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이 지나가는 곳

사정전(思政殿), 강녕전(康寧殿)

by baekja

사정문을 지나 사정전의 앞에서 섰습니다. 생각하여 정치를 한다는 의미를 가진 사정전의 이름 또한 정도전이 지어준 것입니다. 생각하여 정치를 하라는 것은 당최 무슨 의미일까요? ≪태조실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 어려울 수 있으니 풀어보자면 무척 다양한 백성들과, 무척 다양한 일들과 관련된 것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고민하여 그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생각’이라고 정도전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모두를 다스리는 왕의 자리에서 세밀하게 고민하고 살피어 정치를 하라는 조언이 담긴 이름이죠. 생각해서 부지런하게 정치를 해야 하는 왕의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럼 이런 이름을 가진 사정전은 당최 어떤 건물이었을까요? 단순하게 말하면 편전(便殿)이었습니다. 큰 행사를 치르는 중심 건물인 근정전과는 달리 상시 임금이 거처(居處)하며 정사를 보던 방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임금의 사무실 같은 느낌일 겁니다. 또한, 조회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상참이 열리던 곳입니다. 앞에서 말한 조하나 조참과 달리 상참은 거의 매일 같이 열렸습니다. TV사극에서 임금 앞에서 신하들이 좌우로 갈라서서 정사를 보는 장면을 흔히들 보셨을 겁니다. 그것이 상참입니다.


이렇게 실무적인 느낌이 강한 건물이다 보니 앞의 근정전보다는 권위가 떨어져 보입니다. 월대가 없는 것도 한몫하지요. 사정전 또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근정전보다 화려함은 떨어지지만, 그에 뒤지지 않는 몇몇 것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어좌(御座) 위의 운룡도(雲龍圖)가 그 예입니다.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그려낸 운룡도는 섬세하고 화려한 필치를 통해 역동적인 그림의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운룡도에 쏠렸던 눈길을 밑으로 내리면 어좌 뒤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가 눈에 띕니다. 해와 달 5개의 봉우리와 폭포, 소나무가 들어간 정형화된 도상의 이 병풍은 왕을 나타내는 그림입니다. 일월오봉도가 있는 곳은 왕이 있는 곳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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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전의 내부에서 시선을 돌려 이곳저곳을 살펴보면 사정문 옆의 행각이 보입니다. 행각을 잘 보면 문패가 붙어 있습니다. 천자고(天字庫), 지자고(地子庫) 등등. 10개의 문패가 있고 문패의 앞글자만 따면 ‘천지현황 우주홍황 일월(天地玄黃 宇宙洪荒 日月)’ 천자문 순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가나다’ 순과 같은 것이죠. 이 문패가 달린 행각은 ‘내탕고(內帑庫)’로 임금의 사사로운 재산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이곳에 재산을 보관하여 흉년에 백성을 구제할 때 쓰기도 하고, 좋은 일을 한 수령에게 포상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사정전 권역에는 사정전과 행각 말고도 두 개의 건물이 더 있습니다.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입니다. 만춘은 ‘만년의 봄’이란 뜻으로 만은 오래고 영원하다는 의미를 가지며 봄은 오행(五行)에서 동쪽을 의미합니다. 천추는 ‘천년의 가을’이란 뜻으로 천은 마찬가지로 오래고 영원하다는 의미를 가지며 가을은 오행에서 서쪽을 의미합니다. 서로 상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사정전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만춘전과 천추전에는 사정전에 설치되지 않은 온돌이 설치되어 있어 겨울이면 만춘전이나 천추전에서 정사를 보았을 거라 예측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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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만춘전, 오른쪽이 천추전


만춘전과 천추전을 보고 사정전 뒤쪽으로 빠져 나가면 향오문(嚮五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근정전 앞에는 근정문, 사정전 앞에는 사정문이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강녕전(康寧殿) 앞에는 향오문이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이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향오문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합니다.


향오는 ‘오복(五福)을 향하다.’라는 의미로 오복은 ≪서경≫ <홍범>편에 나오는 홍범구주(洪範九疇) 중 하나입니다. 홍범구주는 하늘이 우왕(禹王)에게 내려주었다는 세상을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큰 법칙입니다. 오복에는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의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정도전은 강녕을 두고 이 오복 중 하나이나 중간에 있어 이를 통해 다섯 가지 복을 다 이룰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오복이 있는 강녕전으로 향하는 문이니 향오문의 이름이 딱 들어맞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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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녕전은 임금의 침실로 대전(大殿)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가장 크기가 큰 건물이라서 대전이라고 붙은 게 아니라 임금이 머무는 곳이라 대전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강녕전의 이름은 또한 정도전이 붙였으며 정도전은 ‘강녕’에 대해 그저 건강하고 편안히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눈이 안 보이는 이 쉬는 곳에서도 안일하지 말고 경계하는 마음을 세워야함이 그 의미에 들어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쉴 때조차 맘 편히 쉬지 못하고 자신을 닦아야 한다니, 임금과 군자의 길은 멀고도 험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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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녕전 주변으로 는 4채의 전각이 더 있습니다. 먼저 강녕전 바로 동쪽의 연생전(延生殿)과 서쪽의 경성전(慶成殿)은 정도전이 이름을 붙인 곳입니다. 그 의미는 ≪태조실록≫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합니다. 성인이 만백성에게 인(仁)으로써 살리고 의(義)로써 만드시니,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므로 그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하므로, 동쪽의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여, 전하께서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 정령을 밝히게 한 것입니다.”


하늘의 뜻에 따라 천지의 운행을 근본으로 하여 만물을 다스리는데 동쪽이 연생전이고, 서쪽이 경성전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춘전과 천추전 얘기를 했을 때 오행에 따르면 동쪽이 봄이고, 서쪽이 가을이라 했습니다. 앞에서 봄에 만물을 낳게 한다 하였으니 동쪽에 위치한 작은 침전에는 생을 늘인다는 의미로 연생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가을에는 결실하게 한다 하였으니 서쪽에 위치한 작은 침전에는 경사를 이룬다는 의미의 경성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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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경성전, 오른쪽이 연생전


연생전 뒤쪽의 전각은 연길당(延吉堂), 경성전 뒤쪽의 전각에는 응지당(膺祉堂)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연길은 복을 맞아들인다는 의미이고, 응지는 복을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한 의미가 붙은 것은 아니나 임금이 쉬는 공간인 만큼 복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각에 이런 이름을 붙인 듯합니다.


사정전과 강녕전은 제게 있어서 그렇게 기억에 남거나 재미가 있는 공간은 아닙니다. 둘 다 임금의 집무실과 침실이라는 점에서 궁궐 내에서는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건물이나 재미있는 장치나 멋있는 경관을 갖춘 건물들은 아니기 때문이죠. 답사할 때는 유심히 보는 편이나 궁궐을 돌아다니거나 친구들과 함께 올 때면 재빨리 지나가버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추억도 쌓지 못했고, 그저 건물의 상만 확연히 머리에 남은 채로 사정전과 강녕전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다 할 이야기들을 넣지 못하고 건물의 쓰임새와 건물 이름의 유래에만 집중하여 사정전과 강녕전을 소개하게 된 데는 이런 뒷배경이 있습니다. 생각하여 정치하는 곳을 생각없이 지나가다니 참 역설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공간의 의미가 달라져서 그렇다는 것에 세월의 무상함 또한 느껴집니다.


여행을 하는 중에도 상세히 살피기보다는 스윽 보며 이 두 건물을 지나쳐 갔습니다. 아, 한 가지 재밌는 것을 빼먹을 뻔 했군요. 사정전과 달리 강녕전은 침실입니다. 무조건 온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온돌이 있는 건물은 무조건 연기가 빠져나가는 굴뚝이 있어야 하죠. 하지만, 강녕전 뒤쪽에는 굴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 찾기 위해서는 ‘교태전(交泰殿)’의 정문인 양의문(兩儀門)의 양 옆 담장을 보아야 합니다. 평범한 궁궐 담장 사이에 주홍 벽돌로 만들어진 기둥 2개가 보입니다. 동쪽 기둥에는 ‘천세만세(千世萬歲)’, ‘만수무강(萬壽無疆)’이 적혀 있습니다. 전서체로 적힌 이 한자들은 주홍 벽돌과 흰 삼화토(三華土)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의 문자 디자인이라고 봐도 손색 없을만한 이 벽돌은 제가 강녕전 권역을 올 때마다 놓치지 않고 보고 가는 굴뚝이기도 합니다. 이 굴뚝을 마지막으로 강녕전 권역은 끝입니다. 이제 굴뚝 옆의 양의문을 통해 왕비의 침실인 교태전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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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만수무강, 오른쪽이 천세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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