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와 삶

종로5가역

by baekja

20대 초반 저는 약간 사람냄새 나는 구수한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재래시장 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재래시장의 로망은 막걸리 한 사발에 빈대떡 하나 먹는 느낌이었고, 그런 시장이 어디 없나하고 검색하니 바로 인터넷에 광장시장이 떴습니다. 하지만, 새내기의 저는 학교 근처에서 술먹기에도 바빴고, 친구들과 함께 다른 곳을 갈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광장시장이 지워질 때쯤 2학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첫사랑을 만났고, 첫사랑은 막걸리를 좋아했습니다. 자연히 막걸리와 빈대떡의 성지인 광장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둘이서 처음 갔던 광장시장은 사람이 엄청 많지는 않지만, 꽤 있었습니다. 정신 없이 돌아다니다 처음 길거리에 앉아 빈대떡을 먹었고, 막걸리를 먹었습니다. 그 가성비에 무척 감탄했고, 왁자지껄한 시장의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빈대떡과 막걸리말고도, 육회, 각종 분식 등 다양한 먹거리를 판매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방문한 날 아마 다시 종로5가역을 통해 이곳을 방문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종로5가역은 광장시장으로 가는 전용역이 되었습니다. 종로5가역으로 광장시장 외에 다른 곳을 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의경 시험에서 친구와 떨어진 날, 낮에 둘이 모여 앉아 육회에 막걸리를 먹었습니다. 그냥 체력시험에서 떨어졌으면 모를까 저는 눈이 나쁜데 시력 검증서를 안 들고 가서 떨어졌고, 친구는 신체 검사는 통과했는데 인적성 검사에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친구는 저보고 바보라고 놀렸고, 저는 친구를 사회 부적응자라고 놀렸습니다. 서로 웃고 있었지만, 그날 친구와 저는 타들어가는 속을 막걸리를 마시지 않고는 달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둘 다 같은 날 공군을 가게 되었습니다.


군 휴가 때에도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상병이 꺾인 3월 1일, 휴일인 김에 친구들을 불러 낮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친구들은 당장 내일 개강이었고, 전 다음날도 휴가였습니다. 오후 4시부터 모여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휴일 낮이라 그런지 무척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어르신들이 많았는데 많은 분들이 등산복을 입고 계시더군요. 뭔가 진짜 시장통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습니다. 그날 가야된다는 친구들을 붙잡고 휴간데 술을 안 마셔주냐며 꼬장을 부리며 10시까지 친구들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6시간을 내리 막걸리만 마셨으니 다음날이 멀쩡할리 없었습니다. 저는 그냥 아침까지 집 침대에 누워 편안한 시간을 보냈지만, 친구들은 숙취에 시달리며 아침 수업을 들으러 갔습니다. 그것만큼 행복한 게 없더군요.


이처럼 광장시장을 다니며 종로5가역과는 점점 친해졌습니다. 빈대떡과 막걸리가 먹고 싶다는 친구가 있다면 바로 “종로5가역으로 와.”가 습관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 괜찮은 맛, 싼 가격과 꽤 많은 양까지. 이만한 곳을 다른 데서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낮부터 밤까지, 평일부터 주말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막걸리와 빈대떡과 함께라면 늘 종로5가역에서 모여 광장시장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쌓는 동안 제 삶에서 광장시장의 비중은 꽤 커졌고, 그와 동시에 종로5가역도 자주 거쳐가는 역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1호선을 타고 다니는 역에서 술을 먹기 전이나 술을 먹고 화장실을 거쳐가는 역이 되었으며, 해장하기 위해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쯤 사먹어야하는 역으로 변했습니다. 하루는 오로나민C를 사서 먹는데 뚜껑은 안 열리고 손잡이만 떨어져서 그 자리에서 마시지 못하고 집에서 병따개로 따서 먹어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취기로 인해 많이 힘든 날은 바로 집에 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조금 쉬었다 가기도 했습니다.


여행하던 날, 종로5가역에서 먹거리나 술, 친구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상상으로 하나씩 떠올리니 조용히 앉아만 있는 그 순간에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느껴졌습니다. 개찰구를 나가 마음이 공허하면 배를 채우면 되었고, 배가 공허하면 위를 채우면 되었던 무수히 많은 날들과는 달리 그날은 그저 역만 보려고 왔으니까요. 공허한 느낌이 들다 못해 역이 생경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보통은 풍족함에 대한 기대나 풍족함을 가득 채운 채 이 역을 오갔으니까요.


눈을 감고 승강장의 사람들은 무시한 채 최근을 떠올렸습니다. 최근에도 광장시장에 와서 술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낭만의 낮술은 불가했고, 모두가 회사가 끝나거나 대학원 수업이 끝난 시간에 모여야했습니다. 늦은 저녁에 모여 가볍게 빈대떡과 막걸리를 적당히 먹고 헤어져야 했습니다. 안부 인사를 나눌 때는 흥겨웠으나 서로의 일 얘기와 고단함이 오고 갔고, 풋풋하던 청춘들이 점점 무채색으로 시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즐거웠지만,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술자리에 감돌았습니다. 아마 바빠져버린 지금은 앞으로도 그런 술자리들이 계속 되겠지요.


열차가 지나고 사람이 오고가는 역에서 느껴지는 삶과 시간의 흐름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앞으로도 종로5가역을 찾고 광장시장을 오겠지만, 일상이 통통 튀던 그때의 술자리는 다시 가지기 힘들 겁니다. 다들 바쁘고 힘든 때가 왔으니 당연한 말입니다만, 뭔가 아쉽고 허전합니다. 역을 가득 메우던 막걸리의 짙은 냄새 가득한 이야기들은 이제 과거에 멈추고, 소주의 독한 냄새 가득한 이야기들만 조금씩 남을테니까요. 그래도 어딘가엔 막걸리 같은 삶의 이야기들이 남아있기를 바라며 천천히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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