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시야마 주변
이제 한큐 마쓰오타이샤 역에서 한큐 아라시야마 역으로 갑니다. 마쓰오타이샤 역에서 아라시야마 역까지는 고작 한 정거장. 보통 같으면 교토의 분위기를 느끼며 걸어갔겠지만, 뒤에는 배낭을 메고 손에는 트렁크를 든 채로 움직일 수 없어 그냥 기차를 타기로 했습니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아라시야마 역에 내리자 조그마한 역광장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역광장에서 눈을 돌려 멀리 바라보니 꽤 높은 산이 시선을 가로채며 이곳이 평범한 곳이 아님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1962년 쓰인 가와바타 야쓰나리(川端康成)의 ≪고도(古都)≫에는 “봄철 아라시야마 행락객들 틈바구니”라는 단어로 아라시야마를 묘사하고 있어 이곳이 예전부터 무척 유명한 휴양지였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즘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이나 단풍이 온 산을 메우는 가을이면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토를 방문한 것은 겨울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민가와 여관이 섞인 골목을 지나며 살짝 보이는 풍광을 볼 때마다 대단히 아름다운 곳이란 생각이 들며 전체의 풍광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서부터 끌고 온 트렁크를 여관에 맡겨두고 골목을 돌아 나오자 기대 이상의 장면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산자수명’, 산색이 아름답고 물이 맑다는 뜻으로 일본에서는 교토를 지칭할 때 많이 쓰이는 말입니다. 산자수명한 교토에서도 특히 산자수명한 곳을 뽑으라면 저는 주저 않고 아라시야마를 뽑겠습니다. 넓은 가쓰라강이 맑은 하늘과 같은 푸름을 뽐내며 흘러가고 그 위에 걸린 하이얀 구름을 배경으로 강을 둘러싼 첩첩산중의 봉우리들은 쓸쓸한 겨울의 풍경마저도 호쾌하고 장엄하게 바꾸고 있었습니다. 그 풍경 가운데 걸린 도게츠교(渡月橋, 도월교)는 콘크리트로 되어 있음에도 시간의 때를 타 주변환경에 잘 녹아들어있었습니다. 원래는 목조다리였던 도게츠교의 이름은 가메야마(龜山) 상황(1249~1305)이 “구름 한 점 없는 밝은 달이 건너가는 듯하네”라고 시를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에 심취하여 가만히 바라보다가 셔터를 누르기도 하고, 친구들과 같이 사진을 찍다 강을 자세히 살펴보니 강 가운데에 물이 자연스레 흐르지 않고 모였다가 넘쳐흐르게 만드는 벽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쓰오타이샤를 세운 하타(秦)씨가 이 지역을 개발한 흔적입니다. 제방을 쌓고 관개 시설을 만들어 주변의 물 공급을 조절하고 농사를 쉽게 지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큰 제방이 있는 강이라는 뜻으로 대언천(大堰川)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토록 아라시야마 주변에 많은 흔적을 남긴 하타씨는 언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넘어왔을까요? 하타씨가 신라에서 넘어온 것은 5C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신라와 관계가 안 좋아진 이후에 쓴 ≪니혼쇼키(日本書紀)≫에서는 백제 출신이 가야를 거쳐 왔다고 하고 있지만, 역사의 사실적 관계를 따져봤을 때 신라 땅에서 왔다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신센쇼지로쿠(新撰姓氏録)≫에서는 하타씨를 진시황의 3세손 효무왕(孝武王)의 후예라고 하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게서 문화를 직접 받았다고 하기보다는 대륙문화를 한반도를 거쳐 받았다고 말하려는 일본의 역사 기술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시황과 하타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즈키노키미(弓月君)가 120현의 백성을 끌고 도착한 곳은 지금은 잘 발달한 유원지이지만, 당시에는 가쓰라강이 계속 범람하여 사람이 살기 힘든 습지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가쓰라강 유역의 아라시야마 주변을 가도노(葛野, 갈대 벌판)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일본의 기술력으로는 이런 곳에서 살 수 없었지만,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들은 달랐습니다. 둑을 쌓고 관개 시설을 만드는 것은 그들이 늘 한반도에서 해온 것이었죠. 하야시야 다쓰사부로의 ≪교토≫에서는 이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쓰라강에 제방을 쌓아 수량을 조절하고 개척과 관개에 이용한 것이다. (…)그야말로 (현대식)댐 건설의 원조가 아니었을까. 제방을 쌓은 하타씨 일족은 천하에 비견할 것이 없다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과연 고대인으로서는 경이적인 기술이었다. (…)가쓰라강의 제방은 후에 강 이름을 대언천이라고 불렀듯이 오랫동안 가도노 지방의 번영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하타씨의 기술로 산으로 둘러싸인 교토 분지의 북서쪽 습지는 이제 문명발전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잡힌 기틀은 지금의 아라시야마가 있을 수 있게 했습니다. 아름다운 공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이 아라시야마의 풍경에 깊이를 더했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을 정신없이 보다가 점심을 먹어야지 싶어 가쓰라강의 서안에서 동안으로 도월교를 걸어 넘어갔습니다. 겨울인데도 사람이 적지 않아 이곳이 얼마나 유명한 곳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별로 신기하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한국인이 없는 것이 무척 신기합니다. 인터넷의 영향으로 교토의 명소로 널리 알려진 데 비해 외국인이 별로 없었던 것은 한겨울이어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에도 무척 아름다웠지만, 봄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거나 가을에 울긋불긋 단풍이 들 때의 사진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화려함과 색채의 다양함이 덜하기는 했으니까요.
아라시야마의 사계 사진은 사실 따로 찾아본 것이 아니라 도월교를 건너다 웃는 얼굴의 한 일본인에게 받았습니다. 일본인이 준 것은 다름 아닌 엽서로 아라시야마의 사계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와. 이런 걸 일본에서는 공짜로 주네.’라고 생각하며 감탄하고 있는데 뒷면을 보니 익숙한 글씨가 보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친구들이랑 보고 한바탕 웃었습니다. 그걸 알고 나자 이제는 선교방식에 감탄이 들었습니다. 만약 선교를 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이미지를 좋게 만들 수 있는 홍보방식 정도는 되겠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도월교를 건너 가 점심 장소로 갔습니다.
점심을 먹은 장소는 지금도 네0버에 ‘아라시야마 소바’라고 치면 바로 나오는 요시무라 소바입니다. 교토에 체인점을 가진 소바이지만, 아라시야마점이 본점으로 현지인이나 외국인에게나 유명한 맛집인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친구가 맛집이라 해서 가봤는데 지금 글을 쓰기 위해 네0버에 검색해보니 바로 글들과 이미지가 주르륵 나와서 제가 다 당황했습니다. 어쨌든 일본 여행에서 유일하게 줄을 서고 번호표를 받아서 먹어본 그 집의 가장 좋은 점은 창문으로 도게츠교와 아라시야마의 풍경을 바라보며 먹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만, 한겨울에도 외국인들 뿐만 아니라 일본 내국인들이 많아 창가 자리를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와 친구들도 창가 자리에는 앉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 인생 첫 소바 시식이었는데 무척 싱겁고 담백해서 술과 조미료에 절어있는 제 입맛에는 그리 확 와 닿는 맛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후에 한국에서 먹어본 소바들과 비교해봤을 때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해도 무언가 다른 맛이었다는 생각은 남아 있습니다. 아라시야마에 가보면 한 번 먹어보기를 추천합니다.
점심을 먹었으니 다음 여행지로 갈 차례입니다. 아, 후식을 빼먹었군요. 점심 후식은 편의점 모찌와 복숭아맛 콜라였습니다. 편의점 모찌는 무척 달고 맛있었습니다. 한국의 찹쌀떡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맛이 무척 인상적이었죠. 복숭아맛 콜라는 저와 제 친구들 중 제 입맛에만 맞았습니다. 복숭아맛 콜라는 콜라에 풍선껌의 복숭아향을 첨가한 맛이었습니다. 말만 들으면 이상한 맛 같지만, 저에게는 조미료 가득한 새로운 단맛이라 입에 잘 맞았습니다. 후식까지 넣어 배를 든든히 채웠으니 이제 다음 목적지인 고류지(広隆寺)로 향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