내년 초엔 진주가 아니라 평양으로 보내도 가서 근무하마.
상진이는 웃으면서도 친구를 놀렸다.
아니 왜? 여름이 너 사귀는 사람도 없잖아?
여름은 그건 그렇다고 웃으며 대답하곤 친구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연락했다고 운을 뗐다.
부탁? 뭔데?
몇 년 전에 너 홍보실 있을 때 일본 헌책방 거리 취재했던 거 기억나?
아..사보에 실었던 거? 진보초였지 아마? 왜 갑자기?
나..개인적으로 꼭 찾아야 할 책이 있거든. 오래전 소량으로 출간된 책인데.. 출판사도 문 닫은 거 같고..헌책방 어딘가엔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좀 가서 뒤져보려고.
아..그래? 무슨 책인데?
얘기하자면 길어. 결론만 얘기하면 책 제목도 모르고 지은이의 필명도 몰라. 한국인과 일본인이 공저인데..좀 복잡해.
책 제목도 모르고 필자도 모르는데 책을 찾겠다고? 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암튼 내가 뭘 도와주면 되?
상진이의 말에 여름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너 그 때 진보초 서점 돌아다니며 거기 사장님 중 한 분 인터뷰했었잖아..그 분 연락처 알고 있어?
아..아다치상. 그래..기억난다. 아다치상이 맞을거야. 이메일 주소가 어디 있을거야. 찾아서 보내줄게. 그래..아냐. 뭘 이 정도로. 알았어. 나중에 꼭 한 번 봐. 발령나서 내려오지 말고 그 전에 오라구.
상진이는 마지막까지 친구를 놀리며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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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여름은 상진이에게 받은 이메일 주소로 얼굴도 모르는 아다치상에게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아 편지를 썼다.
자신이 누구고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으며 왜 메일을 보냈는지. 겨울과 그 아버지에 대해. 겨울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이 소개된 오래전 발간된 일본의 한 월간지에 대해. 다음주 금요일쯤 일본을 갈 예정이며 그 때 아다치상의 서점을 방문하고 싶고 그곳에서 무엇인가 실마리를 잡고 싶다는 바람을. 아다치상께서 자신의 서점뿐만 아니라 그 거리의 인맥을 이용하여 수수께끼를 풀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사하는 소망을.
번역기로 일어로 번역한 뒤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데 겨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름은 겨울과 웃으며 금주의 일상에 관해 이야기했고 주말에 잠시 짬을 내 보기로 약속을 했다.
통화를 마친 뒤 여름은 메일을 다시 열어 마지막 문단을 추가했다.
아다치상. 진보초에 대해 자료를 찾다가 출간된 지 10년이 훌쩍 넘어서야 빛을 본 책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도 번역되어 이미 유명한 책이었습니다. 그 책의 배경이 진보초의 헌책방이라 관광객들이 더 그곳을 찾게 됐다는 건 아마도 아다치상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진보초를 배경으로 한 그 소설이 출간 직후가 아닌 한참의 세월이 지나 우연히 빛을 본 것은 진보초가 가진 어떤 힘, 마법같은 시간의 힘이 작용한 것처럼 비쳤습니다. 아이러니하고도 신묘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이들이 오가고 그들의 사연을 일일이 들어줄 여력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진심으로 간절함을 담아 부탁드립니다.
진보초 거리 곳곳에 새겨진 과거의 흔적이, 서점 깊숙한 곳 켜켜이 쌓인 예술가들의 고뇌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적같은 그 땅의 기운이 이국의 한 청년과 그가 지키고자 하는 사랑에게도 드리우기를
간절하고 간절하게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