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후쿠 아라시야마역~우즈마사 고류지역(란덴열차)
게이후쿠 아라시야마역에서 우즈마사 고류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란덴(嵐電)열차를 타야합니다. 아라시야마의 명물 중 하나인 란덴열차는 두 칸의 지상열차로 1899년 개통된 서대문에서 청량리 사이를 다녔다는 예전의 전차를 떠올리게 만드는 생김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고 귀여운 생김새에 그다지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리는 모습은 역과 역 사이를 빠르게 달려 사람을 날라야 한다는 열차 보통의 역할에서 이 열차가 벗어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봄이면 벚꽃 터널이 만들어지는 곳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는 이 열차에서 교토 외곽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며 즐기다 보니 어느새 우즈마사(太秦) 고류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고류지역이면 고류지역이지 앞에 우즈마사라는 말은 왜 붙어 있을까요? 이전 글에서 하타씨가 교토 서북쪽의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 고류지 근처의 지역을 우즈마사라고 오래전부터 불러왔다고 합니다. 우즈마사 지역에 주로 살던 우즈마사씨는 하타씨 중에서 양잠에 뛰어났던 하타노 사케노키미(秦酒公)를 중시조로 하는 일족입니다. 그래서 우즈마사씨의 한자에 하타씨의 ‘秦’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이들이 우즈마사라는 성(姓, 가바네)을 갖게 된 이유는 ≪니혼쇼키(日本書紀)≫유랴쿠(雄略) 천황 15년조(471) 기사에 나와 있습니다.
“천황은 하타노 사케노키미를 총애했다. 명〔詔〕을 내려 하타의 인민들을 모아 진주공에게 맡겼다. 이에 진주공은 180종류〔種〕의 하급관리 〔勝〕를 이끌고 조세 〔庸〕과 〔調〕로 바칠 비단 〔絹縑〕을 궁궐마당에 쌓았다. (이것이 수북이 쌓인 모습을 보고서) 성(姓)을 우즈마사(禹頭麻佐)라 내려주었다.”
우즈마사의 뜻을 두고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우즈는 많다, 존귀하다는 뜻이고, 마사는 촌주(村主)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하타노 사케노키미의 집안이 하타씨 중에서 으뜸이라는 뜻으로 하타씨의 ‘秦’자에 클 태자를 붙여 우즈마사를 ‘太秦’이라고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우즈마사 지역이 하타씨의 지배지였다는 이야기는 곳곳의 유적지나 숨겨진 역사 이야기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듯 고대에는 하타씨의 우지데라(氏寺)로 위세가 대단했을 고류지도 세월이 무상하게 길가에 나앉아있었습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고류지의 삼문은 여러 현대식 건물 사이에 끼어있어 안타까워 보일정도였죠. 그래도 도시 한가운데에 오랜 역사를 지닌 절이 있는 모습은 제가 늘 보아왔던 절의 정문은 산속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우리나라 산사(山寺)의 일주문(一柱門)과는 다른 느낌이 들어 무척 신선했습니다. 다만, 앞에서 말했듯이 처음부터 고류지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류지의 시작은 무척 창대했습니다.
고류지는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인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건립한 7대 사찰 중 하나입니다. ≪니혼쇼키≫ 603년조에는 쇼토쿠 태자가 존귀한 불상을 갖고 있다며 이를 누가 모시고 공경할 사람을 찾자 하타노 가와카츠(秦河勝)이 나아가 이를 모시겠다고 하고 하치오카데라(蜂岡寺)를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623년 조의 기사에는 622년 쇼토쿠 태자의 사망에 대한 조문을 온 신라의 사신이 불상 1구와 금탑, 사리를 가져오자 불상은 가도노의 하타데라(秦寺)에 두었고 나머지들은 모두 오사카(大阪)의 시텐노지(四天王寺)에 봉안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하치오카데라는 지금의 고류지 자리가 아니라 하타노 가와카츠의 저택 안으로 추정되고, 하타데라는 지금의 고류지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하치오카데라와 하타데라는 따로 있었으나 794년 교토로 천도할 때 헤이안쿄 내에는 도지(東寺)와 사이지(西寺) 외에 다른 절은 두지 못하게 하여 헤이안쿄 내에 있던 하치오카데라와 하타데라를 합쳐 지금의 고류지가 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후 818년 화재로 당탑 모두가 소실되었으나 하타노 도쇼(秦道昌)이라는 승려가 등장하여 836년에 대대적으로 중창하였고, 천황에게 땅을 하사받으며 절의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1150년에 다시 화재로 소진되었고, 1165년에 강당을 중건하였습니다.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들어 쇼토쿠 태자 신앙이 일어나 태자의 영혼을 모시는 계궁원이 지어지고, 태자상을 봉안하면서 다시 중요한 사찰이 되었으나 근대에 와서 폐불훼석(廃仏毀釈)의 광풍으로 인해 사찰의 건물과 땅을 다수 잃고 좁은 공간에 자리한 조용한 절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일본 역사 용어들을 다수 사용해서 읽기 쉽지 않지만, 앞에 제가 일본 역사를 짧게 정리해둔 글을 읽는다면 이해가 어렵지는 않으실 겁니다. 다만, 폐불훼석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 잠시 이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폐불훼석은 쉽게 말하면 일본의 전통종교라 할 수 있는 신사를 중심으로 하는 신도(神道)와 불교의 분리과정에서 불교가 누리고 있던 특권을 빼앗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미 오랜 역사를 거치며 신도와 불교가 자연스레 섞인 신불습합(神佛習合)이 큰 특징으로 자리잡은 일본 불교를 강제로 바꾸려다보니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으며, 특히 가장 문제였던 것은 분리하고 특권을 빼앗는 과정에서 불교 사원의 건물들과 불상 등 문화재를 마구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문화재 보존 및 복원만큼은 우리나라보다 한 수 앞서있다는 평가를 받는 일본이지만, 근대 초기에는 일본에게도 그런 오욕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폐불훼석의 광풍으로 인해 절의 크기는 작아지고 절 자체의 위엄은 줄어들었을지언정 여전히 고류지는 중요한 절입니다. 절이 가지고 있는 문화재 덕분인데요, 국보가 12점, 우리나라의 보물에 해당하는 중요문화재(重要文化財)가 48점이나 될 만큼 소장한 문화재의 질과 양만큼은 어느 절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아스카·나라·헤이안·가마쿠라 시대의 불상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절은 고류지밖에 없다고 하죠. 사실 이런 말을 해도 잘 와 닿지 않습니다. 고류지의 불상들을 전시해둔 어두운 신영보전에 들어가 거의 1시간을 넘게 불상만 쳐다보고 있었던 기억은 있는데 일본 미술을 잘 모르는 저는 불상의 이미지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죠. 다만, 딱 한 가지 불상에 대한 이미지만은 남아 있습니다. 사실, 그 불상 하나를 보러 고류지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바로 소설 ≪고도≫에도 아름다운 인간의 이상적 전형으로 표현된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입니다.
2016년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이라는 전시회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습니다. 이때 당시 큰 전시장에 주구지(中宮祠)의 목조 반가사유상과 국보 제78호인 금동반가사유상만 마주보게 두었었는데 그 전시를 봤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두 불상의 모습은 다르지만, 두 불상의 얼굴에서 모두 생각에 잠겨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 초월적 인간의 이상을 보았습니다. 이 이상적 얼굴의 상이 서로 마주보고 생각의 대화를 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두 불상이 마주보고 있는 사이의 공간에 들어가면 마치 제가 알지 못한 어떤 넓은 우주 어딘가의 진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신비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사실 원래는 주구지의 반가사유상이 아니라 우리나라 국보 제83호와 그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을 전시할 계획이었으나 고류지에서 반대해서 전시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류지에서 직접 반가사유상을 본 뒤에는 만약 원래 기획대로 전시가 이루어졌다면 불상을 보고 황홀경에 다다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불교 신자가 아닌 저도 삼매의 경지를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고류지 반가사유상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제 짧은 식견의 글로는 어림도 없고, 고류지 안내 책자에 주로 실리는 서양의 철학자 야스퍼스의 글을 인용해볼까 합니다.
“그것은 지상의 시간과 속박을 넘어서 달관한 인간 실존의 가장 깨끗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날까지 몇십 년간 철학자로 살아오면서 이 불상만큼 인간 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불상은 우리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실로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철학자까지 극찬할 정도로 아름다운 이 불상은 1960년 한 대학생이 홀려 오른손 약지를 떼어갔다는 일화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불상에 관해 유명한 이야기는 이 불상이 한국에서 넘어왔느냐 안 넘어왔느냐는 논쟁일 겁니다. 1951년 교토대학의 한 식물학과 학생이 이 불상의 재료가 적송(赤松)임을 밝히면서 이 논쟁은 점화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적송은 잘 나지 않을뿐더러 적송으로 불상을 만드는 일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후에 허리띠가 일본에서 자주 쓰는 녹나무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져 일본에서 만들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습니다. 아예 한국에서 만들어져서 일본에서 수리되었다는 설도 제기되었죠.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는 설들이지만, 이 불상이 전형적인 아스카(飛鳥) 양식을 갖춘 주구지 반가사유상과 달리 한반도 불상 양식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부처의 아름답고 자비로우며 초월 어느 너머에 닿아 있는 느낌의 미소를 보고 나와 절을 둘러봤습니다. 한국과 일본에 널리 알려진 대단한 문화재를 가진 절로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고류지의 그리 넓지 않은 마당에는 관리인을 제외하고는 저와 친구들밖에 없었습니다. 약간 흐린 날씨와 더불어 조용함만이 남은 절의 분위기는 이곳이 마을의 한 가운데 있는 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한겨울의 늦은 오후 약간 구름이 낀 날씨와 더불어 회색빛이 만연한 작은 절은 부처의 미소를 제외하고는 어떤 아름다움도 대단한 분위기도 풍기지 않으며 그저 조용하고 작다는 이미지로 제 기억 속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