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아, 회상을 시작하기 전에 앞서 먼저 일본 역사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해볼까 합니다. 답사기도 아닌데 왜 일본 역사에 대한 설명하는지 궁금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일본 역사를 설명하는 이유는 첫 번째, 제 전공이 사학과라 회상을 함에 있어서도 일본 역사를 빼놓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고, 두 번째, 친구들과 함께 방문한 곳이 전부 유적지였기 때문입니다. 첫날엔 마쓰오 신사(松尾大社), 고류지(広隆寺), 텐류지(天龍寺), 둘째 날엔 가쓰라리큐(桂離宮), 뵤도인(平等院),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셋째 날엔 슈가쿠인리큐(修學院離宮), 다이토쿠지(大德寺), 킨카쿠지(金閣寺), 료안지(龍安寺), 넷째 날엔 기요미즈데라(淸水寺), 후시미 이나리 신사(伏見稲荷神社), 사이호지(西芳寺),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등 방문한 곳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적지였기 때문에 이곳들을 방문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일본 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처음 보는 용어와 생경한 내용이 가득할 테니 보기 힘든 분들은 이후에 쓰일 회상기를 읽다가 회상기에 나오는 유적지의 시대를 흐름 속에서 파악하고 싶다 할 때 조금씩 찾아보는 것을 권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일본 역사에 대해 알아보러 가죠.
일본 역사의 시작은 구석기 시대입니다. 원래는 일본에 구석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1949년 이와주쿠 유적의 조사 이후 기존의 정설이 뒤집혔습니다. 구석기 시대 이후는 신석기 시대입니다. 일본의 신석기 시대는 B.C. 1만년 경부터 시작된 조몬 시대(繩文時代)라고 합니다. 새끼줄 모양의 무늬(繩文)를 가진 조몬 토기(繩文土器)가 주로 쓰였기 때문이죠. 다만, 일본의 이 시대와 다른 국가들의 신석기 시대 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농사를 짓지 않았던 것이죠. 일본이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는 시기는 야요이 시대(彌生時代)부터입니다. B.C. 3C부터 시작된 야요이 시대 때에는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사유재산이 생기고 사회계급이 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열도 각지에서 구니(國)이라 불리는 정치 공동체들이 나타났습니다. 구니들은 3C경부터 연맹을 형성했고, 주변 30개 구니의 맹주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야마타이국(邪馬臺國)입니다. 제정일치 사회였던 야마타이국은 중국 위(魏)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기도 하는 등 대외 교류를 활발히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당시 왕은 ‘히미코’라는 여왕으로 그가 죽은 후에는 선출로 왕을 뽑았습니다.
야요이 시대가 끝난 후에는 4C부터 고훈 시대(古墳時代)가 시작합니다. 동시대 일본 측 문자사료의 부재로 인해 고분(古墳)이나 부장품과 같은 고고학적 성과에 의존하여 시대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고훈 시대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시대에 광역적 정치연합인 야마토(大和) 왕권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야마토 왕권의 세력 범위를 추정할 수 있는 무덤이 바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입니다. 고훈 시대에 일본 열도 전국적으로 이 전방후원분이 나타났기에 야마토 왕권이 영향력이 꽤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6C 전후로는 야마토 왕권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기나이(畿內) 지방(교토와 오사카가 포함된 간사이 지방)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이 지역에만 전방후원분이 남았고, 7C부터는 불교의 전래로 인해 화장이 보편화되면서 전방후원분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야마토 왕권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더 이상 왕은 선출직이 아니라 세습직이 되었고, 이에 따라 야마토 왕권은 야마토 왕조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592~710)가 시작됩니다. 왕이 거주하는 궁(宮)의 위치가 아스카로 고정된 것이죠. 이 당시에 강력한 귀족 가문인 소가 씨(蘇我氏)와 모노노베 씨(物部氏)가 불교 수용과 왕위계승을 두고 분쟁을 벌였고, 이후 소가 씨가 승리하며 불교를 수용하게 됩니다. 이 소가 씨가 지원했던 스이코 천황이 즉위하고 섭정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쇼토쿠 태자가 맡게 됩니다. 이때에 율령제를 기초로 한 중앙집권의 기초를 다지게 되고 불교 중심의 아스카 문화가 발전하게 됩니다.
소가 씨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645년 나카노오에 황자와 후에 헤이안 시대를 주름잡는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시조라 볼 수 있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645)을 통해 소가 씨를 몰아냈기 때문이죠. 이후에 덴지 천황이 된 황자는 당시 어지러웠던 동북아시아(여제동맹과 나당연합 간의 갈등,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 운동, 시신라와 당나라 간의 전쟁) 정세를 이용해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덴지 천황의 사후 왕의 자리를 두고 오아마 황자와 오토모 황자가 전투를 벌인 진신의 난(壬申の亂, 672)가 끝나고 덴무 천황이 즉위했습니다. 이때부터 천황(天皇)이라는 군주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이즈음부터 국호 ‘日本’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율령제가 정착되었습니다. 다만, 이 율령제를 통해 이상적으로는 중국식 전제군주를 목표로 했으나 천황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씨족이 연합하여 지배하는 체제가 굳어졌다는 것이 중국과 한국의 고대 국가와의 차이점입니다.
아스카에 자리 잡은 구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헤이조쿄(平城京)를 조영하고 그곳으로 천도한 후의 시대를 나라 시대(奈良時代, 710~794)라고 합니다. 이때에는 천황과 귀족간의 권력 다툼이 더욱 심해지고 당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견당사를 계속 파견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의 대표적인 천황인 쇼무 천황은 후지와라 씨로 대표되는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견당 유학생 출신들을 등용했고, 도다이지(東大寺)와 같은 큰 절을 건립하여 자신의 위세를 드높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재정악화를 가져와 세금부담이 심했던 공민(公民, 당시 일본의 피지배계층)들의 이탈을 불러왔으며 왕권 약화를 가속화해 장원(莊園)이 등장하는 한 계기가 됩니다.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국제적, 불교적, 귀족적 성격을 띠었던 이 시기의 문화를 덴표문화(天平文化)라고 합니다.
나라 시대 후기 간무 천황이 즉위합니다. 간무 천황은 이미 비대해져 버린 후지와라 일족과 불교세력에 맞서 군주권의 회복을 하기 위해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천도했다가 역병이 돌고 각종 자연재해가 나가오카쿄를 덮치자 794년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합니다. 이것이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의 시작입니다. 간무 천왕은 왕권강화와 율령국가 재건을 위해 천황직속기구인 영외관을 설치하지만, 이마저도 후지와라씨가 영외관 자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의도와는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후지와라 가문은 헤이안 시대 내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황족들과 반대파들을 좌천시키거나 죽였습니다. 반대파가 사라지고 난 후에는 후지와라 씨 내의 권력 투쟁을 통해 북가(北家)가 권력을 잡아 왕을 도와 정치에 크게 관여할 수 있는 섭정과 관백직을 세습 독점했습니다. 이 당시에 견당사를 끝내고 당과 한반도로부터 받은 문화를 완전히 소화해내 일본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내었는데 이를 국풍문화(國風文化)라고 합니다. 이즈음부터 일본의 문자인 가나(假名)의 자형이 일정하게 완성되었습니다.
천황과 후지와라 씨로 대표되는 중앙의 권력 투쟁은 지방에 대한 지배력의 약화를 불러왔고, 이는 지방 호족들과 유력농민들이 자체 무장하여 무사 세력이 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무사 세력은 지방의 난을 제압하며 중앙에 진출했고, 전문적 전투집단으로 성장하며 토지를 소유하기 시작하고 지방영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일족끼리 모여 무사단을 형성하였고, 이들의 대표적인 예가 헤이시(平氏)와 겐지(源氏)입니다. 이들은 땅을 모아 중앙의 강력한 귀족들에게 땅을 바쳐 조세면제권을 획득하였고 이러한 땅들은 장원이 되어 귀족들의 권력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강해지는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천황들은 천황에서 물러나 상황(上皇)이 되어 정치를 펼치는 원정(院政)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불교사원들이 땅을 모으고 이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며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앙의 권력 투쟁은 갈수록 심해졌고, 이를 돕는 무사 세력의 힘은 날로 강해져 헤이시라고 앞에서 말했던 다이라 가문의 무사단이 중앙의 권력을 잡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독재는 다른 이들의 반감을 불러왔고, 이들을 타도한 겐지, 즉 미나모토 가문이 권력을 잡게 됩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연 이 시대를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85~1333)라고 합니다. 도쿄 근처 가마쿠라라는 지역에 무사들의 정부인 막부(바쿠후, 幕府)를 열었기 때문에 시대의 이름이 이렇게 붙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첫 번째 쇼군(將軍, 막부의 지배자이자 대표자)인 요리토모의 사망 이후 외가인 호조가 권력을 잡고 협의체를 통해 막부를 운영했으며, 막부가 교토의 조정의 권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며 교토의 조정과 분리되는 지방정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 말기 원의 침략이 있었습니다. 침략 당시에는 대외적 위기감으로 인해 내부적 결속이 더욱 강해졌지만, 침략이 끝난 후에 방어에 힘을 쏟았으나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고케닌(御家人, 쇼군과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을 중심으로 불만이 터져 나왔고,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해주지 못함으로써 고케닌들이 몰락했으며, 막부의 지방에 대한 영향력이 약해져, ‘악당(惡黨)’이라 불리던 장원 영주나 막부에게 저항하던 무사들과 농민들의 저항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이처럼 천황이나 귀족과 같은 공가(公家)가 아닌 무가(武家)와 농민들의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가마쿠라 시대에는 공가의 문화와 더불어 무가의 문화와 민중 친화적인 문화도 발전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힘을 잃어감에 따라 당시 군주권을 강화해 무사들을 몰아내고 친정(親政)을 하고자 했던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를 상대로 두 차례의 거병을 하였습니다. 이는 실패했지만, 反막부 세력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의 활약으로 1333년 막부를 붕괴시킵니다. 이후 고다이고 천황은 ‘겐무의 신정’을 통해 율령체제를 부활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으나 자신들의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았던 무사들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이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336년 고다이고 천황을 폐위하고 새 천황을 옹립하였습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에 조정을 수립하고 재즉위합니다. 북쪽과 남쪽에 조정이 있었던 이 시대를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1336~1392)라고 하죠. 이처럼 조정이 양립하다보니 갈등과 충돌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나 1392년,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남북조 시대를 종결하고 본격적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6~1573, 전국지배가 시작된 것은 1392년이지만, 북쪽 조정을 만들고 막부를 연 것은 1336년이기에 무로마치 시대의 시작은 남북조 시대와 같은 1336년으로 봅니다.)를 엽니다. 무로마치는 교토의 한 지역으로 교토에 막부가 세워졌다는 것은 이제는 막부가 교토 조정과 권력을 분점하는 것이 아니라 독점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행정권과 경찰권을 가진 슈고들을 파견했습니다. 이들은 장원 영주를 대신해 세금을 걷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권한을 가지다보니 이들은 권력은 점점 커져 이들은 큰 땅의 소유자인 다이묘(大名)가 되어갔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들은 쇼군보다 힘이 세져 쇼군 선정에도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무력분쟁이 오닌의 난(應仁―亂, 1467~1477)입니다. 오닌의 난 이후로 교토는 불바다가 되었고, 막부의 지방통제력은 완전히 상실되었으며, 슈고 다이묘들은 더 이상 막부의 쇼군을 군주로 생각하지 않으며 특정 지역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가 되었습니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자신 지역마다 독자적인 성문법을 제정했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농업기술의 개발과 상공업 진흥에 힘을 썼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업자 길드라 볼 수 있는 ‘자座’와 화폐경제 등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도시들이 생성되었습니다. 이랬던 무로마치 시대에는 무사문화와 귀족문화, 원나라와 명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받아들인 대륙문화와 그간 발전시켜온 일본문화에 더해 서민문화, 중앙문화와 지방문화가 섞이면서 특정한 지역이나 계층만을 대변하는 문화들이 혼합하며 일본적 문화가 등장했습니다.
센고쿠 다이묘들 간의 갈등은 오다 노부나가가 등장하면서 결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反노부나가 연합을 각개격파하고 1573년엔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며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둡니다. 하지만,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부장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죽고 맙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츠히데를 토벌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라는 명분을 획득한 후 1590년 일본 통일을 달성합니다. 그는 전국을 통일한 후 토지대장을 작성하여 고쿠다카(石高, 특정한 농지의 쌀 생산량)에 따라 세금을 걷었으며, 하나의 경작지에 하나의 경작자와 하나의 수취자만 인정하며, 이전 장원처럼 하나의 땅에 무수히 많은 이해관계가 걸리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고쿠다카의 양에 따라 주군에 대한 봉사량을 결정하는 체제 또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오다 노부나가가 시도한 병농분리제를 확실하게 제도화시킴으로써 무사, 농민, 상공업자 사이의 직업이동을 금지하고 무사 계급을 제외하고는 도검을 몰수하여 하극상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 때를 아즈치·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 1573~1603)라고 합니다. 아즈치는 오다 노부나가의 성이 있던 지역이고 모모야마는 후시미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이 폐허가 된 후 복숭아 밭이 남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이때 문화는 무척이나 화려하고 장대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598년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권력을 잡은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反이에야스 연합을 물리치고 1603년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세웠습니다. 그는 쇼군직을 도쿠가와 가문만 세습할 수 있음을 명확히 하고, 성문법을 편찬하여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을 모두 배제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번(藩, 다이묘가 자치적으로 다스리는 영지, 영민, 그리고 그 지배기구의 총칭)’을 다스리는 다이묘들에게는 경제권은 주되 정치권은 주지 않고, 가신들에게는 정치권은 주되 경제권은 주지 않으면서 각 세력의 견제를 통해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더해 다이묘들의 처자식들을 에도에 인질로 두게 하고, 다이묘들은 1년에 한 번씩 에도에 방문하게 하는 산킨코타이제(参勤交代制)를 실시함으로써 다이묘들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했습니다.
일본 역사상 가장 평화로웠다고 불리는 에도 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는 전쟁이 소멸하면서 영지를 확대하기 위해 농지 개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는 큰 성공을 거두어 농지와 인구 무두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최초 100년 후에는 많은 청년들의 사망과 노력한 만큼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非무사 신분의 의욕 저하로 더 이상 개간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외에도 농업, 어업, 임업, 광업 등이 발달했으며, 특히 수공업의 발달로 값싼 종이의 대량 생산과 보급이 이루어져 학문의 발전에 크게 도움을 주었고, 임진왜란 이후 데려온 조선의 도공들의 노력으로 도자기 기술 또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다량의 물건을 염가로 파는 신흥상인들이 주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가져와 무사에서 조닌(町人, 에도 시대에 도시에 거주하던 장인, 상인)까지 다양한 계층이 문화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일본적 독자성이 강하고, 각종 학문이 발달했으며, 대중적 성향이 강한 겐로쿠 문화(元禄文化)가 발달하게 됩니다.
평화가 계속되어 에도 시대의 중·후기에는 ‘무위(武威)’가 아닌 ‘문치(文治)’로 정치의 방향성을 바꾸게 됩니다. 이에 따라 무의미한 살생을 금지하고, 행정직의 권한이 군사직의 권한보다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과거제는 실시하지 않아 중하급 무사들이 출세할 시회는 무척 적었습니다. 거기에 상업의 발달에 따라 물가가 상승하는데 봉급은 변하지 않아 중하급 무사들은 몰락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따라 체제에 대한 불만이 증가했습니다. 에도 막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번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에도 막부의 권력을 증대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중하급 무사들의 경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해 중하급 무사들의 불만은 계속 증대하여 후에 막부 타도와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됩니다. 이런 무사 계급의 재정 악화는 번들도 마찬가지여서 몇몇 번들은 몰락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번들은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재정재건을 하여 ‘웅번(雄蕃)’으로 성장하여 에도 말기에 체제를 뒤흔들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는 무사들의 경제력은 약해지고, 조닌들의 경제력은 강해져 조닌 중심의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인 가세이 문화(化政文化)가 주류 문화로 자리 잡습니다.
막부의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과 메이지 유신(1868)을 시작으로 일본의 근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지는 역사가 에도 시대 뒤에 있지만,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이어질 회상기에서 다룰 일이 없으니 생략하겠습니다. 구석기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이어지는 일본 역사 재밌으셨나요? 아마, 대부분 지루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 많은 내용을 기억하는 것도 절대 쉽지 않겠죠. 그저 일본 역사의 흐름이 이랬다 정도만 기억해주시고, 다음 글부터는 진짜 교토 여행을 회상하는 글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