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해는 고도가 낮습니다. 그렇다보니 햇빛이 조금 더 실내 안으로 잘 들어오는 편이죠. 추운 겨울에 해가 잘 들어오면 좋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역광이나 낮은 고도로 인해 햇빛이 반사되어 눈으로 직접 들어오는 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그래서 겨울에 도서관에 가면 늘 저는 해를 등지고 앉아 공부를 합니다. 해를 마주보고 공부를 하면 책상이나 바닥의 매끈한 면에 햇빛이 반사되어 책의 글씨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햇빛을 등지는 위치에 있는 좌석에 앉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햇빛을 마주보다 견디지 못한 이들은 결국 커튼을 내려 햇빛을 막습니다. 비단 도서관뿐만이 아니라 집집마다 햇빛의 강력함을 막기 위해 커튼을 쓰는 것을 요즘은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커튼이라는 이름이 ‘curtain'이라는 영어에서 비롯된 말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커튼이 사용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햇빛을 막기 위해 써온 것은 처마 끝에 덧붙이는 지붕인 차양이나 이 글에서 설명할 ’발‘입니다.
지금은 왕위 계승자가 어릴 때 즉위하여 왕가의 여성 웃어른이 발을 치고 정치를 한다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는 말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발이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역사 기록은 ≪삼국유사≫입니다. 권 1 내물왕 박제상조에서 왕이 발을 치고 신하를 접견하였음이 기록되어 있죠.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이 고려의 높은 건물들에는 모두 발을 드려 화려하게 꾸몄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발이 활발하게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발은 활발히 쓰여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발에 관한 다양한 내용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태종 20년(1420년)에 선공감(繕工監, 조선시대 토목·영선에 관한 일을 맡아본 관청)에서 ‘좋은 갈대밭이 없다고 말하자 그런대로 가져오라’고 한 기록과 인조 2년(1624년)에 “대궐 안에서 쓸 주렴은 일체 평시에 쓰는 위렴으로 갈음하여 낭비를 줄이고 절약해 씀으로써 백성을 사랑하는 제도를 따르소서.”라고 사헌부에서 청하는 기록이 대표적입니다. 서경덕의 ≪화담집≫에 실린 <비갠 뒤 산을 바라보네(雨後看山)>라는 시에도 발이 등장합니다.
텅 빈 누각에서 자다 일어나 문득 발을 들어보니 睡起虛樓忽上簾
비 지나간 산 빛 더욱 짙어졌네. 雨餘山色十分添
볼수록 화공도 그려내지 못할 저 경치 看來難下丹靑手
높은 봉우리 구름 걷히니 푸른 꼭대기 드러나네. 雲券萬岑露碧尖
석주(石洲) 권필의 시에도 북창에 맑은 새벽에 성근 발을 걷는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보면 사대부들도 발을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의 종류에는 대나무로 만든 죽렴(竹簾, 대발)과 구슬을 달고 있는 주렴(珠簾, 구슬발)그리고 갈대줄기를 엮어 만든 위렴(葦簾, 노렴(蘆簾)이라고도 불립니다.)이 있습니다. 위렴보다는 죽렴이 고급품이었습니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된 염장(簾匠) 조대용 장인의 기술도 죽렴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된 죽렴장(竹簾匠) 박성춘 장인의 기술은 이름부터 대나무로 발을 만드는 방법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발의 실질적으로 햇빛가리개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여러 무늬가 들어가는 우리나라의 발은 미적 가치를 가지고 있어 정자나 누각의 빈 공간을 꾸미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발에 여러 문양을 넣어 벽사와 길상의 의미를 더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한옥의 고정된 공간을 유기적으로 변화시키는 공간 분할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발이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은 궁궐이었습니다. 주렴(朱簾)이라 하여 민무늬의 빨간 발은 왕실의 상징 중 하나였습니다. 궁궐에서 벌어지는 큰 잔치에 왕실의 여성들이 참가할 때 내외구분을 위해 발을 달아놓기도 했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비(大妃)가 수렴청정을 할 때도 발을 사용했습니다. 종묘, 왕릉의 신문(神門)에도 신렴(神簾)이라 하여 모두 발이 달려있었습니다.
이토록 다양한 곳에 발을 사용했던 만큼 발을 만드는 염장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조선시대 왕실과 중앙관청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제작하는 경공장(經工匠)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죠. 기록에는 선공감에 14명이 소속되어 발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발을 만드는 과정은 말로는 무척 단순합니다. 알맞은 대나무를 골라 껍질을 벗겨낸 후 1mm 정도의 대오리로 쪼갭니다. 이렇게 쪼갠 대오리를 이슬을 맞히고 해를 쬐게 해서 2개월 동안 말리고 조름쇠에 조름질을 해서 더욱 가늘게 만든 후 조름질이 끝난 대오리를 모아 엮기만 하면 발이 완성됩니다. 말이야 단순합니다만, 간단하게만 말한 방법의 구체적인 속 내용을 들으면 이것이 전혀 단순한 작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발 한 개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대오리는 약 2000개. 여기에 부러질 것을 대비하여 200개 정도의 여분을 준비하기 때문에 가로 130cm, 세로 170cm의 발을 만드는 데 필요한 대오리는 2200여개입니다. 이 대오리 하나마다 조름쇠에 통과시켜 가늘게 하는 조름질을 개당 3번씩 하고 나서야 발을 엮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대오리를 발틀에 하나씩 올려 400여개의 고드레로 엮을 시간입니다. 단순한 숫자 계산으로 해도2000×400=800000, 대략 800000만 번의 엮음이 있어야 하나의 발이 완성됩니다. 늘어짐을 방지하기 위해 4~5cm마다 대오리 두 개를 한꺼번에 친다고 해도 수십만 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문양을 하나라도 잘못 만들면 처음부터 다시 엮어야하기 오히려 더 많은 횟수를 엮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다듬고 쪼개고, 조름빼고, 고드레로 엮는 무한에 가까운 반복이 지나야 아름다운 발 한 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보고 있자면 염장의 삶은 ‘인내’라는 말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조대용 장인이 인터뷰에서 늘 말하는 사명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길고 긴 인고의 시간 끝에 만들어진 발에 새겨진 문양들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미색(米色)의 대나무 위에 새겨진 福, 喜, 萬壽無疆과 같은 글자들이나 亞자 문양의 유려함은 보는 이들의 시선을 한참동안 머무르게 하죠. 하지만, 발에 새겨진 문양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러한 글자들을 상세히 살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거북이 등껍질을 닮은 육각형의 귀문(龜文)이나 그물의 모양을 닮은 마름모꼴의 고문(罟文)으로 그 글자들이 이루어짐을 알게 되면 탄성이 절로 나오죠. 발이 보여주는 섬세한 아름다움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대오리 하나하나를 실로 엮는 섬세함이 빛을 발하는 것은 시각적 아름다움뿐만이 아닙니다. 커튼과는 달리 실로 대나무를 가는 실로 엮은 발은 바람이 통합니다. 강렬한 여름의 햇빛을 막아줌과 동시에 바람은 통하게 하여 방 안을 시원하게 만드는 것이죠. 또한, 안과 밖의 명암을 다르게 하여 밖에서 안은 보지 못하게 하고 안에서 밖은 볼 수 있게 합니다. 바람을 통하게 하고 외부의 시선은 차단하되 내부의 시선은 밖에 닿을 수 있도록 하게하여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를 만들어 공간의 역할을 구분함과 동시에 간접적인 상호작용은 가능케 하여 자연과의 어울림도 포기하지 않은 커튼에서 찾을 수 없는 발만의 독특한 장점입니다.
커튼은 현시대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햇빛의 완벽한 차단과 공간의 완벽한 분리는 개인주의가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고, 이웃 간의 대화가 준 사회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이게 나쁘다 좋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시대를 대표하는 햇빛가리개가 커튼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자연히 과거의 햇빛가리개인 발이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한옥의 결점을 보완하며, 자연과의 동화를 포기하지 않는 발이라는 공예품은 이제는 찾는 이들이 별로 없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4호인 염장이 취약 종목으로 꼽히는 것은 이런 이유겠죠. 저는 이번에 발에 대해 조사하면서 재작년 대흥사 한편에서 보았던 낡은 표지판이 떠올랐습니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인 탱화장이 전수자를 찾지 못하고 대흥사에 살던 기능보유자가 죽어 10년 만에 무형문화재에서 해제되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었습니다. 하나의 예술과 문화재가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에 씁쓸함이 가득 밀려왔습니다. 발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섬세함과 인내, 주변 환경과의 어울림 등의 가치는 분명 보존할 만한 것이며 한국의 미로 대표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미적 가치를 가진 발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발을 만드는 전통 기술은 앞으로 몇 십 년 후에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운 한국의 전통 기술과 문화재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관심을 계속 가져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을 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