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완주 후 일 년이 지나고

by baekja

제주올레를 완주하고 일 년이 지났습니다. 완주기를 다 쓴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기억속의 추억으로만 가슴 속에 묻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제주올레 완주를 조금이라도 함께했던 친구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그 사진은 일 년 전 세화리 앞바다에서 한 친구가 일 년 후의 자신에게 ‘카페공작소’라는 카페에서 보낸 편지였습니다. 정말로 일 년이 지나 편지가 일 년 전의 자신에게서 지금의 자신에게로 전달된 것이죠.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진짜로 배송되어온 편지에 신기해하고, 올레 완주를 한지 벌써 일 년이 지났다는 생각이 들어 세월의 무상함에 슬픔을 느끼고, 아련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웃음이 절로 지어지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렇게 고생해서 완주를 해놓고 제 삶에서 무엇이 바뀌었는지는 전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완주 후 일 년 올레 완주로 무엇이 바뀌었는지 천천히 되돌아보기로 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작년 연말에 사단법인 제주올레에서 편지를 보내주었다는 것입니다. 올레 완주자에게 완주에 대해 축하한 후 후원을 요청하는 편지였습니다. 편지와 함께 제주올레가 한 일들을 담아놓은 홍보지와 후원 신청서가 함께 담겨있었습니다. 제주올레에서 어떤 경제적인 이득은 얻지 못했지만, 경제적인 가치로는 다 측정할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을 느끼고 다시는 보지 못할 풍경들을 보았기에 후원을 정말 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대학생의 빈 통장을 보니 기부를 할 마음이 사라지더군요. 취직을 하면 일단 제주올레에 후원부터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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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많은 추억을 제주올레에서 쌓았다보니 종종 아무 이유 없이 제주올레 사이트에 들어가 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제주올레의 9코스가 바뀌었다는 공지를 보며 코스에서 박수기정과 월라봉이 사라지고 군산오름이 들어간 것을 보며 새로 가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박수기정과 월라봉을 미리 보아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월라봉과 박수기정이 들어간 9코스는 가장 길이 짧아 시간은 적게 걸렸지만, 무척 난이도가 높았던 길이었던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 A의 기억에도 강렬히 남아 있었습니다. 친구 A에게 9코스가 바뀌었다고 말해주니 놀라면서 제주올레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추억들을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무릎을 다친 것, 눈이 무척 많이 내린 것, 추자도 가는 배에서 멀미를 심하게 한 것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무척 즐겁더군요. 요즘 바쁜 일상을 사는 친구와 저에게 잠시나마 행복한 과거를 보여주어 웃음을 짓게 한 추억팔이였습니다.

제주에 관련된 것들을 보면 반가움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창경궁 대온실에서 제주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을 마주했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7코스의 종점(월평 아왜낭목 쉼터)에 이름으로만 남아있고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왜나무를 보았을 때는 ‘이게 아왜나무의 실물이구나!’하고 감탄했고, 제주 먼나무를 보았을 때는 산수유와 착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살며시 미소 짓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제주와 관련된 뉴스나 신문 기사를 발견할 때면 열심히 읽어보았고, 글을 쓰기 위해 무형문화재관련 내용을 찾아보다 제주의 문화와 관련된 무형문화재가 나올 때면 당장 글에 필요하지는 않더라도 굳이 책을 펼쳐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KakaoTalk_20220206_183849140.jpg 창경궁 대온실의 아왜나무


굳이 제주와 관련된 것들을 보지 않아도 아무 생각 없이 일상생활을 하다가 제주올레의 이런저런 것들이 때로는 아련하게, 때로는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1코스의 성산일출봉을 향해 다가오던 비구름, 2코스 혼인지의 고드름, 3코스의 통오름과 독자봉에 가득 쌓인 눈, 4코스 토산초등학교의 틀린 영어철자, 5코스 위미리의 동백나무 군락지, 6코스의 정방폭포, 7코스의 일강정바당올레 등 하나하나가 빼놓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고되고 힘든 일상에서도 그런 추억 하나하나가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만들고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힘이 되어줍니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솔직히 무엇이 변한 것 같습니다. 완주 후 일 년이 지나고 친구들도 큰 변화를 겪지는 않았습니다. 치과 의사로 진로가 정해진 친구 A를 제외하고 불안에 떨던 나머지 3명은 여전히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채로 그저 시간이 재촉하는 대로 발길을 옮기고 있을 뿐입니다. 완주한다고 크게 삶의 무언가가 변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기대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보니 조금은 그런 극적인 삶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 년이 지나고 극적인 삶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남지 않았습니다. 실망만이 남은 것도 아닙니다.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제주올레 완주 후의 외적인 변화도 없고, 마음속으로는 일말의 기대도 실망도 남지 않았습니다.


제주올레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제게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않았지만, 무척 중요한 한 가지를 남겨주었습니다. 바로 추억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웃음이 나게 하는 그런 추억, 잿빛 가득한 반복되는 일상과는 다른 색감 가득하고 빛이 쏟아지는 한 점의 거대한 풍경화 같은 추억을 남겨주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든, 택배 상하차를 하든,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든, 직장에 취직해서 일을 하든, 저는 살아나갈 겁니다. 그리고 삶이 힘들어 지쳐 쓰러지고 싶을 때 제주올레에서 쌓았던 단 한 점의 커다란 풍경화가 제게 조그만 버팀목이 되어줄 것입니다. 앞으로 제주올레 완주를 한 지 이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고, 십년이 지나도 제 삶은 크게 변하지 않겠지만, 늘 제 가슴속에 따뜻함을 전해주는 추억으로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제게 조금씩 힘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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