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약속한 카페에 도착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창가쪽에서 여름이 노트북 작업에 한창이었다. 겨울이 테이블 가까이 도착해서야 여름은 겨울을 알아채고 인사했다.
여름씨. 노트북 뚫어지겠어요. 이즘 반도체 가격 급등해서 노트북도 비싼데.
겨울은 웃으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겨울씨. 겨울씨는 더하겠지만 여기도 정신없거든요. 간간히 목빼고 겨울씨 오나 확인했는데 하필 안보고 있을 때 도착했네요. 여름은 노트북을 접으며 대답했다. 그리곤 말없이 겨울을 바라봤다.
왜요? 뭐 지적할 거 있어요? 겨울은 여름의 시선을 느끼며 농담을 했다.
늘 느끼지만 겨울씨 정장은 진리네요. 여름의 감탄에 겨울은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질린다구요? 알겠어요. 이젠 주중엔 여름씨 안보면 되죠.
여름은 웃었고 겨울도 따라 웃었다. 시덥잖은 농담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 관계라니.
나중에 저한테 고마워해야 할걸요. 금요일에 야근은 선 넘는 거 아닙니까. 여름은 일이 많다는 겨울에게 커피 한 잔을 읍소했었다.
맞아요. 모르죠. 속으로 누가 절 구해주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퇴근하고 나오는데 기분은 좋더라구요. 겨울은 솔직히 인정했다.
진짜 식사 안해도 괜찮겠어요? 여름은 겨울이 회사에서 간식을 이미 먹었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진짜 괜찮아요. 여름씨도 드신거죠? 겨울의 질문에 여름은 자신의 배를 툭툭 쳐보이며 웃었다.
카페에는 봄이 왔음을 알리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크리스마스 캐롤 수준의. 둘도 느꼈는지 눈을 마주치곤 웃었다.
생각해보면 봄이 와도 얼마나 즐기며 그 계절을 맞았는지 모르겠어요. 봄은 늘 일에 치여 살았던 것 같아요. 겨울은 푸념하면서 여름의 블룩한 가방에 시선을 줬다.
여름씨네도 진짜 바쁜가 보네요. 여름씨 가방이 저렇게 꽉 찬 건 거의 처음보는 것 같아요. 좀전까지도 일하고 있던 거에요?
아..그렇죠. 뭐. 회사 일이란게 갑자기 많아질 때도 있고.
일 많은 거 치곤 여름씨..별로 피곤해 보이진 않아요. 눈도 더 빛나는 거 같고..프로젝트가 여름씨 맘에 드나봐요? 겨울의 물음에
기분 탓이겠죠. 겨울씨 보니까..그냥 업돼서.
여름은 허허실실 대답했다.
겨울은 가볍게 눈을 흘기곤 질문을 이어갔다.
이즘 여름씨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나요?
왜요? 갑자기? 여름은 뜨끔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아뇨. 그냥..맞아요. 기분 탓이겠죠. 근데..모르겠어요. 투정 같은 거려나..겨울은 본론은 얘기 않고 빙빙 돌려가며 혼잣말처럼 말하곤 웃었다. 여름도 따라 웃었지만 겨울의 다음 말을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일하러 가는 것이니 당연한 거겠지만..제가 아는 여름씨라면 주말 일본 출장 갈 때 농담이라도 물어봤을 것 같아요. 같이 갈 생각 있냐고. 당일치기도 가능하니 핑계대고 가자고. 다녀와서도 출장 얘긴 별로 하지도 않고. 하다못해 맛집 얘기라도..오늘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거며 짐이 한가득인 가방. 아무래도 분위기가 달라요.
여름은 겨울이 얘기하는 내내 겨울의 눈을 보며 웃었다. 무의식적인 방어 기제였는지 아님 겨울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의 표현이었는지는 여름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그랬나요? 몰랐어요. 정말. 전 별로 느끼질 못했는데 듣고보니 겨울씨 말이 맞네요. 외부에서 보는 시각이 정확하죠. 음..일이 많은 건 사실이고..근데 그게 다는 아닌데..아마 제가 얘기해도 겨울씨가 어머님한테 말 못할거고..괜히 신경만 쓰이고 어머님한테 좋지 않은 감정만 가질 수 있으니..그래서 말 안한게 아닐까.. 여름은 그저 떠오르는대로 얘기했다. 이런 변명을 상대가 납득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겨울은 여름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엄마에 대한 얘기에선 더더욱. 겨울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엄마..엄마한테는 말 못했을거에요. 여름씨 말이 맞아요. 제가..연극했잖아요? 언제가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어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연기자였다 해도..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엄마는 속이지 못할 것 같다는..마음 속에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데 엄마 눈을 응시하며 다른 말을.. 도무지 할 자신이 없어요.
그건..여름이 말을 받았다.
어머님이 무섭거나, 겨울씨 연기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머님에 대한 겨울씨의 애정 때문일겁니다. 속일 수 없는게 아니라 속이고 싶지 않은 거죠.
여름의 말에 겨울은 고개를 들어 여름을 바라봤다. 그리곤 애정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그리곤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웃었다.
여름씨. 제가 다음주에 하루 휴가내고 미희랑 캠핑 가서 1박 한다고 얘기했죠?
네. 기억해요. 여름이 대답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 문제로 엄마랑 좀 다퉜는데..그 때 엄마에게 짜증내며 말할 수 있었던 게 그게 진실이었으니까..만약 제가 남자랑, 가령 여름씨랑 가는 걸 미희랑 가는 것으로 둘러댔다면 제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엄마가 놓칠 리가 없었을거에요.
그렇군요. 여름은 뭔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표정을 가리려는 듯 서둘러 커피잔을 들었다.
겨울은 캠핑이 너무 기대된다는 얘기를 한참이나 했다. 유년 시절은 물론이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거의 가본 적이 없다는 얘기. 여름은 자주 갔냐는 물음부터 춘천 캠핑장에 대해 알고 있음 준비할것 좀 알려달라는 부탁까지. 겨울 특유의, 무엇인가 장황하게 얘기할 때의 표정과 몸짓을 여름은 따뜻한 눈길로 지켜봤다. 눈앞의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듯이.
카페 마감 시한이 돼서 둘은 자리를 정리했다. 여름을 따라 문을 밀고 나가며 겨울은 다시금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다. 왜 여름은 농담일지언정 묻지 않았을까. 그 캠핑. 같이 가면 안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