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기행-고산 윤선도 유적지2
녹우당을 빠져나와 유물 전시관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들어가니 손 소독제와 이름 쓰는 칸이 있더군요. 여기서도 코로나는 빗겨나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유물 전시관을 설명하기에 앞서 해남 윤씨 가문의 내력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원래 해남 주변의 땅은 대부분 해남 정씨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딸과 아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땅을 나누어 주었기에 한 개인의 가문이 부를 쌓기는 힘들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데릴사위로 넘어온 해남 윤씨 어초은 윤효정이 장자 상속제를 확립함으로써 해남 윤씨는 부를 쌓게 됩니다. 어초은 윤효정부터 쌓아진 부는 해남 윤씨 가문을 부강하게 만들었고 이는 문화적 소양의 발전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고전 시가의 대부인 고산 윤선도, 조선회화의 삼재 중 한 명인 공재 윤두서, 그 뒤를 잇는 풍속화가인 윤덕희와 윤용, 그리고 윤두서를 외조부로 둔 다산 정약용까지 조선 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1층의 특별전시실에서는 윤두서와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의 풍속화 복제본이 걸려 있습니다. 윤두서의 시대는 본격적으로 풍속화가 시작되는 영・정조 시대의 전인 숙종 시대였습니다. 그때 이미 풍속화를 주력으로 그렸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나라 풍속화의 선구자라 할 수 있겠죠. 선구자라는 단어는 그저 처음 해냈다는 의미를 넘어서 그 양식에 일가견이 있어 그 양식의 길을 열었다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윤두서의 풍속화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석공공석도>였습니다. 석공이 큰 돌에서 돌을 떼어내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망치를 들어때리는 역동적인 동작과 돌에 못을 대주고 있는 앞사람의 무서워하는 표정이 인상적인 그림이지요. 그 외에도 <짚신삼기>, <나물 캐는 여인>등 다양한 풍속화들 속에서 윤두서가 얼마나 민초들의 생활에 관심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제본 중 가장 인상 깊은 그림은 <협롱채춘도>였습니다. 윤두서의 손자인 윤용의 그림으로 나물 캐는 여인 한 명이 잠시 일어서서 뒤를 돌아보는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배경에는 풀 몇 포기만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여백의 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뒤돌아보고 있는 그 시선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죠. 하지만, 뒤돌아보고 있는 그 모습에는 노동 중의 잠깐의 휴식에서 나오는 고단함이 짙게 묻어 있습니다. 가끔 열심히 일하다가 시선을 돌려 먼 산을 바라보는 어쩌면 우리의 일상일지 모르는 모습의 여백의 배경에는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느낌까지 더해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매우 맘에 들어 어디에 진품이 있는지를 찾아보았는데 간송문화재단 소장이더군요. 보자마자 ‘아’하고 탄성을 내지르며 과연 ‘간송’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하로 내려 가보니 윤두서의 자화상을 도장으로 만들어 가져갈 수 있게 한 것이 있더군요. 도장을 찍으며 즐거워하며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복도에는 녹우당의 사진을 전시해 놓았는데 건축적인 것은 잘 모르겠고 ‘ㅁ’자로 둘러싼 집 안에 있는 중정과 강렬한 햇볕을 막기 위해 만든 이중 처마가 인상적이더군요. 들어가 보지 못해 아쉬웠던 녹우당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1전시실에서는 해남 윤씨 가문과 녹우당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해남 윤씨 족보, 보물로 지정된 노비 문서, 고산선생자녀분재기(윤선도의 재산을 나누어 놓은 문서), 고산 윤선도나 공재 윤두서의 글을 모아 놓은 것까지 다양하게 있었습니다. 이걸 관리하고 전시까지 훌륭하게 해낸 해남 윤씨 가문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더군요. 이수광의 <지봉유설> 또한 있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이 책이 아직도 있는 이유는 공재 윤두서부터 다산 정약용까지 이어지는 실학 정신이 가문에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전시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유물은 녹우당 현판이었습니다. 성호 이익의 양아버지이자 동국진체를 개발한 옥동 이서의 글씨로 개성이 한눈에 확 들어오는 인상적인 글씨였습니다.
1전시실에는 이러한 문화재 말고도 가문의 이야기들이 다수 쓰여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제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은 윤효정과 윤선도, 윤두서가 백성들을 위해 한 일들이었습니다. 세금을 내지 못해 옥에 갇힌 백성들을 대신 돈을 주고 풀어주어 삼개옥문(三開獄門)이라는 별명이 붙은 윤효정, 경기도 양주에 거주할 때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소를 대신해서 써주었던 윤선도, 어렸을 때는 빚을 받으러 갔다가 백성들의 가난한 모습을 보고 채권을 찢어버리고 커서는 나무를 벌채하고 소금을 굽는 법을 널리 알려 일자리를 찾게 한 윤두서까지. 이런 이야기들은 이 가문이 위세만 대단한 가문이 아닌 문화적 소양을 갖춘 가문이 된 기반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상이 밑에 깔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남 윤씨 가문의 모습을 마음속에 새기며 2전시실로 가자 공재 윤두서와 관련된 유물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그의 대단한 필력으로 그려낸 그림들보다 놀라운 건 그가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별자리 지도인 <방성도>와 산학서인 <송양휘산법>등 많은 학문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지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뛰어난 그림 실력을 바탕으로 지도를 제작했는데 이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원래 <일본여도>, <동국여지지도>, <일본여도> 이렇게 세 가지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전하는 것은 <일본여도>와 <동국여지지도>입니다. 두 지도 모두 현재의 지도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며 <일본여도>에는 각 지방의 유력가문 이름 또한 적혀 있습니다. 혼슈, 시코쿠, 큐슈는 그려져 있는데 홋카이도는 제외한 일본 지도가 되게 신기하더군요. 홋카이도가 일본으로 편입된지 얼마 안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주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림에 관한 문화재가 주를 이루는데요. 당대의 화가들을 윤두서가 평한 <기졸>이나 중국의 명화들을 모아 놓은 <고씨화보> 등이 있었습니다. 지금에야 윤두서를 풍속화의 선구자로 칭하지만, 당대에는 용 그림과 말 그림에 매우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평해졌다고 합니다. 부채에 그려진 <운룡도>의 활기 넘치는 용의 모습은 그 재능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하백마도>에서는 말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말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가 주변 풍경에 대한 관찰을 얼마나 유심히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관찰이 바탕이 되었기에 풍속화를 그릴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윤두서의 작품을 천천히 관람하다 보면 이 유물 전시관의 하이라이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만나게 됩니다. 국보 제240호로 미술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자화상은 서양으로 말하자면, 렘브란트나 뒤러의 자화상에 맞먹는 한국 미술사 최고의 자화상이라고 감히 평할 수 있겠습니다. 이 그림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명불허전’, 저로서는 이 작품 하나를 보러 해남을 왔다고 후회하지 않을 그러한 명작이었습니다. 자화상에 느껴지는 결기 있고 형형한 눈빛, 터럭 하나하나 세필로 세밀하게 그려낸 디테일, 몸체의 과감한 생략을 통해 얼굴의 분위기에 집중시키는 구도까지. 당대에도 명품이라 칭송받았던 이 명작은 몇백 년을 뛰어넘어 저에게도 강렬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서 베풀고 그들의 삶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으며 실학을 연구하기도 했던 그의 삶에서 느껴지는 의지가 그림 한 장에 모두 담겨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눈과 발을 이 그림 앞에서 뗄 수가 없더군요.
그렇게 몇 분 동안을 자화상과 눈싸움을 하다가 다음 작품으로 눈을 돌릴 수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아들 윤덕희와 손자 윤용의 작품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 다 한국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을 그린 화가들임에는 분명했으나 공재 윤두서의 그림을 보고 나서여서 그런지 매우 인상 깊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작품이 제 눈길을 끌더군요. 윤용의 <미인도>였습니다. 복장의 화려함과 구도의 절묘함이 묻어나는 이 그림에서는 단아함보다는 색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나오는 그 은은한 품격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와는 다른 눈에 확 들어오는 화려함을 이용해 그려낸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인도>를 보고 나니 특별전시실에서 본 몇몇 풍속화의 진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확실히 진품이 낫더군요. 3대에 걸친 화가 가문의 풍속화들을 마음에 새기고 유물 전시관 밖으로 나왔습니다.
원래 옆에는 윤선도 관련 문화재를 전시해 놓았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막아놓았더군요. 다 볼 수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유물 전시관을 다 보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 땅끝 순례 문학관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이곳에 문학관을 세운 이유를 당최 알 수가 없었지만, 아마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를 쓴 윤선도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단정하며 문학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다시 깨달으며 저의 공부가 미진함을 몇 번이고 부끄러워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