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좋아하시나요? 저는 사실 재즈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뭔가 색소폰과 트롬본이 자유롭게 어우러진 곡을 재즈로 알고 있을 뿐이죠. 얼마 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오산시 재즈 페스티벌에 갔습니다. 곡이 어떻고를 떠나서 현재 상황 때문에 간만에 공연 기회를 잡은 연주자들과 오산천 산책 중에 마주친 괜찮은 공연에 발길을 붙들린 오산시민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매우 좋았습니다. 마지막 색소폰 연주자가 노을빛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애드리브를 하는 모습이 아직도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영화 <소울>은 이런 재즈를 삶의 의미로 삼은 한 남자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죽기 전 그는 정규직 교사에 취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음과 동시에 한 콰르텟의 정식 멤버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삶의 의미를 재즈에 둔 그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콰르텟에 들어가지만, 맨홀에 빠져 죽어 사후세계로 가게 됩니다. 얼마 전 친구가 취한 채 전화를 걸어 물은 적이 있습니다. “네가 원하는 대학원과 로스쿨 합격 둘 중에 하나를 합격할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래?” 저는 깔끔하게 원하는 대학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친구는 놀라더군요. 놀랄만 합니다. 안정된 직장, 좋은 경제력이 거의 보장되다시피 한 로스쿨보다 인문대 대학원을 택하다니. 제가 생각해도 현재 시기에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뭐 적당히 말하자면 주인공처럼 삶의 의미가 인문학에 있다고 말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죽은 주인공은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이리저리 빠져나가 태어나기 전 영혼의 멘토로 발탁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되기 싫은 22번 영혼의 지구 통행증을 얻어서 다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다 실수로 고양이의 몸을 통해 다시 지구로 복귀하지요. 그의 열정에는 매우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은 정해진 법칙 같은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대신 죽어줄 수 없지요. 그런 절대 불변의 무언가에 대항하여 자신의 열정을 다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모습에서는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그 이질감의 바탕에는 그의 몸으로 들어간 22번 영혼의 행동이 있습니다. 그는 삶을 처음 사는 존재입니다. 피자의 맛, 지하철 버스킹의 음악, 공기의 촉감, 단풍나무 씨앗이 떨어지는 장면까지 모두 그에게는 의미 있지요. 재즈를 앞에 두고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주인공과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결국 이런 이질감은 22호 영혼과 주인공의 갈등으로 극대화되고 붙잡혀 돌아온 사후세계에서 22호 영혼은 삶의 의미를 찾고 지구 통행증을 얻지만, 정작 공연에 나가지 못한 주인공은 화를 냅니다. 그에 22호 영혼은 지구 통행증을 던지고 도망가지요. 떨어진 지구 통행증을 들고 공연에서 연주를 멋지게 해낸 주인공은 왠지 모를 허무함에 콰르텟의 리더에게 이 기분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리더는 이렇게 말하지요. “어린 물고기가 어른 물고기에게 바다가 어디냐고 질문을 던졌어. 어른 물고기는 여기가 바다라고 답하지. 처음부터 끝까지 바다였으니까. 하지만, 어린 물고기는 이해하지 못해. 당신이 말한 것은 그런 거야. 내일 보자고.” 인생은 재즈라며 재즈 연주자가 되는 것을 평생 기대해왔던 주인공은 아마 오늘이 삶이 바뀌는 기점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재즈 연주자가 된 것 말고는 변한 것 없는 평범함 그 자체였지요. 그리고 평범한 일상에서 눈을 빛냈던 22호 영혼을 찾으러 갑니다.
주인공이 떠난 후 괴물로 변한 22호 영혼을 원래대로 돌려 지구로 다시 가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단풍나무 씨앗이었습니다. 정말 별 것 아닌 무엇이죠. 찰나 그저 아름답다고 느꼈을 무엇입니다. 거창한 삶의 의미라고 하기에는 조금 김이 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2호 영혼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22호 영혼을 담당했던 수많은 멘토들은 정의, 도덕, 이상, 꿈과 같은 무수한 보편적인 삶의 의미를 말하며 22호 영혼을 설득했습니다. 이런 멘토들에 대해 절대자의 위치인 ‘제리’가 한 말이 매우 기억에 남습니다. 지구로 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같은 거창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었죠.
멘토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떠한 개인에게도 주어진 보편적인 진리나 이상 따위는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삶에서 조금씩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가며 나아가면 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불안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평생에 걸쳐 추구할 진리가 하나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러지는 못합니다. 그저 살아가라고 던져졌으니 삶을 일단 살아보는 것이지요. 그런 삶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휩싸여 외부에 이리저리 휘둘리고는 합니다. 솔직히 휘둘리지 않으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초인이 아니기에 외부의 공격에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니까요. 그럼에도 삶의 작은 것에 즐거움을 찾아나가다 보면 삶이 조금은 즐겁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치 제가 재즈 페스티발의 한 장면이나 횡단보도 위에서 바라보는 도로 위의 풍경에서 즐거움이나 아름다움을 찾는 것처럼요.
인생은 무엇일까요? 주인공은 여전히 인생은 재즈다라고 말할 듯합니다. 하지만, 분명 22호 영혼과 만나기 전에 강박에 빠진 분위기의 답변보다는 여유 있는 분위기의 답변이 될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은 무엇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개인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인생철학이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정의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굳이 정의내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내가 지금 하는 모든 것이 인생이니까요. 굳이 의미를 정해서 길을 택하지 않아도 뒤로 돌아갈 수도 있고 옆으로 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오히려 인생이라는 그 모든 순간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기억에 남기려는 시도가 거창한 삶의 의미를 좇는 것보다 의미 있을지 모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두의 일상이 하루하루 즐겁지는 못해도 절망적이지는 않기를 바라며 평범하지만, 하루에 한 번쯤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나날들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