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법적 청소년 나이는 무척 다양합니다. 만 18세 미만, 만 19세 미만, 만 9세에서 만 24세 까지 등. 갑자기 뜬금없이 법적 청소년 나이를 말하는 이유는 제가 이제부터 할 이야기와 큰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국립 미술관과 박물관을 무료로 들어갈 수 있는 나이는 국립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청소년으로 취급하는 만 24세까지입니다. 이는 서울의 고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와서, 군대를 간 도중에 휴가를 나와서, 전역한 후 집에서 수업을 들으며 서울의 고궁들을 무료로 관람하는 혜택을 누려왔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나이를 먹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만 24세가 되는 올해 생일이 다가왔습니다.
올해 생일이 지나기 전 정말 제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고궁과 저의 이야기들을 한 번쯤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잠시 책상에 앉아 하나씩 제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천천히 꺼내어 보았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 빛바랜 사진 속 광화문 아래에서 뛰노는 나, 역사 공부를 막 시작했던 초등학교 5학년 처음 방문했던 경복궁, 그 안에서 처음 만난 복원된 건청궁, 초등학교 6학년 처음 들어가 본 후원 그리고 그 안에서 잘박거리는 젖은 흙을 밟으며 걸었던 연경당 옆 길, 중학교 2학년 미술사라는 학문을 처음 만나게 해주었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과 그 안의 경복궁 이야기, 중학교 3학년 때 동생과 함께했던 야심찬 고궁 돌기, 그리고 맞이한 20대. 심란하거나 예쁜 것들이 보고 싶거나 공부 후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있을 때마다 방문하여 쌓인 고궁과 저의 이야기들이 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나씩 떠올려보고 제가 고궁과 쌓아온 이야기들 사이에서 고궁이 저에게 어떤 의미인가 고민해보았습니다. 처음 제가 고궁과 쌓아올린 관계는 학생 혹은 답사객과 문화재의 관계였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고궁을 돌아보기 보다는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고궁을 살피며 제가 공부한 것들을 확인하고, 같이 간 사람들에게 고궁에 대해 내가 아는 지식들을 이야기해주는 관계였습니다. 이때 고궁은 지켜나가야 할 문화재이자 공부해야 할 대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오고 해방감에 공부는 잠시 뒤로 미뤄두면서 고궁에 대한 공부도 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고궁은 이제 조금은 지루한 공부해야 하는 대상에서 벗어나 꽃이 만발하는 봄이나 단풍이 가득한 가을이면 친구들과 함께 놀러가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배움의 대상은 유희의 대상이 되었고, 옛말을 빌리자면 풍류를 즐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문화재라는 숭고한 의미를 지닌 상징보다는 조금 더 친숙한 놀이터의 의미에 조금 더 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군대 휴가를 조금씩 나오고 전역에 가까워져오면서 고궁은 그냥 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근처에 미술관 갔다가 스윽 한 번, 순대국 먹고 소화시킬 겸 한 번, 근처를 걷다가 그냥 한 번. 집 앞 공원을 가듯이 편하게 오고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가끔은 공부한 것을 확인할 겸 가기도 했지만, 10대 때 의무감처럼 보았던 부담감은 많이 사라진 채로 그저 새로운 지식들을 확인하며 새로 지식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얻어가는 정도였습니다. 특히, 경복궁 구석의 건청궁이나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 회랑은 저만의 사색처이자 쉼터가 되어주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지닌 고궁을 책상 앞에서 떠올리는 것은 그리운 느낌을 받으면서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뜬구름을 잡는 듯하여 정리는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루 날을 잡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을 모두 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답사가 아니라 그저 고궁을 산책하며 기억 속의 수많은 나와 뒤섞이면서도 기억의 나와 고궁과 거리를 두며 관찰하는 방법으로 길고 긴 저와 고궁의 이야기들을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이제 더위가 찾아오던 2022년 6월 29일, 고궁을 돌았던 하루의 걸음을 뒤쫓아 갈 시간입니다. 그날 하루의 기억과 그 기억을 통해 떠오르는 ‘나’라는 사람이 고궁과 함께한 삶의 기억들을 하나둘씩 망각에서 꺼내어 들여다볼 때가 되었습니다. 제 삶의 기억 속에서 뒤섞여 있는 궁궐이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공적인 역사와 제가 가지고 있는 지극히 사적인 궁궐의 이야기들을 이제 같이 살펴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