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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이 앉은 극락, 뵤도인(平等院)

가쓰라역~우지역

by baekja

우리는 가쓰라리큐 정원의 여운을 느끼며 다시 가쓰라역으로 향했습니다. 가쓰라리큐를 올 때와는 조금 다른 길로 향했는데 골목에서 좀 특이한 자판기와 마주했습니다. 500ml짜리 캔에 들어간 코카콜라가 자판기에 있었죠. 탄산음료를 무척 좋아하는 저는 이것은 무조건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사서 먹었습니다. 뭐, 역시나 맛은 한국의 코카콜라맛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캔 모양이 무척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조금 걸어서 가쓰라역에 도착하자 가쓰라역에 있는 ‘cook deli'라는 도시락집이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솥과 같은 도시락집의 개념이라기보다는 반찬집에 가까운 매장이었습니다. 반찬 종류가 무척 많았지만, 이름을 알 수가 없어 겉으로 보이는 생김새만으로 반찬을 골라야했습니다. 대체로 무난해 보이는 고기류, 햄버그, 튀김류를 다수 골랐던 것 같습니다. 반찬마다 무게를 재서 가격을 매기는 것이 무척 신기했습니다. 정량적인 일본의 문화가 이곳에도 정확히 적용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시락은 샀지만, 점심시간은 아직 안 되어서 먹지는 않고 포장한 채로 열차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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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k deli


가쓰라역에서 한큐 교토선(阪急 京都線)을 타고 가라스마(烏丸)역까지 가서 시영지하철 가라스마선(市營地下鐵烏丸線)의 시조(四條)역으로 환승했습니다. 이따가 묵을 숙소가 시조역 근처에 있어 시조역의 물품보관함에 무거운 트렁크를 보관해두고 열차에 올라 교토역으로 향했습니다. 교토역에 도착하고 나자 슬슬 배가 고팠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배가 고프면 먹고 움직여야겠죠. 딱히 먹을 곳을 찾을 수 없어 교토역 구석의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밥을 먹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처량해 보였을지 몰라도 마냥 신나 있는 20대 초반의 우리들에게는 길거리에서 먹는 별 거 없는 도시락이라도 밥과 반찬은 맛나고 기분은 그저 즐겁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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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다 먹고 교토역에서 JR나라선(奈良線)을 타고 우지까지 갔습니다. 우지까지는 꽤 멀어서 교토역에서 꽤 오랜 시간을 가야했던 것 같습니다. 긴 시간 전철을 타고 우지에 도착하여 내리고 좀 걸어가자 바로 우지 강변이 보였고, 우지 강변을 따라가며 많은 녹차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지에서 다양한 녹차 상품을 판매하는 것에는 깊은 내력이 있습니다.


가마쿠라시대 일본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 에이사이(榮西)가 중국 송나라에서 차를 들여온 이후 고잔지(高山寺)의 승려 묘에(明惠)가 차의 첫 재배에 성공한 이후 이것이 우지에도 전래되어 차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지의 자연 조건이 차를 생산하기 무척 좋아 얼마 가지 않아 우지는 차로 널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무로마치시대의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우지에 일곱 곳의 차 단지를 만들었고, 다도가 일본으로 널리 퍼지면서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지 차는 천황가와 쇼군가에 모두 인정을 받아 진상되었습니다.


차로 무척 유명한 우지기는 하지만, 일본에서 차를 재배하기 이전의 헤이안 시대부터 이미 우지는 휴양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교토에서 오사카로 흘러가는 길목에 있는 우지강은 우지 주변의 교통을 편리하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수려한 풍광도 제공하여 우지에 천황과 귀족들이 많은 별장을 세우는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지에 보러 온 뵤도인도 원래는 좌대신(左大臣)의 별장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뵤도인’이라고 하면 모를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을 가서 10엔을 보신 분들은 더러 있겠죠. 일본 10엔 동전의 뒷면에 그려진 건물이 바로 뵤도인의 본당인 호오도(鳳凰堂)입니다. 우리나라 10원의 뒷면에 다보탑이 그려져 있는 것처럼 일본의 10엔 뒤에는 호오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한국인들 중에 불국사를 안 들어본 사람이 하나도 없듯이 일본인들 중에는 뵤도인을 안 들어본 이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그 이름 높은 호오도를 볼 차례입니다. 하지만, 호오도의 아름다움을 진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뵤도인이 어떻게 별장에서 사원으로 바뀌었고, 시대가 지나도록 불변의 미를 풍기는지 그 내력을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KakaoTalk_20220208_105103144_07.jpg 10엔 뒤의 호오도


헤이안 시대를 지배했던 후지와라 가문에 대해서 <짧게 보는 일본 역사>에서 이야기했습니다. 헤이안 시대에 줄곧 후지와라 가문이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후지와라 가문이 최전성기를 누린 것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때의 일입니다. 그는 딸 넷을 모두 천황가에 시집보내 세 명을 동시에 황후, 태황후, 태황태후로 만들 정도로 대단한 권력을 자랑했습니다. 그 권력을 잡은 평생 동안 영화(榮華)를 누린 그는 좌대신의 별장을 사서 시회(詩會)와 음악회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그 시회와 음악회를 즐기던 별장 터에 세워진 것이 뵤도인입니다.


뵤도인을 세운 것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아니었습니다. 별장을 없애고 절을 세울 생각을 한 것은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였습니다. 그도 평생 영화를 누렸지만, 자신의 권력과 부를 자랑하기 위해서 뵤도인을 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1052년 일본에 말법시대가 도래한다는 말법사상 때문에 세운 것이었죠.


말법이란 불교경전(≪법원주림(法苑珠林)≫에서 부처의 가르침은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 3단계로 쇠퇴해간다고 한 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석가 이후 정법시대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면 깨달음을 얻고, 상법시대에는 불교가 형식화되어 비록 가르침이 있지만, 깨우침을 얻는 이가 드물고, 말법시대로 가면 불교의 가르침만 남고, 수행도 깨우침도 없어 황폐해진다고 합니다. 석가가 열반에 든 후 정법 5백년, 상법 1천년, 말법 1만년이라 했으니 계산에 따르면 1052년은 말법이 도래하는 시기였던 것입니다. 다만, ‘세상의 멸망이 오니 참회하라.’와 같은 의미보다는 부처의 가르침이 나온 지 오래되었으니 조금 더 수행을 열심히 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실천하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무척 재밌는 것이 이런 종교적인 경계심을 주는 의미의 말법사상은 당시 일본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설득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후지와라노 요리미치 이후로 끝나는 후지와라가의 전성기와 함께 무사의 시대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중앙의 귀족들은 점점 힘을 잃게 되는 정치적 혼란기였으며,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해서 말법이 오면 세상이 멸망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불안감을 낮추기 위해 구야(空也) 스님은 아미타 정토 사상을 포교하였고, 겐신(源信) 스님은 아미타여래 사상을 설파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극락을 표현한 뵤도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런 사상 위에서 만들어졌기에 뵤도인의 본당인 호오도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습니다. 또한, 동향으로 만들어 서방 정토에서 아미타여래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시각화했습니다. 뵤도인 호오도는 양쪽에 긴 회랑을 가지고 날개를 편 듯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에 이러한 양식을 가진 건물은 현재 호오도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호오도의 양식은 당시 유행했던 신덴즈쿠리(寢殿造) 양식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국말로는 침전조 양식이라고 읽는데 복합적인 구성의 단일 건물로 침전을 중심으로 하면서 양쪽에 회랑이 있고, 주변을 연못과 동산으로 조경한 양식을 신덴즈쿠리라고 합니다. 이 신덴즈쿠리는 헤이안 시대 천황과 귀족 문화를 대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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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호오도를 봤을 때는 바로 탄성이 나왔습니다. 잔잔한 수면을 가진 연못과 빨갛게 주칠이 된 건물이 어우러져 마치 호오도의 이름(한국말로 봉황당)처럼 봉황이 연못가에 사뿐히 내려앉아 물을 마시는 이미지가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호오도의 안쪽에는 격자무늬 창안에 보이는 아미타여래상이 영험한 기운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아미타여래상을 자세히 관찰하려면 돈을 더 내고 시간마다 일정한 인원만 들어갈 수 있는 호오도 내부 관람을 현장에서 신청하면 됩니다.


1517551455106.jpg 호오도 내부로 들어가는 다리와 표를 끊는 매표소


연못의 다리를 건너 호오도 내부로 들어가면 화려한 장식의 광배를 가진 엄숙한 아미타여래상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반쯤 눈을 감은 채로 연좌에 앉아 중생을 딱하게 바라보는 표정의 아미타상은 부처의 자비로움과 더불어 엄숙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부처는 헤이안 시대의 유명한 조각가 조초(定朝)에 의해 ‘요세기즈쿠리(寄木造)’ 기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하나의 목재로 부처를 깎아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목재로 부처를 부분별로 조각하여 후에 합치는 기법으로 분업에 의해 큰 불상을 대량으로 쉽게 제작할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아니라 위 닫집의 장식도 무척 섬세하고 화려하여 일본 공예의 기교적이고 세심한 면을 잘 보여줍니다.


장식과 부처에게서 눈을 떼어 벽을 둘러보면 운중공양보살상(雲中供養菩薩像)들이 붙어 있습니다. 원래 붙어 있던 것은 총 52개로 51개는 호오도를 만들 당시에 같이 만들어진 것이고 나머지 1개는 후대에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호오도 내부에는 이들 중 26개가 붙어 있습니다. 호오도 내부에서 이것들을 상세히 살펴보기는 힘들고, 나머지 절반을 전시해둔 호쇼칸(鳳翔館)에 들어가 상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호쇼칸은 뵤도인 뒤쪽 언덕에 자리 잡은 유물전시관입니다. 현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나 호오도를 바라볼 때는 그 존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잘 숨겨져 있습니다. 뵤도인 호오도라는 위대한 유산을 부각시키기 위해 최대한 모습을 숨긴 것이죠. 자기주장은 약하지만, 주변의 환경과 무척 잘 녹아들어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은 건축입니다. 내부는 어둡고 엄숙하여 초월적인 불교세계의 편린을 보는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곳에서 운중공양보살상과 호오도의 지붕을 꾸미던 봉황 모양의 치미를 포함한 다양한 뵤도인 출토 문화재들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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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쇼칸의 모습(제 뒤편의 건물이 호쇼칸입니다.)


무척 아름답다고 이 책, 저 책에서 설명하지만, 운중공양보살상을 실제로 봤을 때의 감각은 저의 기억 안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다보고 나와 호쇼칸 아트샵에서 산 한 기념품 덕분에 운중공양보살상 자체는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하고 있습니다. 52개의 불상과 용마루 양쪽에 달린 봉황상 2개. 어떤 기념품을 만들면 좋을까요? 개수를 보고 떠올리신 분들도 있겠지만, 52개의 카드와 2개의 조커 카드로 이루어진 트럼프 카드입니다. 종종 제 책장에 올려둔 트럼프 카드를 볼 때마다 ‘뵤도인에 있는 52개의 운중공양보살상을 봤었지.’하고 제가 보살상을 봤음을 되새기고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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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중공양보살상과 봉황상 트럼프 카드입니다


운중공양보살상을 다 보고 나와서 호오도 앞 벤치에 앉아 해가 사라지기를 기다렸습니다. 해가 사라지면 무척 뵤도인의 환상적인 면모가 드러난다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글귀를 보고 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짧은 겨울인데도 폐장시간이 다 되도록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고, 호오도에 조명을 켜주지도 않더군요. 아마 볼 수 있는 때가 따로 있는 듯했습니다. 그토록 멋있다는 호오도의 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저는 밤을 기다리는 두 시간동안 뵤도인 호오도를 맘껏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뵤도인을 관람하는 도중 시선을 틀어 사람 구경을 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교복을 입고 와서 호오도를 관람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호오도를 유심히 살피기보다는 끼리끼리 모여 수다를 떠는 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유적지에 온 모든 국가의 학생들의 특징이 그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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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도를 나와 근처의 상점에서 친구가 사먹는 녹차 아이스크림을 한입 먹어보았는데 무척 녹차의 향이 강해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척 강하지만 불쾌하지는 녹차의 향을 입 안에 가득 머금고 봉황이 앉은 자리를 떠나 땅거미가 져 밝은 불을 키기 시작한 우지역으로 우리는 천천히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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