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으며 제주를 읊고 제주를 느끼다, 제주시詩

제주올레 못다한 이야기

by baekja

제주는 무척 특이한 곳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육지와는 조금은 다른 역사를 가지고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또한, 조선이라는 국가의 이름아래 한 지역으로 자리 잡았음에도 출륙금지령 등의 조치로 육지와의 교류가 없어 이런 제주만의 특수한 것들이 원형대로 잘 남아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주에서 살면서 제주의 것들을 보고 읊은 시들은 무척 특이한 향이 납니다. 제주만의 향이 잔뜩 배어있죠. 이번 글에서 이런 제주의 향이 가득한 제주시詩를 전부 말할 수는 없으니 올레길을 걸으며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시들에 대해서 조금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6코스의 유일한 오름인 제지기오름을 내려오면 이제 올레꾼들의 발걸음은 보목포구에 닿습니다. 섶섬이 보이는 보목포구를 품고 있는 보목동은 유명한 한 제주시인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1937년 태어난 한기팔 시인은 제주시단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입니다.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시단에 나온 그는 『서귀포』, 『불을 지피며』, 『마라도』, 『말과 침묵 사이』 등의 시집을 냈고, <제주도문화상>, <제주문학상> 등을 탔습니다. 보목포구 주변에서는 그의 「자라물회」와 「甫木里(보목리) 사람들」의 시비가 있습니다. 「자라물회」는 자신의 고향 보목동의 모습을 정겹고 구수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甫木里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인 보목동에 대한 애향심이 짙게 드러나는 시입니다. 「甫木里 사람들」의 일부 구절을 보면서 보목동 사람들의 삶을 한 번 상상해보죠.


다만 눈으로만 살아가는

이웃들끼리

먼 바다의 물빛

하늘 한쪽의 푸른빛

키우며 키우며 마음의 燈(등)을 켜고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 태어나

한 번 사는 맛나게 사는 거

보려거든

이 나라의 남끝동

甫木里에 와서 보면 그걸 안다.


20210112_105358.jpg 보목동에서 찍은 섶섬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 안에서 맛나고 순박하게 사는 보목리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지나요? 7코스의 시작점 근처에 있는 칠십리시공원에서도 한기팔 시인의 「서귀포」라는 시를 볼 수 있습니다.


마당귀에

바람을 놓고


귤꽃

흐드러져

하얀 날


파도소리 들으며

긴 편지를 쓴다


20210112_114846.jpg 제주올레 6코스 서귀포 어딘가에서 바라본 바다


하얀 귤꽃이 핀 봄기운이 완연한 4월의 어느 날, 한 사람이 서귀포 앞바다가 보이는 집 마루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파도소리를 벗 삼아 마음속에 켜켜이 쌓아두었던 말을 꺼내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시가 있는 칠십리시공원은 12개의 시비와 3개의 노래비가 있는 아름다운 공원입니다. 절벽 위에서 천지연 폭포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죠. 올레길을 걷지 않더라도 서귀포 구시가지 근처에서 묵으신다면 아침 산책 겸 나와 이곳을 거닐어보기를 추천합니다. 예쁜 나무들과 풀들, 졸졸 흐르는 물과 아기자기한 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평화로운 공원의 풍경에 분명 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20210114_082647.jpg
20210114_082113.jpg
좌측은 칠십리시공원에서 바라본 천지연폭포 우측은 칠십리시공원


이곳에는 이생진, 박목월, 이동주, 박남수, 박재삼, 구상 등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제주를 노래한 멋진 시들이 적힌 시비들이 있지만, 제 눈길을 가장 끌었던 것은 서귀포시 중문동 출신의 김용길 시인의 시비였습니다. 바닥에 자그마하게 있는 시비에 적힌 시 구절 아래에는 작게 그린 서귀포 앞바다와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가 그려져 있어 단순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이 그림과 정말 잘 어울리는 시비에 적힌 김용길 시인의 작품은 『西歸浦(서귀포)에서 아침 맞이』입니다.


동해 끝 적시던 물소리

서귀포에 와서는

묵언(黙言) 중이다

서(西)으로 돌아 칠십 리 해안

바람으로 일어서는

섬 하나, 둘

아직도 부끄러운 등 푸른 속살

밤 새 돌아눕던 바다를 향해

새 하루 시작되는

애무의 눈길 보내면

서귀포와의 인연

발끝에 묶나니.


해가 뜨는 동해의 바닷물이 서귀포까지 닿아 잠시 숨을 고르며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 서귀포의 아침이 시작됩니다.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섬들의 잠을 깨우고, 해가 뜨며 밤새 검은 빛깔을 띠었던 바다가 이제 푸른 빛깔을 다시 띠기 시작합니다. 이 풍경을 사랑스런 눈빛으로 보고 있는 사람은 이제 서귀포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서귀포의 어느 한 아침을 그려낸 이 시를 읽으면서 칠십리시공원에서 맞는 서귀포의 아침을 제 기억 소중한 곳에 고이 담아두었습니다.


20210114_083129.jpg 서귀포에서 아침 맞이 시비


비양도가 보이는 14코스의 금능해수욕장 옆에는 금능리 마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금능해수욕장과 협재해수욕장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으려 발걸음을 재촉하던 도중 마을의 돌담에 작고 알록달록한 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시화를 마을 돌담에 붙여둔 것이었습니다. 이 시화들은 제주의 특별한 무엇을 담았다기보다 제주에서도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일상을 아이들의 순수한 언어와 정성스런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다음 이미지들을 보면서 제가 느꼈던 흐뭇함을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같이 느껴봤으면 합니다.


20210123_123722.jpg
20210123_123805.jpg
20210123_123814.jpg


시 「숨박꼭질」은 제목부터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느껴집니다. 또한, 술래가 다가올 때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을 무척 실감나게 잘 표현하고 있죠. 「알람시계」는 아침마다 들려오는 참새 울음소리를 알람시계에 표현한 것이 무척 재밌었습니다. 「금능바닷가」는 바다에서 놀면서 얻은 경험과 느낌을 매우 솔직한 언어로 읽는 이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분석 필요 없이 시화를 그저 보고 있기만 해도 엄청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모습이 상상되어 즐거움과 함께 따뜻함이 온몸에 스며듭니다.


16코스 수산봉을 지나면 물메 밭담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 밭담길의 특징은 길을 따라 무려 128개의 시비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본 시 중 제주와 관련된 시는 하나도 없었지만, 제주올레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시 두 가지를 골라봤습니다. 하나는 정재학 시인의 「微分(미분)-음악」이라는 시고, 다른 하나는 허형만 시인의 「눈부신 날」이라는 시입니다.


微分(미분)-음악


내가 미쳐있던 건

바람이 아니라 바람소리였으니

어디로든 가자

음표는 곳곳에 있지만

부딪치는 것만이 소리를 낸다



눈부신 날


참새 한 마리

햇살 부스러기 콕콕 쪼아대는

하 눈부신 날


바람소리를 음악으로 들으며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는 제주의 오솔길을 걸어가는 올레꾼의 즐거운 하루가 이 시 두 편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20210125_104905.jpg
20210125_105847.jpg
좌측은 微分(미분)-음악 시비, 우측은 눈부신 날 시비

시와 함께한 제주올레 여행 어땠나요? 즐거웠나요? 앞에서 본 다양한 시들이 여행객들이 제주를 더욱 깊이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제가 보여준 제주시詩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나 기행을 와서 쓴 시와 4·3사건을 표현한 시 등 더욱 입체적으로 제주를 보게 해주는 시부터 제주 사투리로 제주를 노래한 향토색 짙은 시들까지 무척 다양한 시들이 제주를 말하고 있지요. 제주 여행을 하면서 맘에 드는 제주시詩 하나를 찾아간다면 그 또한 성공한 여행이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혹시 제주시詩에 관심이 있다면 올레길에 있지는 않지만, 제주시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제주문학관에 방문하는 것도 추천합니다. 이제 제주의 향취가 담뿍 담긴 제주시詩와 헤어질 시간입니다. 제주시詩와 작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제주시인의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주의 언어로 제주의 삶과 자연을 노래한 김광협 시인의 시인데요. 돌하르방에게 제주를 지켜달라고 비는 간절한 마음이 드러난 「돌할으방 어디 감수광」입니다.


돌할으방 어디 감수광

돌할으방 어딜 감수광

어드레 어떵하ᆞ연 감수광

이레 갔닥 저레 갔닥

저레 갔닥 이레 갔닥

아명 아명 하ᆞ여봅써

이디도 기정 저디도 기정

저디도 바당 이디도 바당

바당드레 감수광 어드레 감수광

아무디도 가지 말앙

이 섬을 지켜줍써

제주섬을 사ᆞㄹ펴줍써

이 섬의 구신이 되어줍써

돌할으방 곱닥하ᆞ게 생경

큰 감튀도 써아지곡

나ᆞ갓은 박박 얽으곡

콘 무사 경 크곡

눈방울은 무사사 경 큼광

흘메긴 무사 경 사ᆞ갈친디

곱닥하ᆞ게도 잘 생겼쩌

든직하ᆞ곡 든직하ᆞㄴ 게

돌할으방이여 돌할으방이여

돌할으방만 믿엉 살암쩌

돌할으방 어딜 감수광

아무디도 가지 말앙

제주섬을 사ᆞㄹ펴줍써


*표준어 해석


돌하르방 어디 가시나요

돌하르방 어디를 가시나요

어디로 어째서 가시나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저리 갔다 이리 갔다

아무리 아무리 해보세요

여기도 벼랑 저기도 벼랑

저기도 바다 여기도 바다

바다로 가세요 어디로 가세요

아무데도 가지 말고

이 섬을 지켜주세요

제주섬을 살펴주세요

이 섬의 귀신이 되어주세요

돌하르방 곱다랗게 생겨

큰 모자도 써가지고

얼굴은 박박 얽고

코는 왜 그리 크고

눈망울은 왜 그리도 큰지

손목은 왜 그리도 굵은지

곱다랗게도 잘 생겼네

듬직하고 듬직한 것이

돌하르방이구나 돌하르방이구나

돌하르방만 믿고 사네

돌하르방 어디를 가시나요

아무데도 가지 말고

제주섬을 살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