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경을 실컷 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습니다. 책을 보느라 늦게 잤던 저는 조금 늦게 일어났는데 친구들은 먼저 일어나 온천을 한 번 더 즐겼더군요. 어제 그 유명한 사가노의 치쿠린을 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치쿠린을 조금이라도 보기 위해 친구들에게 뛰어갔다 오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뭘 그러냐며 같이 가자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정보다 조금 일찍 짐을 싸고 다시 도게츠교를 건너 치쿠린으로 향했습니다.
사가노의 치쿠린
아침인데도 치쿠린에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주변의 지역민부터 관광을 하러 온 사람들까지 치쿠린에서의 아침 산책을 즐기로 온 것 같았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길쭉길쭉한 대나무의 행렬에 압도된 채 얼마 간 들어가자 일본 역사에 손꼽히는 고전인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배경이 된 노노미야진자(野宮神社)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큰 규모를 가진 신사는 아니었지만,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어 높은 명성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인연을 맺어주는 신과 자녀를 갖게 해 준다는 신을 모시고 있어 주변의 지역민들도 많이 찾는다고 하니 내력과 명성이 과거에 그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예를 보는 것 같아 무척 멋있다고 느꼈습니다.
노노미야진자
좌측은 급히 가는 친구 A와 저, 우측은 가쓰라리큐 가는 길에 만난 골목
시간이 없어 치쿠린을 전부 걸어보지는 못하고 노노미야진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여관에 맡겨둔 트렁크를 들고 예약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가쓰라리큐로 바삐 향했습니다. 한큐 아라시야마역에서 한큐 가쓰라(桂)역까지는 세 정거장으로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가쓰라역에서 가쓰라리큐까지는 꽤 떨어져 있어 1.5km 정도를 걸어 가야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쓰라역에서 가쓰라리큐까지는 평범한 주택가들이 계속 줄지어 있습니다. 무척 평범한 거리의 모습이 계속됩니다.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 아침, 가쓰라리큐 예약시간에 맞추기 위해 뛰고 걷고 하면서 본 이런 평범한 풍경은 교토 여행 이틀째인 제가 흔히 볼 수 없을 교토의 속살인 것 같았습니다.
트렁크를 들고 뛰고 걷고 하다 보니 숨이 차오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겨울인데도 땀이 뻘뻘 났습니다. 계속 뛰어가던 중에 길 너머로 인공 대나무를 엮어 만든 대나무 울타리인 호가키(穗垣)가 홀연히 나타나 가쓰라리큐에 거의 다 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울타리를 돌아 참관자 휴게실에 도착하여 접수를 하고나서야 거친 숨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숨을 다 고르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가쓰리리큐를 해설하는 동영상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해설의 내용은 기억에 없고 동영상이 돌아가면서 나오는 가쓰라리큐의 사계가 무척 아름다웠다는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해설화면을 보고 있는데 접수를 끝낸 친구A가 이어폰과 함께 설명이 나오는 mp3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가쓰라 리큐는 일본어와 영어 해설만 있고, 한국어 해설은 없기 때문에 일본어 해설 시간에 신청을 하고 한국어가 나오는 mp3를 받아 설명을 들으면 됩니다. 시간제로 정해진 인원만 들여보내준다는 것은 창덕궁 후원과 같지만, 그 예약을 일본 궁내청 홈페이지에서 3개월 전에 해야 한다는 것이 무척 까다롭습니다. 그렇게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고 mp3까지 받아들었으니 그토록 기대하고 기대하던 가쓰라리큐를 보아야겠지만, 그전에 가쓰라리큐라는 천황의 별장이 왜 만들어졌고, 이 별장이 가진 아름다움에 대해 소개해볼까 합니다.
가쓰라리큐는 에도시대 도시히토 친왕(智人親王, 1579~1629)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친왕은 조선시대 왕자나 군(君)에 해당하는 칭호로 도시히토 친왕은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의 친동생입니다.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그의 아들이 태어나자 본가(本家)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히데요시는 그에게 영지를 주어 독립된 왕가를 갖게 해주었습니다. 이때 하치조노미야케(八條宮家)라는 이름도 받게 되었습니다.
도시히토는 고전과 한학, 그림, 음악, 꽃꽂이, 축국과 마술(馬術) 등 학문과 예체능에 모두 능한 다재다능한 인재였습니다. 이렇게 탁월한 재능과 폭넓은 교양을 갖고 있던 그가 가쓰라에 별장을 건설한 것은 1615년경으로 추정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고쇼인(古書院)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도시히토는 1629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 가쓰라리큐는 완공을 보지 못한 채 남아 있었습니다.
가쓰라리큐가 다시 공사를 시작한 것은 1642년의 일로 아들 도시타다(智忠, 1619~1662)가 100만 석의 다이묘인 마에다(前田)가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며 강력한 재정적인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가능해졌습니다. 아버지 못지않은 예술적 재능을 가진 도시타다는 온 힘을 쏟아 부어 1662년경까지 남아 있었던 건물과 정원을 다듬고, 새롭게 건물들을 증축하여 가쓰라리큐를 완공시켰습니다. 이후 하치조노미야 가문이 이 별궁을 관리해오다 1881년 하치조노미야의 대가 끊겨 1883년부터 가쓰라리큐는 궁내성의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3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 번의 화재도 입지 않고 아름다운 모습을 줄곧 지켜오고 있죠.
가쓰라리큐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고보리 엔슈(小堀遠州, 1579~1647)입니다. 본명이 마사카즈(政一 )인 이 사람은 에도시대의 유명한 다이묘이자 작정가입니다. 고보리 엔슈가 가쓰라리큐를 지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나 가쓰라리큐의 정원이 엔슈 취향이라는데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에 가쓰라리큐를 이야기할 때 고보리 엔슈를 꼭 알아야 합니다.
고보리 엔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일하며 일본의 다도(茶道)를 정립한 센노 리큐(千利休, 1522~1591)의 제자 중 한 명인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1543~1615)를 만나 다도를 배웁니다. 정적(靜的)이고 고요한 리큐의 다도와는 달리 오리베는 ‘파조(破調)의 미’라 불리는 역동적인 다풍의 파격적인 다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리베에게서 다도를 배운 덕에 엔슈는 리큐의 다도를 이어받으면서도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런 창의적인 세계는 그의 건축·정원·다도·꽃꽂이(花道)·와카(和歌)·서예 등에 잘 드러납니다. 그가 구축한 독창적인 예술 세계는 ‘엔슈 취향’이라고 불리며 에도 시대 초기 문화인 ‘간에이(寬永) 문화’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특히, 건축과 정원 분야에서의 업적은 압도적입니다. 그는 센노 리큐가 초암 다실로 제시한 소박하고 검소한 스키야(数寄屋)을 기존의 쇼인즈쿠리(書院造, 무로마치 시대에 발생하여 모모야마 시대에 발달한 주택 건축 양식, 선종(禪宗)의 서원 건축 양식이 공가나 무가의 집에 채택되어서 생긴 것으로 현관·도코노마(床の間, 일본 방의 상좌(上座)에 바닥을 한층 높게 만들어 장식물을 두는 곳)·선반·장지문·맹장지가 있는 집 구조; 현재 일본 건축의 주택은 거의 이 양식을 따름) 건축과 결합하여 스키야즈쿠리(数奇屋造)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런 스키야즈쿠리는 흔히 ‘아름다운 사비(さび, 寂)’라고 불립니다. 와비사비(わびさび)는 일본의 미적 관념 중 하나로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을 찾고 추함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으로 가공된 아름다움보다는 자연에 가까운 불완전함이 본질에 가깝고 그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와비(わび, 侘)와 사비의 뜻을 구분하지 않고 와비사비라고 합쳐서 부르지만, 와비와 사비의 뜻은 정확히는 같은 뜻이 아닙니다. 와비와 사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후 다이토쿠지(大德寺)에서 하도록 하고 사비의 뜻만 단어로 말해보자면 누추함, 쓸쓸함, 메마름 정도가 되겠습니다. 즉,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어느 산골에 지푸라기와 나무를 모아 간신히 세운 좁은 초막과 같은 느낌입니다. 센노 리큐가 추구했던 사비는 이러한 느낌이었지만, 고보리 엔슈는 이를 대중적으로 발전시켜 조금 더 밝고 세련되며, 큰 형식을 제시했습니다. 센노 리큐의 양식보다는 화려해졌지만, 고보리 엔슈의 건축과 정원에서도 여전히 사비의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보리 엔슈의 스키야즈쿠리를 두고 아름다운 사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역사와 아름다운 사비라는 미적 가치를 머리와 마음에 담고 가쓰라리큐를 탐방할 차례이지만, 제 글은 이 이상 쓰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가쓰라리큐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죠. 4년 전 당시에는 아름다운 사비라는 개념을 조금의 이해도 하지 못한 채로 간 데다 가쓰라리큐의 역사도 머릿속에 정리된 채로 간 것이 아니어서 가쓰라리큐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인상이 남지 못했습니다. 20대 초반, 큰 준비 없이 갔던 여행이었으니 당연하 결과죠. 제게 남은 것은 그저 가쓰라리큐가 아름다운 정원이었다는 단 하나의 기억뿐입니다. 그렇다고 가쓰라리큐에 대해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1954년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가 가쓰라리큐를 두고 한 말과 함께 가쓰라리큐의 지도와 각각의 구역들의 사진을 올려놓을 테니 가쓰라리큐의 아름다움과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라도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간소함과 억제된 수단에 의해 실로 고귀한 건물이 창조되었다.”
가쓰라리큐의 지도, 화살표 방향이 관람 순서입니다.
현재 출입문으로 사용중인 구로고몬 문
가쓰라리큐의 초입
미유키몬 문
스하마
쇼킨테이
쇼킨테이 즈음에서 보이는 고쇼인 등의 모습
쇼킨테이에서 쇼카테이가 있는 섬으로 가는 길에 놓여있는 다리
쇼카테이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징검돌이 놓인 길
쇼카테이 앞에서 보이는 풍경
고쇼인이 있는 쪽으로 건너오는 다리에서 본 온린도
쇼이켄 가는 길에 바라본 온린도
쇼이켄, 돌을 놓아두어 만든 길의 모양이 무척 독특합니다.
고쇼인, 주쇼인, 신고텐
겟파로의 천장
좌측은 겟파로 봉당의 안쪽 다다미방에서 북쪽을 바라본 사진, 우측은 봉당의 오른쪽에서 연못을 바라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