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중순 봄이와 연극을 관람했을 때였다. 극 보조 연출을 맡고 있던 후배 상철이는 3월에 있을 자신의 결혼식에 겨울을 초대했었다. 연극부 선후배간 단톡방에 상철이가 청첩장을 띄웠을 때 미희는 겨울에게 전화를 했었다. 상철이와의 친분으로만 따진다면 미희가 겨울보다도 더 가까운 편이었다.
미희와 겨울은 대학로에서 만나 4호선을 타고 강북 방향으로 움직였다. 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조금 더 들어갔다. 어린 시절의 겨울은 이 곳을 방문했을지도 모른다. 성북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푸른 숲의 기운에 겨울은 기지개를 켰다. 겨울의 집에서 먼 거리였는지만 피곤하진 않았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 때문이었을까.
봄이는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봄이는 두 선배를 신랑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상철이는 미희와 겨울을 보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봄이는 선배들이 상철이와 인사 나누는 것을 기다렸다가 두 선배를 다시 에스코트했다. 셋은 무대와 가장 먼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용케 자리를 잡았네? 근데 너무 멀지 않나? 미희의 핀잔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에 봄은 대답했다.
이 자리 사수하느라 얼마나 눈치보였는지 알면 그런 말 못하실걸요?
겨울은 고맙다고 진심을 담아 얘기했다. 김봄. 도련님 같다지만 뒤에서 궂은 일을 은근히 챙기곤 했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남자 같다는 여름의 말이 떠올랐다.
경희 선배는 결국 못왔네요? 봄이는 셋이 아닌 둘이 어색했는지 두 선배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경희는 애초부터 가족 여행 있어서..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고. 미희가 아쉬움을 담아 답했다.
셋은 말없이 결혼식 준비를 지켜봤다. 지자체에서 공공 정책으로 추진하는 결혼식장 중 한 곳. 한옥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야외 결혼식장이었다.
외국 영화보면 나오는 결혼식 분위기네. 미희가 먼저 입을 떼었다.
생각보다 훨씬 좋네요. 봄이가 미희의 뒤를 이었다. 겨울이 아무 말이 없자 봄이는 말을 이어갔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청년 예술인이 초기에 돈 벌긴 어렵잖아요. 상철이도 결혼식 비용 은근히 부담스러워 했는데 잘됐죠. 좋은 정책 같아요. 그리고 다행히 날도 좋고..야외 결혼은 날씨가 반은 먹고 가는데..
그러게. 비 왔으면 어쩔 뻔했어. 어르신들도 있는데..미희가 봄이의 말에 수긍하며 말했다.
괜찮았을거야. 겨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봄과 미희는 고개를 돌려 겨울을 쳐다보았다.
비오면 잘산다잖아. 그리고..폭풍우가 아닌 이상.. 비맞으며 올리는 결혼식. 나름 멋지지 않을까. 추억으로 오랫동안 간직될테고.
그럴수도 있겠네요. 봄이는 말과는 달리 수긍하는 표정은 아니었고 미희는 여름과 붙어다니다보니 낭만파 다 됐다고 생각했지만 봄이가 있어 말하진 않았다.
너희 엄마였다면 질색하셨을걸? 미희의 말에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 소리로 웃었다.
웃음의 끝에 미희가 말했다.
있잖아. 아까 외국 영화같다고 했을 때 머릿 속에 스친 장면이 있었거든. 옛날 영화였는데..야외 결혼식장에서 하객이었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한눈에 반해서..그 뒤로 몇 번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던..그 영화 제목 뭐였지?
그렇게 말하면 알겠어요? 비슷한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봄이는 미희에게 받은 핀잔을 돌려주었다.
좀 더 얘기해봐. 알듯 말듯한데..겨울이 말했다. 여름이 있었다면 대번에 알아냈을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주인공 둘 다 되게 유명했는데..얼굴도 안떠오르네. 미희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었는지 실소를 머금었다. 결혼식 장면이 자주 나왔고..그 때마다 두 주인공이 만나서 애정이 커진듯했어. 마지막에 두 사람이 결혼했었나..잘 모르겠네. 너무 오래전에..극장도 아니고 TV에서 오늘의 명화..이런 걸로 본거라..
부연 설명도 전혀 도움이 안되네요. 장난 섞인 봄이의 말에 미희는 잔디 몇 가닥을 뽑아 던졌다. 봄이는 도망가며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겨울은 두 사람의 어린이같은 모습에 웃으면서도 머릿속에서 멤도는 영화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여하튼..미희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 영화를 보면서..왠지 인생의 압축 같다는 느낌이었거든.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유도 그 잔상 때문인 거 같고. 우리가 한창 젊은 나이잖아. 아무래도 결혼식이 장례식보다 잦을 나이고. 아..그러고보니 그 영화에서 누구 한 명 죽었던 것 같은데..
미희는 다시 한번 영화를 떠올리려 노력하다 안되겠는지 하던 말을 계속했다.
결혼과 죽음이라는 삶의 큰 과정들이 맞물리며 진정한 애정을 발견하게 되는..아마 그런 내용이었을거야. 보면서 나도 몇 번의 식을 거치고 나면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될까..그런 로맨틱한 상상을 했었지. 미희는 소시적 아련한 추억을 떠올린 듯 웃었다.
선배 최근에 식장 몇 번이나 가셨어요? 봄이는 겨울에게 물었고 겨울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했다.
경희 결혼식..서희 결혹식..그리고 오늘..세번 정도?
결혼식이 잦긴 하네요. 미희 선배 말처럼..저희가 그럴 나이긴 한가봐요. 봄이도 자신의 최근 다녀온 결혼식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그 영화에서 누군가가 죽나요? 봄이의 질문에 겨울, 미희는 순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봄 자신도 아무 생각없이 한 질문에 담긴 함의가 떠올라 아차 싶었다.
넌..좋은 날에 그런 얘기를 하니. 미희가 핀잔을 퍼부었고 봄이는 민망함에 화살을 미희에게 돌렸다. 영화 중간에 그런 장면이 있다고 얘기한건 선배였다구요.
겨울은 여전히 그 영화를 찾고 있었다. 그래. 우리 인생을 닮은 영화였다. 누군가는 결혼했고 누군가는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을 애도했던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있었다. 화창한 봄 날. 이제 막 식이 시작되었다. 겨울의 눈은 식을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영화 속 죽음과 그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끊임없이 복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