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역
설렌다는 것,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떠서 두근거린다는 것, 언제부턴가 그런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0대 초반 사회의 무엇을 봐도 신기하던 시기를 지나서 이제는 그냥 세상이 다 그저 그래보이고 톱니바퀴 구르듯이 구르고 시계침 도는 것 마냥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도 가끔 설레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답사를 할 때나 전시회를 볼 때입니다. 글자로만 봐오던 것들을 눈으로 본다는 것, 실제의 그것들과 마주한다는 것,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그런 것들을 보러 간다하면 그래도 아직까진 잘 설레곤 합니다.
안국역 주변은 제가 설레하는 것들의 작은 집합체입니다. 창덕궁, 경복궁, 운현궁, 서울공예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갤러리 현대, 국제갤러리, 아트선재센터, 북촌한옥마을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미술이 가득한 곳입니다. 아는 곳들이 많고 갈 곳도 많은 이곳에 오면 보통 편안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가 열리거나 한창 공부하고 있던 것을 확인하러 답사를 올 때는 설렘을 느낍니다. 늘 보던 것들을 본다는 편안함과 그 중에서도 새로움을 주는 설렘이 공존하는 곳이죠.
안국역과의 첫 만남은 당연히 설렘이었습니다. 안국역 주변에 무엇들이 정확히 알지도 못하던 중학교 때 가족들과 창덕궁 후원을 보기 위해 방문했을 때가 제가 기억하는 안국역의 첫 방문이었습니다. 여름이라 비가 오고 있었지만, 늘 그렇듯 주말의 창덕궁 후원은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몇 주 전부터 예약을 해두고 있었던 궁궐의 비밀스런 정원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찌나 설레던지. 그리고 그 설렘은 이내 환희로 바뀌었습니다. 연못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흐린 하늘 아래 축축한 공기를 머금은 채 짙은 녹빛을 내뿜던 나무들이 친근하게 서있었습니다. 물과 녹빛 가득한 여름의 후원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그 느낌은 창덕궁 후원의 첫인상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안국역의 첫인상이 되었습니다. 그 강렬한 첫인상 이후 10대의 저는 몇 번의 답사를 거듭하며 안국역을 편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설렘이 많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20대 초반 여전히 안국역은 저에게 편한 역이었습니다. 10대 내내 수도 없이 방문한 역. 하지만, 저는 아직 안국역 주변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0대 초반의 봄, 풋풋한 첫사랑과의 데이트를 안국역 주변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북촌 한옥마을이었습니다. 처음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안국역이었습니다. 안국역 2번 출구에 서서 한 사람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 느낌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새로운 것을 본다는 설렘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과 무언가를 한다는 기대에서 오는 설렘은 안국역에서 이때가 유일했습니다.
20대 중반부터는 이런저런 고민들을 많이하기 시작했고, 점차 생각이 많아짐에 따라 저에게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현대미술이 점차 좋아졌습니다. 멀리했던 현대미술을 차분히 보기 시작했고, 그 안에 담긴 무한한 생각들을 이해해보려 노력했습니다. 세상이 점차 여러 시각에서 보이기 시작했고, 새로운 생각들이 제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보고 싶은 현대미술 전시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어렵기만 하거나 재미없기만 했던 전시들을 보며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안국역은 더욱 자주 방문하는 역이 되었고, 항상 제게 설렘을 주는 전시들이 가득해졌습니다.
설레고 좋았던 마음은 제가 이 역을 자주 방문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이 역을 점점 편안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많은 전시들을 보니 전에 보았던 느낌의 전시도 분명히 있고, 새로운 생각을 담은 전시를 보아도 엄청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설렘의 시간은 가고 편함의 시간이 온 것이죠.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는 역이 아니라 서울에서 볼 것이 없고, 할 것이 없으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역이 된 것입니다. 안국(安國)이라는 지명의 이름에 나라의 편안함을 담았듯 저는 이제 이 역에 제 마음의 편안함을 담게 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함이 가득한 역이 되었지만, 역의 주변은 늘 변화하며 제게 조금씩이라도 새로움과 설렘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 테마역으로 변하며 역의 모습 자체가 새롭게 변하기도 했고, 2021년에는 서울공예박물관이 열렸으며, 슬레이트벽으로 막힌 거대한 공터가 ‘열린송현’이라는 공원으로 변하여 도심속의 새로운 쉼터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것들이 생겼다는 것을 듣고, 저는 설렘을 느끼며 안국역을 찾습니다. 찾은 후에는 만족감을 느끼고 여러 번 찾으면서 그 공간들을 편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안국역을 방문하면 마치 일상같은 느낌이 들어 편안함을 더 많이 느끼고 나아가서는 지루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늘 방문하던 곳, 변하지 않는 위치, 변하지 않는 구조가 가끔은 별로라고 느껴질 때 또한 있습니다. 하지만, 늘 안국역은 설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줄 것이란 기대가 가득한 공간이죠. 그래서 저는 안국역을 방문할 때가 좋습니다. 편안함 속의 설렘, 지루함 속의 날카로움, 그 짜릿한 감각을 늘 일깨워주는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