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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간사이 국제공항~마쓰오타이샤(松尾大社)역

by baekja

간사이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입국 수속이었습니다. 5년 전(2013년) 수학여행으로 일본에 왔을 때와 똑같은 입국 수속장의 모습에는 놀랐고, 기계처럼 똑같은 절차에는 익숙함을 느끼며 비행기 화물칸에서 내려오는 트렁크를 바삐 받아 챙기고, 5년 전 수학여행의 기억 속 간사이 국제공항에 유일하게 남은 에스컬레이터가 나타나자 이제야 일본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나며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와서 짐을 확인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KANSAI THRU PASS’를 각자에게 나누어주는 일이었습니다. KANSAI THRU PASS는 오사카, 고베, 교토, 나라 등지를 포함하는 간사이 지역의 전차와 버스를 기한에 한해서는 무제한으로 이용하게 해주는 티켓입니다. KANSAI THRU PASS는 2일짜리와 3일짜리가 있었는데 저희 일행이 많이 움직이는 날은 4일이어서 사람마다 2일짜리 두 개씩을 사뒀습니다. 노란 바탕에 간사이 지방 각지의 랜드마크가 귀엽게 그려진 티켓을 사용하여 개찰구를 지나 전차에 올라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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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KANSAI THRU PASS의 모습, 우측은 2017.4.1부터 2018.5.31까지 KANSAI THRU PASS로 갈 수 있었던 곳들의 지도


오사카만의 푸른 바다를 건너고, 시내의 낮은 주택들과 건물들을 지나갔습니다. 문득 예전에 보았던 오사카의 풍경이 떠오르며 그리운 느낌이 들더군요. 제가 감상에 젖어있는 동안 친구들은 잠을 별로 못자 피곤했는지 전차에 앉아 전차의 흔들림에 맞추어 고개를 흔들며 졸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저도 피로가 몰려와 잠이 몰려왔지만, 전차의 불편함과 여행의 설렘, 그리고 창밖의 풍경에서 제 마음으로 스며드는 아련한 감상에 잠을 자지는 못했습니다.


1517231104440.jpg 전차 안에서 바라본 오사카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첫 번째 환승역인 난바(なんば)역에 도착했습니다. 졸린데다가 이런저런 생각까지 하고 있던 터라 미리 채비를 하지 못하고 급하게 내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내려서 환승역으로 향하던 중 주머니를 뒤지는데 아차! 지갑이 없더군요. 다행히 거기에 넣어둔 현금은 많지 않고, 여권은 가방 속에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PASS가 지갑 속에 있어 대중교통을 사용하면서 애로사항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친구 둘도 전부 당황하여 내린 승강장까지 같이 이곳저곳을 훑어보며 적극적으로 찾아주었지만, 지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셋 중에서 일본어를 제일 잘하는 친구 A가 역사무소로 가서 한 번 물어보겠다고 했습니다. 잘 통하지 않는 일본어로 친구와 역무원이 약 5분 정도 떠들었을까요? 친구가 저한테 와서는 역무원이 지갑 주인의 이름을 한자로 써보라고 말했다며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저는 역무원이 준 종이에 제 이름을 적어주었고, 그걸 본 역무원이 제 주민등록증을 가져와 대조해보더니 주민등록증에 쓰인 이름과 똑같다며 제 지갑을 건네주었습니다. 정말 다행이었죠.


당시에는 지갑을 찾았다는 기쁨과 안도감이 느껴진 감정이 전부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재밌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당시 제 지갑의 표면 장식은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훈민정음 언해본의 첫머리였습니다. 일본인 역무원의 손에서 그 지갑이 한국인인 저에게 전달되는 조금 이질적인 장면을 다시 상상해보니 꽤 재밌었습니다. 또한, 말도 바디 랭귀지도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자로 쓴 제 이름은 무척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입니다. 맨날 싸우고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몇 천년동안 한국과 일본이 꾸준히 상호교류를 해왔다는 역사가 한자를 통한 빠른 의사소통에서 드러납니다.


이 외에도 지갑을 찾은 데서 일본 사회의 특징이나 장점을 하나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유럽의 몇몇 국가를 가면 지갑을 잃어버려서 찾는 것은 불가능이고 자기 몸에 가지고 있다가 소매치기 당하는 것까지 조심해야합니다. 일본에서는 지갑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가져가지 않고 물품보관소나 근처 사무소에 바로 갖다주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자신이 다녔던 곳을 중심으로 지갑을 보관하고 있을만한 곳을 방문하면 어렵지 않게 지갑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과거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도 친구가 지갑을 잃어버린 것을 아울렛의 카운터에서 잘 보관해주고 있었죠. 융통성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규칙을 잘 지키고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일본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지갑을 되찾은 저희 일행은 이제 다시 교토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난바역에서 니지니카지마미나미가타(西中島南方)역까지 간 후 한큐 교토본선으로 이어지는 미나미가타(南方)역으로 환승하여 마쓰오타이샤(松尾大社)역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조금 복잡하죠?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철도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일본의 철도는 각 선마다 맡은 회사가 다릅니다. 그래서 환승을 할 때 전차에서 내린 역의 이름과 다른 전차를 타는 역의 이름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죠. 위에서 니지니카지마미나미가타역에서 미나미가타역으로 환승한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제도를 우리나라 종로3가역에 대입해보자면 1호선과 3호선의 종로3가역은 회사가 같으니 이름이 종로3가역이지만, 5호선의 종로3가역은 회사가 다르므로 낙원상가역이라고 이름이 붙게 되는 겁니다. 이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고자하는 역으로 가는 열차를 꼭 골라 타야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같은 호선이라도 목적지가 다를 경우 자신이 가고자 하는 역을 가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이건 1호선을 탈 때 인천행과 신창행을 구분해 타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아라시야마(嵐山)행 열차를 타고 가며 친구들과 떠들던 도중 역무원이 다가왔습니다. 너무 시끄럽게 떠들었나 마음이 뜨끔했는데 역무원이 저희에게 준 한글말로 적힌 카드에는 생전 처음 보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여성 전용 칸이니 나가달라는 글이었죠. 당황했지만, 규칙은 규칙이니 짐을 싸서 다른 칸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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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옮기고나서 바라본 창밖의 풍경은 높은 건물은 없고 낮은 지붕선이 올록볼록 이어져 있어 무척 정겨웠습니다. 가만히 정겨운 풍경을 바라보며 친구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다보니 여행의 설렘이라는 감정이 다시 몰려왔습니다. 그 설렘은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교토 서쪽의 마쓰오타이샤역까지 가는 긴 여정동안 느껴질 수 있는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게 했고, 그날 새벽 내내 밤을 새서 생긴 피로를 잊게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들뜬 상태로 사람이 보이지 않는 조용하고 아담한 역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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