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내릴 것 같지 않았던 역에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내렸습니다. 주변에 민가들이 제법 있었으니 아마 이곳에 사시는 분들이 다른 지역을 갔다가 내린 것이겠죠. 내리자마자 익숙하게 제 갈 길을 가는 다른 분들과는 달리 우리는 역에서 내려 두리번거리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여행객이라는 티를 무척 냈습니다. 조용하고 아담한 역의 풍경을 떠올려보면 분명히 저와 친구들은 그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사람들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행의 들뜸은 그 어색함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게 했습니다.
마쓰오타이샤 역 승강장
기념사진까지 찍고 개찰구로 빠져 나올 때가 되어서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정갈하고 작은,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정감을 주는 갈색빛의 역. 민가 사이에 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교토 그대로의 풍경과 어울리는 역이 늘 있었다는 듯이 차분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느낀 교토의 첫인상이었습니다.
마쓰오타이샤역 앞의 모습
사실 이전에도 교토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킨카쿠지(金閣寺),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니조조(二條城), 도지(東寺), 교토타워 등을 다녀왔죠. 하지만, 그것들은 교토의 첫인상으로 굳어지지 않았습니다. 뭔가 따로 떨어진 문화유산이나 랜드마크를 대한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교토’라는 고도(古都)와 근대가 어우러진 일본의 한 대도시를 전부 담아낸 인상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본 인상은 킨카쿠지의 인상, 기요미지데라의 인상이지 교토의 인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담백하면서도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익숙한 마쓰오타이샤 역은 교토의 인상을 저에게 전해준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교토의 첫인상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역에서 내려서 앞을 보자 바로 신사의 구역임을 나타내는 도리이가 앞에 서있었습니다. 한국의 문화유적지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은은한 붉은색의 홍살문과는 달리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의 도리이를 보자 이곳이 일본임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의 일본 수학여행에서는 제대로 보지 못한 일본의 신사를 본다는 생각에 무척 들떴습니다.
마쓰오타이샤 입구
아, 이제 마쓰오타이샤라는 신사를 들어가기에 앞서 마쓰오타이샤가 어떤 내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신을 모시는지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인이 야스쿠니 신사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들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나 도요쿠니 신사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에 가서 모르고 참배를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으니까요.
마쓰오타이샤가 세워진 것은 701년 신라계 도래인(渡來人, 주로 5~6세기에 중국대륙 혹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의 집단으로 만들어진 가문인 하타씨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하타노 도리(秦都利)가 세운 신사입니다. 하타씨는 아라시야마(嵐山)를 포함한 교토의 서북쪽을 근거지로 일본 고대에 크게 활약한 씨족입니다. 하타씨에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아라시야마와 고류지(広隆寺)에서 설명하도록 하고, 마저 마쓰오타이샤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죠.
신사를 세우려면 신사에 모실 신이 있어야 합니다. 신사가 있는 위치에 신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 다른 곳에서 신을 모셔오는 권청(勸請)을 합니다. 마쓰오다이샤도 마쓰오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넓적한 암석[이와쿠라(磐座)]을 권청하여 신으로 모셨습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와쿠라는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바위 즉, 신체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예로 제주도에서 돌을 신으로 모시고 당을 만들어 제를 지내는 마을들이 있죠. 그래서 이런 연관성을 들어 이와쿠라와 관련된 거석 신앙이 한국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처음에 이와쿠라에 모셨던 신은 농경에 관련된 신이었습니다. 고대 시대 가장 중요했던 것은 농경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헤이안시대,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교토)를 수도로 삼게 한 하타씨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마쓰오타이샤 또한, 그 권위가 올라가게 됩니다. 왕성(王城) 진호(珍護)의 신사가 되었고, 엔기(延喜) 연간(901~922)에 쓰인 ≪연희식 신명장(延喜式神名帳≫에는 명신대사로 올랐습니다. 또한, 헤이안시대 후기 22사 제도 하에서 상(上)7사(社) 안에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22사는 이세(伊勢)신궁을 비롯한 교토 및 그 주변부에 위치한 22개의 유력 신사를 가리킵니다. 이 신사들에는 천황이 직접 제를 지내거나 아니면 천황을 대리하는 칙사들이 가서 제를 지냈죠. 이 22사 중에서도 높은 7개의 신사에 위치하니 마쓰오타이샤의 권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헤이안 시대 이후 중세에 들어서는 고대처럼 관(官)의 지원은 많이 없었으나 술의 신을 모시면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명세는 계속 이어져 현재 전국에 1000여 개의 분사를 두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러한 역사를 가진 마쓰오타이샤에 찾아간 이유는 하타씨라는 도래인이 교토를 부강하게 만든 과거의 흔적 중 하나를 찾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술의 신을 모셨다는 신사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마쓰오타이샤 한쪽에 일본 전국의 양조장에서 기진했다는 술통들을 모아놓았다는 것도 보고 싶었습니다. 대학교 1,2학년을 술과 함께 산 우리에게 충분히 흥미를 유발할만한 내력을 가진 신사이기에 꼭 한 번쯤은 보고 싶었습니다.
도리이 두 개를 지나 본전의 앞마당에 들어가자 사무소의 직원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나중에 조사를 하게 되면서 분사를 1000여개나 가진 대단한 신사임을 알게 된 것이지 사람하나 없는 텅 빈 마당을 보면서 마쓰오타이샤라는 이름에 붙은 ‘大’자가 과거의 영광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이 없는 빈 가지만 달린 앙상한 나무들과 공사중인 본전의 모습은 햇빛이 비추지 않았다면 을씨년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다만, 푸른 나뭇잎들이 만연해지는 생명의 계절이 오면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본전 건물과 더불어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한다고 하니 한 번 쯤 볼만한 것 같습니다. 본전과 마당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전국의 양조장에서 기진한 화려한 술통들을 모아둔 곳이 있고, 우측에는 참배하기 전 손과 입을 씻는 데미즈야(手水舎)가 있었습니다. 데미즈야는 약수터처럼 생겨서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우리의 약수터를 보고 입과 손을 씻으려 들까요? 살짝 궁금합니다.
신사에 기진한 술통들을 모아놓은 곳
사실 제가 본 마쓰오타이샤는 일부에 불과하고, 마쓰오타이샤가 자랑하는 정원을 보기 위해서는 추가요금을 내고 안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마쓰오타이샤의 정원은 일본 쇼와(昭和) 시대(1926~1989)의 대표적인 작정가(作庭家, 정원 설계자)인 시게모리 미레이의 유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영원의 모던’이라고 부르며 칭송한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시간도 없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권≫에 쓰인 평도 좋지 않아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와서 마쓰오타이샤를 조사하며 그 정원들의 사진을 보아도 다른 일본 유수의 고색창연한 정원들과 비교해봤을 때 그리 대단치 않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아름다움은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고 저는 직접 본 사람이 아니니 혹시 일본 근대나 현대 정원이나 시게모리 미레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은 들어가서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제 나약한 주량을 늘려달라고 술의 신에게 정식으로 빌어보고 싶었지만, 참배하는 방법을 모르니 마음속으로만 간절히 기원하고 매점으로 향했습니다. 매점에는 어신주(御神酒)를 팔고 있었습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적힌 가격은 600엔이었는데 2018년 당시에도 어신주는 600엔이었습니다. 당시 환율이 100엔에 1000원이 채 되지 않았으니 6000원이 되지 않은 싼 술이었죠. 양은 많지 않았지만, 안에 들어있는 술잔과 도자기가 무척 예뻐 당시에 사서 지금도 집에 보관해두고 있습니다.
어신주의 술병과 술잔
교토 여행의 서장이었던 마쓰오타이샤는 이렇게 별 느낌 없이 끝났습니다. 1000여 개의 분사를 거느리고 오랜 내력을 가진 신사의 이미지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마쓰오타이샤는 별 인상이 남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기억에 강렬히 남는 이미지는 아무도 없는 신사 흙마당에 따스히 내리던 한겨울 귀퉁이의 밝은 햇빛아래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던 순간이지 아름답거나 영험하다는 신사 자체에 대한 이미지는 아닙니다. 되돌아보면 실망했을 법도 한데 여행을 왔다는 기분 좋음에 휩싸여 실망을 할 시간조차 없었던듯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신사를 나와 다시 역으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