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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일본의 정원, 텐류지(天龍寺)

게이후쿠 아라시야마역~텐류지

by baekja

다시 란덴열차를 타고 게이후쿠 아라시야마역으로 돌아왔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 되어 조금씩 주변의 색감이 어두워지는 분위기였습니다. 란덴열차에서 내리고 아라시야마역을 살펴보는데 장식이 달린 등불과 같은 기둥들이 세워져있었습니다. 보면서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폐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텐류지로 서둘러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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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야마역에서 텐류지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길어야 5분 정도 걸을까요? 탑두 사원들을 양 옆에 낀 잘 포장된 돌길의 끝에 텐류지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습니다. 돌길도 별로 길지 않아 큰 절이라는 느낌은 잘 들지 않습니다. 해남 대흥사의 거의 1시간 가까운 진입로를 생각하면 텐류지가 확실히 진입로부터 오래된 절집의 위엄을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텐류지도 원래부터 이런 크기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원래는 가쓰라강을 따라 좀 올라가야 하는 가메야마(龜山) 공원까지 그 절의 세력이 미쳤다고 하죠. 1386년 교토 5산(임제종의 가장 큰 다섯 사찰을 정해 절의 위계를 나눈 것) 체제에서는 상지상(上之上)의 난젠지(南禅寺)에 이어 제1위의 선사로 지정되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위세 좋고 거대했던 선사의 모습이 이제는 평범한 절간 정도의 크기가 된 것을 알려면 텐류지의 내력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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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류지는 1339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며 세운 절입니다. 이전의 글에서 일본역사를 설명할 때 말했지만,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을 폐위시키고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 된 사람입니다. 자신의 폐위한 사람의 명복을 빌며 절을 세우다니 신기하죠? 여기에는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가(武家, 막부를 중심으로 한 무사 계층)와 공가(公家,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귀족 계층)의 양쪽에서 모두 존경을 받던 무소 소세키(夢窓 疎石)가 남북조의 통합 차원에서 아시카가 쇼군에게 고다이고 천황의 진혼을 권유해 쇼군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을 품고 죽은 고다이고 천황의 원령이 저주를 내릴까 두려워하여 이를 위무하기 위해 무소 소세키에게 텐류지를 세우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쨌건 결론적으로 텐류지는 고다이고 천황의 진혼을 위하여 무소 소세키를 개산조로 하여 창건되었습니다.


텐류지 터는 원래부터 아라시야마 건너편(아라시야마는 원래 가쓰라강의 동안만 지칭)에 있는 풍광의 수려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왕가의 원찰(願刹)과 이궁(離宮)이 있던 곳입니다. 특히 13세기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할아버지인 고사가(後嵯峨) 천황이 이궁을 세웠고, 아버지인 가메야마(龜山) 천황이 여기에 머물러 가메야마전(龜山殿)이라 불렸던 곳입니다. 그래서 고다이고 천황은 어린 시절을 텐류지 터 주변에서 보낸 연고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1339년 고다이고 천황이 죽은 그해에 가메야마전을 절진의 전각으로 바꾸어 텐류지를 세운 것이죠. 원래 텐류지를 세울 때 이름은 연호를 따서 랴쿠오지(曆應寺)라고 하였으나 이에 기존 불교계가 크게 반발하여 쇼군의 동생인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꿈에서 금룡과 은룡을 본 것에서 이름을 따 텐류지라고 바꾸게 된 것입니다.


일본의 최고 권위자의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당시 최고 권력자인 쇼군이 명을 내려 지은 절이다 보니 절은 무척 크게 지어졌습니다. 당연히 경제적인 부담이 커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원에 무역선을 보냅니다. 이를 ‘텐류지 배(天龍寺船)’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당시에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서 원에 많은 무역선을 보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안해저문화재도 일본과 원나라를 오가는 무역선에 실린 물품들이었죠. 이처럼 텐류지는 가마쿠라 막부 말기와 무로마치 막부 초기의 역사를 증언하는 절입니다.


텐류지의 과거 위상이 대단했던 것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답사객이 아닌 현재를 사는 평범한 여행객이 텐류지를 찾아가야할 이유는 뭐가 있을까요? 당장 현대 텐류지의 당우들은 1356년부터 계속되는 화재를 당해 20세기 가까워진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칭호를 앞에 달고 아라시야마에서 꼭 보아야할 것 중 하나로 꼽히는 텐류지가 가지고 있는 것은 대단한 내력이 전부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많은 이들이 텐류지를 방문하는 이유는 바로 정원입니다. 이 정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정원을 만든 텐류지의 개산조이자 역대 천황들에게 7개의 국사(國師) 칭호를 받아 칠조제사(七朝帝師)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무소 소세키에 대해 알아봐야 합니다.


무소 소세키는 가마쿠라 막부에서 무로마치 막부로 바뀌고, 조정이 남과 북으로 갈리는 난세에 살았지만, 그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1275년 태어난 무소 소세키는 3세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8세 때부터 헤이엔지(平鹽寺)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사원들을 돌아다니며 천태종과 진언종 등을 배우며 수행을 하였습니다. 계속된 수행으로 그의 평판은 절로 높아져 고다이고 천황은 1325년 난젠지의 주지를 맡으라 명했고, 이를 거절하자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자인 호조 다카토키(北條高時 )까지 나서서 이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1333년에는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고다이고 천황이 죽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린센지(臨川寺)의 주지를 맡기도 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가 권력을 잡은 후로도 쇼군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 동생인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무소 소세키를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습니다.


무소 소세키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런 높은 명성을 얻고 많은 존경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정원들을 보고 있으면 그가 도달해 있던 고고한 경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후에 말할 사이호지(西芳寺) 정원을 시작으로 흔히 ‘젠 가든(Zen garden)'이라 불리는 선종 정원들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정원에 상징적인 기물들을 배치하여 정원을 행사나 의식의 무대로 생각하는 것을 넘어 예술의 분야 중 하나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원을 그냥 아름다운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원을 어떠한 개념과 의미를 가진 예술품이라 생각하는 방식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정원을 만드는 사람을 ’작정가(作庭家)‘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텐류지의 당우들은 모두 불에 타고 새로 만든 것이지만, 정원만은 무소 소세키가 만든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선종 정원의 창시자라 볼 수 있는 무소 소세키가 만든 선종 정원의 대표적인 방식인 치센카이유(池泉回遊, 연못을 둘러싸고 각종 정원들을 조영하여 둘러볼 수 있도록 하는 정원)식과 카레산스이(枯山水, 모래와 자갈, 돌을 주로 사용하여 물을 쓰지 않고 조성하는 정원)식을 모두 가지고 있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방장(方丈) 뒤의 치센카이유식 정원은 소겐치(曹源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무소 소세키가 못을 팠을 때 ‘소겐잇테키(조원일적)’라는 글이 발견된 데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겐잇테키는 여러 물줄기가 하나가 되어 떨어진다는 뜻으로 하나의 물조차도 생명의 근원이 되고 사물의 근원이 된다는 참된 선(禪)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루한 인문학 설명은 이쯤하고 텐류지의 정원을 실제로 볼 차례입니다. 텐류지의 정원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쿠리(庫裏)’라 불리는 종무소로 들어가 방장 안에서 정원을 보는 방법과 방장 밖에서 정원을 노닐며 정원을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방장 밖에서 정원을 보는 방법을 택해 보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으시다면 두 가지 방법을 다 활용하여 텐류지의 정원을 즐기기를 바랍니다. ≪교토의 밤≫에서 방장 안에서 찍은 텐류지 정원을 보았는데 무척 아름답더군요. 방장의 문틀을 액자로 하여 정원을 보는 색다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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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리의 모습


만약 시간적 여유가 없어 한 가지 방법으로만 텐류지 정원을 즐기셔야 하는 분이라면 방장 밖으로 가기를 추천합니다. 그래야 무소 소세키가 정원을 만들면서 보여주고자 했던 선의 느낌을 더욱 잘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펼쳐친 카레산스이 정원을 보고 방장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 이전에는 전혀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집니다. 한국의 정원들을 몇 가지 보았었지만, 확실히 일본의 정원은 한국의 정원과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인공적으로 구성했지만, 인공적으로 구성했기에 가장 이상적인 자연의 상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미가 확 느껴졌습니다. 자연을 최대한 원모습 그대로 살리려는 한국의 자연의 미와는 다른 자연의 미가 일본이 생각하는 자연의 미임이 확 느껴졌습니다.


1518270341373.jpg 소겐치


소겐치의 아름다움은 미술을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바로 탄성을 지르게 합니다. 미술이라고는 문외한인 제 두 친구들도 보자마자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명작 중의 명작이라는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조차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있지만, 텐류지의 소겐치가 가진 선의 고요하고 정적인 선의 아름다움은 느낄 수 없을지라도 바로 보고 감탄할 수 있는 그런 류의 아름다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폐장이 가까운 늦은 시각, 소겐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길게 놓아 둔 의자에는 저희 셋만 앉아 있었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 연못에 비친 정원의 돌과 나무들만이 저희와 함께했습니다. 몇 분을 홀린 듯이 가만히 바라보고 나서야 친구들과 사진도 찍고 정원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겐치의 형식이 치센카이유식이라 붙긴 했지만, 정원을 돌아볼 때는 그 어떠한 느낌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방장 앞에 앉아 가만히 소겐치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 제게 홀연히 그 아름다움을 전해주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텐류지는 치센카이유식이라는 형식이 완벽하게 자리 잡기 전 ‘선’ 그 자체를 표현한 정원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고요한 이미지만이 선명하게 남은 지금에서야 소겐치는 연못을 돌아보며 즐기는 치센카이유식과는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소겐치를 바라보며 일본의 선을 이해해보고 처음 제대로 만난 일본 정원의 아름다움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진 뒤에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텐류지를 나왔습니다. 텐류지를 보고 나오니 해가 다 져 그 유명한 사가노(嵯峨野)의 치쿠린(竹林)까지는 발걸음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어둑어둑해진 저녁, 도게츠교를 건너 숙소를 향하는 제 마음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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