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못다한 이야기
2021년도 12월을 끝으로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연말인 지금 2021년에 관한 한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올해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이 누굴까요? 먼저 힌트를 드려보겠습니다. 첫째, 1821년 출생으로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았습니다. 둘째,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습니다. 셋째, 제주올레 12코스 종점인 용수포구에 이 사람의 표착기념관이 있습니다. 넷째, 한국 역사 최초로 신부가 된 사람이며,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입니다. 이쯤 되면 알아챈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바로 김대건 신부입니다.
아름다운 생이기정길을 지나 12코스의 종점 용수포구에 들어오면 보라색 콜라비 밭 너머로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과 배 모양을 본 따 만든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관이 나란히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니 관리인 한 명 없어서 무척 당황했지만, 그러려니하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입장료는 받지 않습니다만, 헌금은 받고 있고, 가톨릭 관련 물품들도 일층에서 팔고 있습니다. 또한, 밭의 콜라비도 팔아서 기념관의 운영비를 충당하는 듯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이곳의 시설을 이용하는 셈이기에 약간의 헌금을 내고 1층부터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1층에는 다양한 고문 기구들이 있었습니다. 서학이라는 서양의 학문의 개념으로 처음 들어온 가톨릭은 점차 학문을 넘어서 종교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윤지충이 1791년 어머니의 위패를 불태운 예가 있습니다. 위패를 불태웠다는 것은 성리학이라는 조선의 사상적 근간을 흔드는 행위였기에 이것은 바로 큰 반응을 불러왔고, 1791년 신해박해가 벌어지게 됩니다. 이미 이러한 행위로 조선 정부에게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대역죄인들로 낙인찍힌 가톨릭교도들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 가톨릭의 선교를 인정받고 가톨릭교도들의 신변안전을 보장받을 때까지 무수히 많은 박해에 시달려야했습니다. 고문 기구들은 박해 당할 당시 자주 사용되던 것이죠. 김대건 신부 또한, 박해 과정에서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 이제 가톨릭의 포교에 앞장서며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그의 짧지만 굵은 생애를 알아볼 시간입니다.
김대건 신부의 집안은 18세기 말부터 전부 가톨릭을 믿고 있었습니다. 증조부부터 조부, 부친에 이르기까지 가톨릭을 믿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증조부 김진후가 1814년 해미(지금의 충남 서산시 해미면) 옥중에서 순교하는 등 집안의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순교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21년 김대건은 충남 솔뫼(현재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김대건의 집안가톨릭을 믿는 집안으로 이미 정부가 알고 있는지라 계속 이사를 해야 했고, 1827년이 되어서야 교인들이 숨어서 모여 사는 경기 용인 골배마실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1836년 7월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유학생으로 발탁괴어 1836년 12월 3일 서울을 떠나 의주를 거쳐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합니다. 신학공부를 마친 후 1842년부터 1844년까지 만주를 거쳐 귀국을 시도하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렇게 만주에 머무르면서 1844년 12월에 부제 서품(敍品)을 받고, 1845년 1월 1일 의주를 통해 몰래 귀국에 성공하였습니다. 어렵사리 도착한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벌이다 1845년 4월 30일 서울에서 배(후에 라파엘호라 명명)을 구입한 후 조선 교우들과 함께 제물포에 출항해 같은 해 6월 상해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1845년 8월 17일 조선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습니다.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31일 라파엘호에 올라 조선으로 향합니다. 풍랑을 만나 20여일 표류 끝에 제주 용수리 해안에 도착합니다. 이후 서울로 올라가 포교활동을 하면서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나 결국 체포되어 1846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합니다.
김대건 신부는 위의 인생에서 나타난 것처럼 독실한 가톨릭교도였습니다. 또한, 그는 종교인을 넘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조정 대신들의 요구에 의해 옥중에서 영국의 세계지도를 번역하여 두 장의 세계지도를 만들고 지리 개설서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의 지식과 재능을 보고 조선 조정은 계속 그를 회유하였으나 결국 그는 그가 믿는 영원한 영광을 얻으러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조선인 최초의 신부를 넘어 선진적인 지식인이었던 그의 죽음은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저는 사실 위에서 말한 그의 인생에 대해 거룩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다만, 길지 않은 삶 전체를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실현하기 위해 바쳤다는 것이 무척 놀랍습니다. 목숨까지 내걸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무언가를 해내는 노력과 집념이 역사에 김대건이라는 이름을 길이 남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그가 죽음 이전에 옥중에서 계속했던 말은 그의 강고한 신념에 탄복하게 만듭니다.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 나의 소원이니,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이 같을 뿐이요, 때리고 죽여도 역시 이 같을 뿐이니 빨리 때려 죽여 달라.”
1845년 김대건이 용수포구에 도착하기 전 제주를 먼저 방문한 사람이 있습니다. 역사에 이름이 길이 남은 ‘황사영 백서사건’을 일으킨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입니다. 먼저 황사영 백서사건을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비롯한 많은 가톨릭교도들이 죽자 황사영이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 압박해야 한다는 내용을 적은 편지(백서)를 북경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보냈습니다. 편지는 주교에가 갔으나 이 사실은 들켜서 일당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고 천주교는 더욱 탄압되었습니다. 현재 이 백서는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남편이 대역죄인이 되고 처형된 후 가족들은 각기 다른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갓난아기였던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갓난아기를 포함한 가족들을 모두 섬으로 귀양 보낸 사실은 당시 가톨릭교도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무척 안 좋았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쨌든, 정난주는 추자도에 아들을 내려두고 제주도에 도착하여 1838년 죽을 때까지 제주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30년이 넘는 제주도 기간 동안 그녀가 쌓은 학식과 교양으로 주변 주민들을 헌신적으로 도와주어 주민들은 그녀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양 할망’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표착기념관에는 그녀가 사망한 소식을 아들인 황경한에게 전달하는 부고 편지의 사본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문득 이 편지를 받은 황경한의 마음이 어땠을지 궁금해졌습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받는 아들의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성지가 된 11코스 정난주의 묘와 이 편지를 보고, 18-1코스 추자도에서 그의 묘를 마주했을 때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좋은 날씨 잘 닦인 묘에서 배어나오는 쓸쓸함이란. 그의 인생에 쓸쓸함만 가득하지는 않았겠지만, 기억나지도 않는 어머니의 품을 생각하면 느껴지는 공허함은 그의 삶에서 떼놓을 수 없었겠지요. 추자도의 강한 바람만이 묘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세차게 불고 있었습니다.
1886년 위에서 말한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1899년 제주도에서도 본격적인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다만,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무수히 노력해왔던 많은 이들의 아름다운 노력은 이후 가톨릭교도들의 행동으로 인해 제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신축민란 혹은 신축교안이나 이재수의 난이라 불리는 1901년의 민란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이죠. 몇몇 가톨릭교도는 1899년 이후 관리들과 손을 잡고 민중을 수탈하기 시작합니다. 포교라는 이름아래 실시하는 수탈은 제주 민중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또한, 유일신만을 믿는 프랑스 신부들에게 제주의 1만8천신은 악마와 사탄 그 자체였습니다. 제주의 토속신들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신목과 신당들을 파괴하고 그 재료들로 성당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자연히 이런 악행은 제주민들의 분노를 불러왔고 신축민란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민란의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몇몇 가톨릭교도들도 있지만, 민란 자체의 원인 제공은 분명 개인의 욕심을 우선시하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여준 많은 가톨릭교도들에 있습니다. 표착기념관에도 이 신축민란의 원인이 가톨릭교도 측에 있음을 밝히는 글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이 과오를 가톨릭 측에서도 인지하며 반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앞의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결국 가톨릭은 제주도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7-1코스의 하논성당 터부터 시작해서 제주 곳곳에 있는 성당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요. 1만8천신이 정좌한 제주도에 자리 잡은 유일신교 가톨릭은 신앙의 자유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자유를 얻어낸 후 과오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과오를 반성하며 전의 독불장군과도 같은 태도를 버리고 공존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유롭게 하느님을 믿어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에서 다른 많은 이들과 공존하고 상호교류하는 가톨릭교도들의 모습을 보며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많은 가톨릭교도들은 아마 하늘에서 흐뭇하게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