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듣는 교양 중에 서양 음악의 역사와 감상이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음악부터 중세음악을 거쳐 르네상스를 넘어 중간고사가 다 끝나고 나서야 간신히 바로크 음악에 들어섰습니다. 몇 천 년을 거쳐서야 제가 아는 작곡가와 음악들이 나오더군요. 제 교양의 부족함에 안타까움이 컸습니다. 바로크를 넘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들어봤을 법한 고전주의 작곡가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에 가장 유명한 세 작곡가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중 가장 먼저 하이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하면 여러분은 어떤 곡이 생각나시나요? 저는 보통 <놀람>과 <고별> 교향곡을 뽑습니다. <놀람>은 자주 들어봐서 멜로디를 기억하지만, <고별>은 멜로디보다는 곡에 관련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궁에서 니콜라우스 1세의 궁정 음악단장으로 일하고 있던 하이든은 단원들의 불만을 접수하게 됩니다.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니콜라우스 1세 탓에 휴가를 가지 못하여 가족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는 불만이었지요. 매주 작곡을 해야 했던 하이든 또한, 이런 힘든 일상을 잘 알고 있었겠죠. 그래서 이런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곡을 하나 쓰게 됩니다. 그것이 <고별>이지요. <고별>은 생각보다 매우 직관적으로 이런 궁정 음악단원들의 바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악장이 되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하나씩 빠져 나가며 마지막에는 바이올린 두 명만 남고 그 둘마저 떠나며 곡이 막을 내립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는 하이든의 참신함에 감탄했지만, 다시 들어보니 문득 다른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만약 니콜라우스 1세였다면 곡에 담긴 저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었을까? 아마 정말 참신하다고 생각만 하고 넘겨버릴 것 같았습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교수님의 설명 하나가 제 귀에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이후에 그 어떤 후원자도 니콜라우스 1세만큼 하이든의 음악을 좋아하고 잘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제야 마지막 남은 퍼즐의 한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이든의 음악을 사랑했고 그만큼의 이해도가 있었기에 <고별>이라는 곡에 숨겨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죠. 또한, 하이든도 니콜라우스 1세가 이 곡을 이해할 거라 믿었기 때문에 이런 곡을 쓸 수 있었을 겁니다. 참으로 깊은 신뢰가 느껴지는 유대 관계이죠. 분명 둘은 음악에 있어서는 고용주와 고용인을 넘어 친구 관계 같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중국의 고사성어에는 이와 비슷한 예로 ‘지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와 그의 친구 종자기의 이야기이지요. 백아가 산을 생각하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바로 음악에서 산이 보인다고 하였고, 백아가 강을 생각하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바로 음악에서 강이 보인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렇게 백아의 깊게 이해하는 자가 종자기 밖에 없었기에 후에 종자기의 사망 후 백아는 거문고 현을 다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의 마음을 담은 음악을 바로 이해할 정도로 가까운 유대 관계를 유지하는 이상적인 친구 관계를 일컬어 ‘지음’이라고 하게 된 것이지요. 아마 하이든과 니콜라우스 1세의 <고별>교향곡에 관한 이야기는 서양판 지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친구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바로 그 친구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지음은 솔직히 정말 쉽지 않아 보입니다. 지금 제 옆에서 거의 대학 생활 내내 붙어 있던 친구가 기타를 연주한다고 해도 그의 음악을 듣고 제가 그의 마음을 추측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한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러한 면에선 지음이라는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말보다는 예전에 알쓸신잡에서 유시민이 한 말이 더욱 어울릴 것 같습니다.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좋은 관계이다.’ 이 말처럼 각자 사람이 다 다른데 어떻게 다 이해를 할까요? 그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제가 얼마나 친구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제 주변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독특하디 독특한 저를 이해하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듯합니다. 분명 ‘지음’ 같은 완벽한 관계는 아니더라도 제가 인간관계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행복이겠지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곁에도 당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