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못다한 이야기
벌써 제주올레 관련 40번째 글이지 마지막 글입니다. 마지막 글로 뭘 쓸지 고민하다가 문득 제주올레에서 제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길에 대한 내용을 쓰지 않았음이 떠올랐습니다. 제주올레에서 가장 좋았던 길이 좋은 날씨와 친구들이 모두 함께한 우도의 올레길로 바로 하나를 꼽을 수 있다면 가장 아름다운 길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곳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산방산에서 송악산까지 이어지는 10코스의 사계리 형제해안도로고, 다른 하나는 12코스에서 백미로 꼽히는 엉알길에서 생이기정길까지의 길입니다.
형제해안도로의 시작은 산방산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산방산 아래에는 유원지처럼 되어 있어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지러움이 느껴지죠. 이 유원지 같은 곳을 재빨리 빠져나오면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한 사계리 마을을 지나게 됩니다. 마을을 지나 바닷가로 나가면 널찍한 바다와 함께 사계리 마을과 이어진 사계포구가 나타납니다. 이곳 사계포구는 제주의 전통 배 테우를 이용해 조선시대 관내 도요지에서 만든 토기를 운반하던 항구였다고 합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정겨운 사계포구를 빠져나오면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길 100선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등장하고, 그 뒤 부터는 형제해안도로의 본격적인 하이라이트입니다.
이 아름다운 길이 형제해안도로라고 이름 붙은 이유는 사계포구를 나온 후부터 계속 바다에서 보이는 섬 때문입니다. 이 섬은 바다 한가운데 바위처럼 보이는 크고 작은 섬 2개가 사람의 형과 아우처럼 마주보고 있다 하여 형제섬이라고 불립니다. 끝없는 수평선만 있는 풍경이었으면 무척 심심했겠지만, 형제섬이라는 변주가 아름답지만, 지루할 수 있는 풍경에 새로움을 더합니다. 구름과 하늘, 현무암과 모래, 잔디가 뒤섞인 해안도로를 걷다보면 어느새 마음에는 여유가 생기고 발걸음은 느긋해지며 콧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바람과 함께 길을 즐기다보면 제주 사람발자국과 동물발자국 화석 산지(천연기념물 제464호)를 만나게 됩니다.
도내 지구과학 교사인 강지현 선생님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곳은 수많은 사람발자국 화석과 함께 조류, 우제류 등의 다양한 동물발자국 화석과 새의 깃털, 연체동물, 절지동물 및 식물화석이 있는 곳입니다. 바다의 침식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수도 있다는 이곳은 울타리에 의해 막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습니다. 멀리서 흙과 현무암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저쯤에 화석이 있겠지.’라고 추측해 볼 뿐이죠. 이토록 아름다운 길을 보고 옛날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고민하다보면 송악산의 해안진지동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은 길이 인간의 어리석음이 가득한 역사를 담은 길로 이어지며 사계리 형제해안도로에서의 짧은 산책은 끝이 납니다.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수월봉(천연기념물 제513호)의 일부인 엉알길은 강력한 수성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화산체가 풍화로 인해 깎여서 드러난 화산쇄설층입니다. 이 화산쇄설층이 바다로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있어 큰 바위, 낭떠러지 아래라는 뜻의 엉알이 길 이름으로 붙었죠. 수월봉의 정상을 내려와 엉알길로 들어서는 순간 신세계가 펼쳐집니다. 오른쪽에서는 우아하고 화려한 곡선들이 쌓여 만들어진 지층이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고 왼쪽에서는 현무암해안과 짙은 파란색의 바다와 그 무엇보다 맑은 파란색의 하늘이 어우러져 청량함을 제 마음 안으로 가져다줍니다. 갖가지 퇴적물이 오묘한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며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냄과 동시에 바다와 하늘은 제 가슴을 뻥 뚫는 시원함을 느끼게 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엉알길만의 맛과 분위기가 여행객을 사로잡습니다.
꿈과도 같았던 엉알길이 끝나고 자구내포구에서 말린 한치를 구경하며 사람냄새를 맡고나면 이제 당산봉을 오를 차례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당산봉연대 터를 지나면 다시 한 번 더 꿈을 꿀 차례입니다.
방금 지나온 자구내포구와 함께 엉알길부터 따라온 차귀도가 드라마틱하게 등장하는 생이기정길의 첫 장면은 말 그대로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주변의 나무들과 풀들은 액자가 되고 하얀 구름 가득한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 그리고 차귀도는 한 폭의 풍경화가 됩니다. 새가 다니는 절벽길이라는 뜻을 가진 생이기정길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듣고 있자면, 이 좋은 풍경을 너희 새들만 보고 있었냐고 원망 아닌 원망을 절로 하게 됩니다. 차귀도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얼마간 걷다보면 이제 저 멀리서 용수포구가 바다와 하늘을 끼고 인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마저도 현실감이 없어 이제는 마치 거대한 미술관 안에 와있는 느낌이 듭니다. 4개의 벽면을 모네의 수련이 둘러싸고 있다는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 내의 전시실이 이런 느낌일까요? 아니, 생각해보니 나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명화인 이곳이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미술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장하나 없이 매순간을 감탄하며 굽이길을 내려오면 포장도로와 함께 용수포구가 보이고 생이기정길에서의 한바탕 꿈이 막을 내립니다.
날씨가 좋은 날 제주올레의 몇 코스만 골라 걷고 싶을 때 앞에서 말한 저 두 개의 길이 포함한 10코스와 12코스를 추천합니다. 둘 중에서 꼭 하나만 골라달라고 한다면 아마 이렇게 말을 할 것 같습니다.
“역사와 인문에 관심이 높은 사람이라면 송악산에서 섯알오름을 거쳐 알뜨르 비행장까지 이어지는 타크투어리즘과 하멜표착기념관, 모슬포 강병대 유적을 관람하면서 사계리 형제해안도로를 볼 수 있는 10코스를 추천하고, 오로지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고 싶다면 무릉외갓집의 밭길부터 시작해 신도리 해안도로를 거쳐 엉알길, 생이기정길을 맛볼 수 있는 12코스를 추천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길로 두 곳을 추천했지만, 이건 제 주관적인 의견이고, 각 코스마다 가진 아름다움이 있으니 제주도에 방문한다면 꼭 시간을 내서 올레길을 걸어보기를 권합니다. 제주올레 26코스, 425km 어디를 걷든 매순간순간이 새로움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짤막한 후기
제주올레에 관한 글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제주올레완주기라는 이름을 달고 썼으며 브런치북 <섬을 느끼고 길에 정들다>에 속한 30편과 이 30편에도 다 담지 못해 더 써낸 제주올레 못다한 이야기 10편을 합쳐 총 40편의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제 부족한 글솜씨에도 끝까지 제 글을 읽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 말고는 해드릴 게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올해 10월 처음 브런치를 시작하고 제주올레에 관한 글을 써 나가면서 무척 걱정이 많았는데 제 글을 꾸준히 읽어주신 여러분들이 있어서 어떻게든 제주올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거의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가끔 생각나는 대로 글을 올리다가 다른 여행기를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