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종교심리학 과목 기말고사를 봤습니다. 별로 관심도 없는 심리학을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듣는 통에 뭘 배웠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당연히 시험은 망했죠. 하하. 어제 공부를 하기가 너무 싫어 본 유튜브 영상에서 한 벤처기업의 CEO가 나왔습니다. 아이들을 앞에두고 자신의 기업에 대해 설명하는데 지루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무척 재밌었습니다. 그저 흐뭇하게 보며 웃고 있던 저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 CEO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저런 발표로 자신의 삶과 회사가 좋다는 증명을 하기위해 썼을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나는 내일 시험을 비롯해서 취직까지 삶의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을 얼마나 증명해야할까?
영화 <살다>에서는 노년의 남성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이름은 와타나베. 그는 아내를 일찍 여의고 평생을 공무원으로 일 해온 사람입니다. 늘 똑같은 모습으로 서류에 도장을 찍는 그의 삶을 증명해주는 것은 잘 자란 아들입니다. 직장에 다니며 아름다운 아내까지 있는 남부럽지 않은 아들은 자신의 삶 전체를 쏟아 부어 길러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지루하지만, 평범하게 죽었을지 모를 그가 바뀌게 된 것은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이후입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절망에 빠진 그가 삶을 뒤돌아보자 자신을 어려워하는 부쩍 커버린 아들과 매일 도장 찍는 일만 반복하는 공무원의 지루한 삶만 남아있었죠. 그의 삶은 남들에게는 ‘평범하고 성실한 공무원’으로 증명되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 그 무엇으로도 증명되지 못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삶의 의미를 고민하기 시작한 그는 처음에는 물질적 쾌락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이후 공무원을 관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나는 부하 직원에게서 강렬한 생명의 힘을 느낀 후 각성하여 그동안 미뤄두었던 마을 주민들의 중요한 민원을 죽기 직전까지 열정적으로 해결합니다. 그의 강렬한 열정은 이 일에 관련된 사람들을 설득하고, 마음을 움직이는데 성공했지만, 하루아침에 변한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조롱하는 소재가 됩니다. 이 상황을 보다 못한 직원이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냐고 물어보죠. 그리고 그가 대답합니다.
“난 남을 원망하고 있을 수 없어 나한텐 그럴 시간이 없네.”
예기치 못한 죽음이 눈앞에 닥쳐온 순간 우리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믿지도 않았던 신을 찾아 원망할지 모르고, 아니면 건강을 챙기지 못한 자기 자신을 원망할지도 모르죠. 혹은 자신이 생각하는 죽음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는 이를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인공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 자신에게 증명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이 시대의 많은 20대들도 그렇습니다. 원망하고 있을 시간이 없죠. 다만, 자신의 삶을 남에게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이 와타나베와의 차이점입니다. 이력서에 적히는 한 줄 한 줄은 그들이 살아온 삶의 증명입니다. 900은 당연히 넘어야 하는 토익 점수, 다양한 봉사활동, 빛나는 공모전 수상 경력, 실무에 필요한 화려한 자격증들까지. 이력서로 자신의 삶이 회사에게 첫 번째 증명을 받게 되면 몇 분의 시간에 자신의 삶을 녹여내는 면접장에서 두 번째 증명을 받게 됩니다. 자신의 삶이 인정받아 회사에 들어가도 승진을 위한 끝없는 삶의 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이 상황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근데 이력서 몇 줄과 면접 때 말하는 몇 마디, 승진을 위한 업무 실력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력서 한 줄을 만들고 면접장에서 몇 마디를 만들며, 효율적인 업무를 하기 위해 해온 끝없는 노력들은 전부 증명되지 않습니다. 업무 외에서 볼 수 있는 삶의 모습 또한 이력서, 면접장, 회사에서는 아니,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와타나베의 삶도 사회에서 증명 받지 못합니다. 그가 발품을 팔아 만들어낸 공원은 부시장의 공로로 돌아가고, 그가 보여주었던 헌신적인 공무원의 모습은 부하직원 어느 누구에게도 이어지지 않죠. 와타나베는 죽었고, 그의 생전 마지막 활동은 사회에 조그만 변화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기 직전 웃고 있습니다. 그네를 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웃고 있죠. 눈 내리는 놀이터에서 순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자신이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는 증명 그 자체입니다.
앞에서 말한 20대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도전을 계속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회에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끝없이 실패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은 좌절합니다. 좌절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확신을 잃습니다. 자신의 삶을 남에게 증명하려다 자신에게도 증명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깊은 공허함과 함께 내 자신이 없어져 버린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직 육체는 죽지 않았지만, 정신은 죽은 상태가 된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좋은 학점을 받고 싶고, 취직하고 싶고, 안정된 삶을 누리며 사회에 인정받고 싶습니다. 제 삶이 훌륭하다고 사회에게 증명을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요즘 계속된 실패로 인해 그런 욕망만 강해지고 제 삶에 대해 자기 자신마저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 싫지만, 당장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제 앞에 주어진 공부를 하나씩 해나간다고 흔히 생각하는 밝은 미래와 좋은 삶을 얻을 수 있을지 전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끝없는 좌절만이 느껴집니다. 가끔은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답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 저는 그저 간절히 바라 봅니다. 와타나베처럼 삶의 끝에서 웃으며 내가 나의 삶을 인정하고 좋았다고 증명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