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향수(鄕愁)

약수역

by baekja

약수역을 방문한 기억을 찾기 위해서는 케케묵은 기억의 서랍 속의 가장 안쪽을 보아야합니다. 일회용 종이표를 꽂아 개찰구를 통과하던 저의 어렸을 적 지하철의 기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은 도봉구에 있던 외갓집이 창신에 있던 시절, 외갓집이 아파트가 아니라 낡은 주택이었던 시절,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그 시절로 가야 합니다. 창신의 외갓집은 창신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키가 작은 제가 창신역에서 외갓집까지 가는데 그리 오래걸리지 않는다고 느꼈으니까요. 창신역에서 나와 큰 도로를 걷고, 작은 골목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면 낡은 주택이 하나 나왔습니다. 그곳이 제가 처음 기억하는 외갓집의 모습이었습니다.


오산에서 창신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고 남부터미널에서 내려서 남부터미널역에서 3호선을 탄 뒤 약수역에서 6호선으로 환승해서 창신역으로 가면 되었습니다. 이 길을 되돌아보면 남부터미널역은 외갓댁을 방문한다는 이유말고도 너무 자주 이용해서 기억에 있고, 창신역은 기억에 없습니다. 특이하게도 출발역과 도착역이 아닌 환승역일 뿐인 약수역이 제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뚜렷하게 남은 기억에 있는 이미지는 약수역을 가득 메우던 델리만쥬 냄새와 3호선에서 6호선으로 환승하는 길에 있는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였습니다.

약수역을 여행하던 그날은 가만히 앉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여정을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3호선을 타고 와 델리만쥬를 사들고 6호선으로 환승하기로 한 것입니다. 3호선에서 내려서 계단을 오르자 델리만쥬 냄새가 코를 찔렀고, 저는 3,000원 어치 델리만쥬 11개를 받아들었습니다. 부드러운 빵과 달콤한 슈크림의 조화가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의 허락 없이는 절대 사먹을 수 없었던 델리만쥬를 제 돈으로 편하게 사먹으니 어떤 쾌감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델리만쥬를 들고 이제 6호선 환승 에스컬레이터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제 기억 속 약수역 에스컬레이터는 길고 길었습니다. 이대역 에스컬레이터 길이 정도였습니다.그리고 그 기억에만 남아 있는 이미지와 달리 약수역 환승 에스컬레이터는 그다지 긴 편이 아닙니다. 기억의 주관성이란. 이대역 에스컬레이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짧습니다. 약수역 에스컬레이터의 길이를 확인한 것은 20살 과외를 하러 갈 때였습니다. 대흥역에서 열차를 타고 약수역에서 3호선 환승을 해야 했습니다. 몇 년 만의 약수역인가 생각하면서 약수역에 도착해 환승을 하는데 생각보다 에스컬레이터가 무척 짧아 놀랐습니다. ‘에스컬레이터가 하나 더 있나?’ 싶었지만, 바로 델리만쥬 가게와 3호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어렸을 적의 저와 지금의 제가 바라보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여전히 약수역의 에스컬레이터는 길다는 기억과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면 절대 약수역의 에스컬레이터는 길지 않습니다. 약수역의 에스컬레이터 길이는 변한 적이 없으니 제가 약수역의 에스컬레이터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겠죠. 그 시선이 달라진 탓에 약수역의 에스컬레이터가 길다는 생각은 이제 과거의 저를 나타내는 생각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찌들어 이런저런 것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지금과 달리 그냥 세상의 많은 것들이 신기하고 알아가는 것 자체가 즐겁던 순수한 제가 그 길지만, 길지 않은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마다 제 곁에 있는 기분이 듭니다.


그런 오묘한 감정 때문인지 한 번은 뭐에 홀린듯이 약수역의 개찰구를 빠져나온 적이 있습니다. 승강장이 아닌 약수역 개찰구를 나와 출구로 나온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엄청 발달한 높은 건물들이 가득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발달하지 않은 것도 않은 소도시의 중심 같은 거리가 제 눈에 띄었습니다. 그 거리를 한 번 둘러보고 약수시장으로 들어가 국수 한 그릇을 시켜 먹었습니다. 살짝은 낡은 건물과 시장 국수의 맛이 알 수 없는 감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과거의 어딘가로 돌아와 조용히 국수 한 그릇을 비우는 느낌. 마치 10년 전의 어딘가에 멈추어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말 오전, 약수역은 사람이 적지는 않았습니다. 환승역이란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고 보기도 힘들었습니다. 열차가 지나면 늘 승강장은 텅 비었고, 그 순간이 오면 저는 생각에 잠깁니다. 고소하고 달콤한 델리만쥬 냄새와 환승 에스컬레이터를 보면 제 생각은 늘 과거에 멈춥니다. 여행하던 그 날도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간에 맞추어 지나가는 열차 사이에서 저 혼자 향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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