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못다한 이야기
‘원악도(遠惡島)’라는 단어 들어보셨나요? 조선시대까지 제주도를 부르는 별칭 중 하나였습니다. 멀고 나쁜 섬이라는 뜻의 저 단어는 제주도민의 삶의 질이 좋지 않았던 것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육지에서 가장 멀고 가난한 섬이었던 제주도로 가야 하는 육지인들이 상상하는 제주에 대한 이미지를 대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김익수라는 사람은 친구 이증이 탐라 사절로 가게 되자 그를 위로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관원으로 오는 것이 귀양과 무엇이 다르랴!
이번 이별이 가장 상심되네.’
관직으로 오는 것도 이렇게 괴로울진대 자신이 누리던 권세와 영화가 모두 사라진 상태로 제주도로 유배를 와야 했던 이들은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이건은 ≪제주풍토기≫에서 제주도 귀양살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속반(粟飯: 조밥)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갈(蛇蝎: 뱀류의 총칭)이다.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이다. 하물며 왕도의 소식, 고향의 소식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몽혼(夢魂)에나 물어볼 수밖에, 들을 길이 없다. 병이 들면 그저 손을 놓고 죽음을 기다릴 뿐으로 침과 약을 쓸 방법이 없다. 이야말로 통국(通國)의 죄지(罪地)이다. 나라에서 죄인을 이 땅으로 내쫓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탐라는 통국의 죄지로서, 유찬(流竄: 유배)은 나라의 중형이다.’ 이런저런 한탄도 눈에 띄지만, 제주를 통국의 죄지라고 표현한 것이 가장 눈에 띕니다. 제주도가 온 나라를 통틀어 가장 죄 있는 땅이라고 말하는 그의 절규가 인상적입니다. 위의 글을 읽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무리 그래도 절규하면서까지 제주도를 싫어해야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먼저 들고, ‘유배가 그렇게 강력한 형벌인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 이제부터 제주도가 육지 사람들이 오기 싫어하는 섬이 되었는지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죠.
‘제주도에 유배를 온다.’라는 말이 왜 매우 부정적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의 유배형에 대해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죄인을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는 귀양을 유배형의 전형이라고 생각하지만, 유배형의 종류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유배형에는 죄인을 고향에서 먼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천사(遷徙), 유배인의 정상을 참작하여 유배지 현관(顯官)에게 책임을 지우고 그 조치를 맡긴 부처(付處), 그리고 안치(安置)가 있습니다. 안치는 죄질이 가벼운 사람을 고향에 유배시키는 본향안치, 중죄인을 섬에 격리시키는 절도안치, 가시울타리를 치고 죄인을 유폐시키는 연금 조치인 위리안치가 있습니다. 정조 때에 간행한 법전, ≪대전통편≫에 제주도는 죄명이 특히 중한 자 이외에는 유배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절도안치와 위리안치가 동시에 시행된 유배지였습니다.
제주도가 이렇게 중죄인의 유배지가 된 데에는 불편한 교통편이 한몫 했습니다. 땅끝 해남이나 바로 그 옆의 강진에서 출발해 추자도를 거친 다음 사서도, 대화탈도, 소화탈도 등을 지나서야 제주도에 도착할 수 있었죠. 특히 대·소화탈도 사이는 두 조류가 교차하는 무척 험하고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험난한 파도를 넘어서 제주도에 도착하면 가난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곳 제주도에 오는 중죄인은 강력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고 대부분이 정치범들이었습니다. 중앙 정계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높은 신분의 이들이 제주도로 유배를 왔죠. 광해군, 고승 보우, 송시열부터 근대의 최익현, 김윤식, 박영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습니다. 이렇게 많은 유배객들을 전부 소개할 수는 없고 제주올레를 따라가면서 볼 수 있었던 유배객들의 흔적을 따라 몇 명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18코스의 시작점을 얼마 지나지 않아 굽이굽이 골목길을 지나고 나면 귤림서원 옆 오현단(五賢壇)이 보일 겁니다. 귤림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사라지고 최근에 복원한 것이고, 원래 귤림서원이 있던 자리에 서원 철폐 후 제단을 만든 것이 오현단입니다. 이 오현단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주에 머물렀던 5명의 유학자를 모신 곳으로 그 5명은 1520년(중종 15)에 유배된 충암 김정, 1534년(중종 29)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 1601년(선조 34)에 제주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1614년(광해군 6)에 제주에 유배 왔던 동계 정온, 1689년(숙종 15)에 유배 왔던 우암 송시열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것은 5명 중 3명의 유배객들입니다. 먼저 충암 김정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충암은 조광조와 함께 사림차를 대표하는 문신으로 대사헌·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 때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갑니다. 이 행동 때문에 죄가 더해져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0개월 후에 사사(賜死)되었습니다. 훗날 사림파가 정권을 잡은 뒤에는 조광조와 함께 복관되어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긴 ≪제주풍토록≫은 제주 관련 기록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는 제주에서 사망하며 절명시를 남겼는데 이 시가 자못 비장합니다.
외딴 곳에 몸을 던져 외로운 넋이 됐고
어머니 두고 가매 천륜을 어기누나
한 세상 만나 이 목숨 끊어지니
구름 타고 상제의 문을 지나서
굴원(屈原)을 따라서 아득히 노닐리라
기나긴 밤 캄캄하기만 한데 언제나 새려나
빛나는 단심(丹心)이 잡초에 묻혔도다
당당한 장한 뜻이여 중도에 꺾였으니
아 천년 뒤에 이 슬픔 응답 있으랴
동계 정온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죽인 강화부사 정항을 처벌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모하라는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됩니다. 지금도 대정현성 안에는 동계 정온의 유배지 터가 남아있습니다.
우암 송시열은 1689년 1월 희빈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노론의 시대가 찾아오면서 추앙받았습니다.
충암은 ≪제주풍토록≫이라도 남겼지만, 정온과 송시열은 제주에 큰 영향을 준 것이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제주의 오현단에 모셔진 것은 제주에 다녀 간 사람들 중 충절과 학문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현단에 모셔진 유배객들 말고도 충절과 학문이 높았던 유배객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제주올레 코스에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 사람의 이름을 딴 유배길이 제주 시내부터 이어져 있습니다. 고종 시대 척화파의 상징, 면암 최익현입니다.
면암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퇴출을 주장하여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나, 왕의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873년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875년 풀려납니다. 이듬해에는 일본과의 통상은 안 된다며 척사소를 올린 후 흑산도로 유배갔다가 풀려났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켰다가 잡혀 대마도로 유배를 갑니다. 혼란했던 시기 그의 사상이 시대에 조금 뒤떨어져 있었을지는 몰라도 왕을 향한 충절과 곧은 마음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박영효와 김윤식도 제주도로 유배를 왔었는데 박영효는 농업기술, 교육, 사회기반시설 개선에 큰 영향을 미쳤고 김윤식은 제주에 머물며 본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을 보고 기록하여 외부인의 시선으로 제주사에 대한 신빙성 있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설명할 이는 중립 외교를 통해 실리를 추구했으나 당쟁에 의해 희생된 광해군입니다. 광해군은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물러나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1637년 6월 16일 어등포로 입항하였습니다. 천으로 배의 사면을 가리고 움직이다보니 땅에 내려서야 자신이 도착한 곳이 제주임을 알게 되었고 무척 놀랐다고 합니다. 제주 목사가 광해군을 맞이하며 ≪사기≫의 말을 인용하여 한 마디를 건넵니다. “임금이 덕을 쌓지 못하면 주중적국(舟中敵國: 한 배를 탄 사람이 적국이 된다.)이란 사기의 글을 아시죠?” 이 말을 들은 광해군은 눈물을 비 오듯 쏟았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왕이었던 자가 최악의 유배지에 위리안치되기까지 느꼈을 그 끝없는 좌절감과 슬픔이 이 일화에 담겨 있는 듯합니다. 20코스 행원포구 광해군 기착지에 있는 조촐한 비석하나만이 조선 역사 이래 중립 외교라는 손에 꼽히는 유능한 정치를 펼쳤지만, 말년에는 그 누구보다 조용한 삶을 살아야했던 비운의 왕의 삶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18코스의 마지막 즈음, 조천진성 성벽 위에 우뚝 서 있는 하나의 정자가 있습니다. 정자의 이름은 연북정(戀北亭)입니다. 북쪽의 임금을 바라보며 사모한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미가 섞인 이 정자의 이름은 사실 더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자신이 육지에 두고 온 가족, 업적을 포함한 내 삶의 전부를 그리워하며 사모하는 정자라는 의미죠. 유배지에서 힘든 삶을 견뎌내면서 언젠가는 이곳에서 풀려나 육지에서 자신의 삶을 되찾을 것이라 생각하고, 바라며 북쪽에서 내려오는 추운 바람을 이 정자에서 맞았을 무수한 유배객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들의 마음을 여행객인 제가 전부 헤아릴 수는 없지만, 자신이 그토록 평범하게 누렸던 삶에 닿을 수 없는 고통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합니다. 원악도 제주, 그 이름에 담긴 그들의 상처가 아련하게 느껴지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