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O.U

by 정자까야

기안해 올린 리포트가 몇 번이나 지적되어 되돌아왔다. 여름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맑은 정신으로 다시 검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마감하고 퇴근했다.

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모님은 오늘 약속이 있어 늦는다고 하셨다. 겨울은 일이 밀려 간단하게 먹고 야근할 계획이라 했다. 바로 귀가할까 하다가 문득 기한이 오늘까지인 쿠폰이 떠올랐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부러 걸었다. 애석하게도 버스가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저녁을 먹고 식당 문을 여니 날씨가 돌변해 있었다. 바람은 잠잠했지만 비가 퍼붓는 수준이었다. 여름이 들고 있던 3단 경량 우산은 이 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버스도 띄엄띄엄 있는 곳. 하염없이 기다릴 수 없어 일단 걸었다. 다행히 바람은 없어 상반신은 우산으로 가릴 수 있었다. 문제는 무릎 이하. 신발은 몰론이고 바지 하단도 고인 물, 튀는 비에 모두 젖었다.

쿠폰 그거 얼마한다고..그냥 집으로 갈걸..아니면 집 근처 식당에서 먹을걸..그런 후회를 하며 마음만큼이나 무거운 다리를 끌며 걸었다. 집 근처에 거의 왔을 때 한차례 강한 바람이 불었다. 여름의 우산은 저항 한 번 없이 뒤집어졌다. 제대로 펴려고 하는 그 짪은 순간 비는 이미 여름의 전신에 내려앉았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말리는 사이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아들 일찍 왔네? 저녁은? 엄마는 오자마자 여름의 식사부터 챙겼다.

먹었어요. 쿠폰 쓰려고 외진 데까지 갔다가 비 쫄딱 맞고 왔어요. 여름은 허탈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뒤이어 들어오셨다. 엄마와 달리 아버지는 한쪽 어깨가 완전히 젖어 있었다.

우산 한 개로 오신 거에요? 여름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어..혹시 해서 그나마 하나 가져가서 다행이었지. 갑자기 이렇게 비가 오네..아버지는 대꾸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씻을 준비를 하셨다.

여름아. 저녁 먹은거 부실하면 이거 좀 먹을래? 엄마아빠가 오다가 산거야. 여름의 엄마는 파전에 막걸리를 식탁에 내어놓았다.

이 날씨에 딱이네요. 여름은 웃으며 식탁에 앉았다. 아버지는 간단히 세안하곤 거실로 나와 소파에 몸을 기댔다.

당신도 여기 와서 여름이랑 막걸리 한 잔 해요. 엄마의 성화에 아버지는 못이기는 척 여름의 옆에 앉았다. 엄마는 간장 등을 가져와 여름의 앞에 자리했다.

아들. 이번주에도 약속 있어? 없으면 엄마아빠랑 벚꽃 구경하러 갈까? 진해 벚꽃 뉴스에서 얘기하던데..

그런 데 가면 벚꽃보다 사람 구경하고 온다고..서울도 곧 필거야. 조금만 기다리라니까..

아버지는 엄마의 제안이 못마땅한 모양인지 말없이 막걸리를 따서 여름에게 한 잔, 자신에게 한 잔을 따랐다.

엄마. 이번주에도 일본 가요. 벚꽃은 거기 가서 실컷 보고 올게요. 엄마아빠의 표정이 서로 달라 여름은 웃음이 났다.

또 일본가? 아무리 회사일이라지만 너무하지 않니? 주말도 그리 일하고 월요일에 또 출근하라니..

여름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엄마 아빠. 사실은 저 회사 일로 가는거 아니에요.

여름의 말에 부모님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이었다. 여름은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최대한 간략하게.

너 좋아하는 사람 있을거라곤 짐작했지. 여름의 아빠는 회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일전에 일요일이었나..전날 술 마신 것도 아닌데 오전 내내 일어나지 않는 모습 보며 실연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진행중이었구나. 아버지의 말에 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엷게 미소지었다.

그러니까..그 여자의 아버지가 시집을 낸 건 거의 확실한데..제목도 모르고 일단 가서 뒤져보겠다는 얘기니? 엄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엄마. 그래도 다행히 메일 보낸 그 일본인 서점 주인이 답신이 왔어. 자기도 최대한 도움이 되고 싶다고. 나 오기 전이라도 자신이 시간 닿는대로 찾아보겠다고 했고. 잔디밭에서 바늘 찾는 정도는 아닐거야..넘 걱정 말아요.

여름은 엄마를 안심시키려고 말했지만 내심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부모가 말린다고 될 일이니..그러고 싶지도 않고. 엄마는 체념한듯이 말하곤 한마디 덧붙였다. 그 일본인 연락처나 어디 적어놔. 혹시 주말 지났는데 안돌아오면 진보촌지 뭔지..거기 가서 책이 아니라 널 찾아서 와야할테니.

엄마의 투정섞인 농담에 아버지와 여름이 동시에 웃었다.

그나저나 그 아이 사진이라도 찍어놓은 거 없냐? 네가 그렇게 정신 못차릴 정도로 빠진 걸 보니 엄청 예쁜가보네..아버지의 말에

아빠. 저 얼굴만 보는 사람 아니에요. 중요한 건 내면이라고 늘 아빠가 얘기했으면서..

그래. 내면이지. 누가 뭐라했냐. 사진 있으면 한 번 보자는거지.

아버지의 재촉에 여름은 일전에 대학로에서 찍었던 겨울의 사진을 보여드렸다. 두 분은 사진을 보시더니 잠시 아무 말씀도 없었다.

너도 네 아빠만큼이나 사람 가리는구나. 저 얼굴이 내면을 본 얼굴이니? 엄마는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아버지는 그저 만면에 웃음을 띈 채 말없이 막걸리를 드셨다.

네가 언더독이라고 했지? 아버지의 물음에 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집을 찾는다고 네가 그 아이의 짝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거 아니냐. 너 딴에야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겠지만..그 아이 사진 보니 네 연적들이 그 아이를 쉽게 포기할 것 같지가 않네...솔직히 네가 그 아일 신붓감으로 데려오면, 네 엄마는 모르겠다만, 나는 황송한 기분이 들 것 같다. 내 아들이 그 정도는 아닌데..그런 생각에.

아버지는 말을 마치곤 껄껄 웃었다. 여름은 뭔가 항변하려다가 그만두고 아버지와 막걸리로 건배를 했다.

아버지는 뭔가를 생각하곤 다시 말씀하셨다.

여름아. 혹여 네게 실망스런 결과가 현실이 된다해도 절대로 좌절하지 말아라. 사람 일 모르는 거야. 마지막이 마지막이 아닐 수 있어. 그리고..네가 사랑하는, 너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야 해. 가령 네 엄마. 네가 좌절해서 네 몸을 망가뜨리거나 하면 엄마가 어떻게 살겠어..마음 단단히 먹고..

아빠. 왜 그래요? 제가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봐 그래요? 여름은 웃으며 말했다.

넌..가끔은 너무 자유로운 영혼같아서..그리고 늘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을 이해한다고 말하니 하는 말이야. 약속해라. 어떤 일이 있어도..살아 있겠다고.

아빠..그렇게 비장미를 실어 말하니 진짜 같잖아요. 여름이 웃으며 넘기려하자 아빠는 여름의 손을 잡았다.

여름아. 이번 일본행 때문에 그런게 아니야. 네가 다 걸고 하는 이 연애의 끝에 대해 얘기하는 거야. 약속해줘라. 아빠한테..

아빠의 진지한 눈을 보곤 여름도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네 아빠..약속해요. 이 연애의 끝에 무엇이 있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게요. 반드시.. 살아있을게요.

여름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를 보고 씩 웃어 보이곤 말을 덧붙였다.

전 그저..진인사대천명..그런 자세에요. 후회없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려구요. 여름의 말에 엄마는,

그럼 됐어. 일본 가서 샅샅이 뒤져. 그러고도 못찾으면 할 수 없는거고. 엄만 솔직히 그냥 그렇게 하고..찾든 못찾든 끝냈으면 좋겠어. 그게 그냥 솔직한 맘이야.

엄마는 한 숨을 내쉬고는 아빠가 먹던 막걸리 잔을 뺏어 한 잔 마시며 말을 이었다.

여름이 네가 어디가서 꿀리는 얘니. 엄마아빠가 널 어떻게 얻었는데...부잣집에 연예인처럼 예쁜 그 아이 얻으려 네가 평생 기죽고 사는 거..엄만 그 꼴 못본다. 네 각시가 진짜 맘이 착한 애였으면 좋겠어. 그게 진짜 다야..

여름은 엄마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그 맘이 착한 아이가 정겨울이라는 사람이라고 속으로 생각할 뿐.

엄마아빠는 막걸리 한 병을 더 내놓고는 삶에 대해, 여름과 겨울에 대해, 그리고 미래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리곤 아까 그 사진 다시한번 보여달라고 하시곤 서로 먼저 보겠다고 옥신각신 다투셨다.

여름은 이런 부모를 보며 속으로 되뇌였다.

제가 하는 모든 일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엄마아빠는 제가 우리 가족의 일원이라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지만, 실은 제가 더 그렇게 느끼는 거 모르시죠? 엄마아빠의 자식으로 태어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오늘..집에 오기까지..일진이 안좋았어요. 교과서에서 배운 유명한 근대소설의 제목이 떠오를만큼. 하지만 집으로 와 엄마아빠를 보고 마음속 깊은 얘기 나누며 다시금 그 소설의 제목이 떠오르네요. 비틀지 않은 액면 그대로의 의미로서. 엄마아빠 감사해요.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리고..사랑합니다. 표현할 수 없을만큼. 평생 표현해도 부족할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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