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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ja May 20. 2023

과거가 아닌 현재의 낭만을 찾아서

미드나잇 인 파리

 ‘벨 에포크(Belle Epoque)’, 이 영화를 가장 잘 대표하는 단어라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2010년대인 현재와 1920년대가 주를 이룹니다. 흔히 일컬어지는 파리의 ‘벨 에포크’는 189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를 의미하죠. 영화에도 한 번 나오기는 하지만, 주된 시대적 배경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벨 에포크라는 단어를 이 영화를 대표하는 단어로 뽑은 이유는 그 정의 때문입니다. ‘좋은 시대’, 파리의 수많은 시대들 중 가장 좋았던 시기라는 뜻입니다. 정의만 봐서는 더 이해가 잘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정의를 내린 이유를 봐보도록 하죠.


 좋은 시대라고 명명한 것은 그 시대를 다 지나고 나서입니다. 미래였던 현재에 와서 현재였던 과거를 보고 명명한 것이죠. 즉 과거를 보며 좋다고 말하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이 단어에 담겨 있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이러한 향수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헐리우드의 고용작가의 삶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순수문학을 쓰기 위해 노력하며 파리의 과거를 생각하고 그것이 이어진 현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향수를 키워나갑니다. 그리고 1920년대의 파리에 도착해서 이러한 파리의 과거에 대한 동경은 커져만 갑니다.


 이런 주인공에 반대되는 사람으로 주인공의 여자친구와 주인공 여자친구의 친구인 폴이 나옵니다. 주인공 여자친구는 헐리우드 고용작가로 돈을 잔뜩 벌 수 있지만, 순수문학을 쓰는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한, 파리의 예술과 그 도시에 담겨진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만을 추구합니다. 폴 또한 이와 비슷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더 별로였습니다. 매우 똑똑하다며 가이드의 말을 무시하고 미술관의 작품에서 작품에 대한 정보만 나열하며 자신을 뽐내기에 급급한 사람이었죠. 작품이 작가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려졌고 다른 관객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고 작품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그저 정보만 나열하려고 하는 현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비판할지언정 이런 사람들은 현대의 수많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자신의 꿈에 대해 응원은 못해줄 망정 어떻게든 돈을 잘 버는 길로 인도하며 주인공의 소설을 깎아내리는 두 사람은 자본주의가 지배한 우리네 삶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이런 것에 대해 고민을 토로하자 주인공과 만난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 아닌 소재는 없소. 내용만 진실하다면. 또 문장이 간결하고 꾸밈없다면.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용기와 품위를 잃지 않는다면.” 매우 이상적이나 낭만적인 그런 말. 주인공은 이 말을 듣고 1920년대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이어나가면서 과거에 점점 집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감독은 좋았던 과거에만 집착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마지막에 1920년대에서 1890년대의 시대로 한 번 더 뛰어넘은 주인공은 거기서 자신이 늘 느끼던 불안감의 정체를 깨닫고 1890년대에서 원래 자신의 시대인 1920년대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아드리아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머물면 여기가 또 현재가 되겠죠. 그러면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할 겁니다. 상상 속의 황금시대.” 아드리아나는 이 말을 듣고도 1890년대에 남습니다. 자신의 감성에 묻혀버려 과거의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것이죠. 결국 둘은 헤어지고 주인공은 현대의 여자친구와도 헤어집니다. 자기 자신 자체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여자친구와 관계를 더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이죠. 결국 그는 동경하고 이상으로 삼아왔던 과거의 향수에 집착하지도 이상 없는 돈만 따지며 꿈을 생각하지 않는 차갑고 껍데기만 남은 현대의 세태를 따라가는 것도 하지 않는 자신만의 길을 택합니다. 이는 영화가 늘 이분법적으로 낮의 파리는 현대, 밤의 파리는 과거를 보여주다 마지막 결말에 주인공이 비 오는 밤의 파리를 걷는 것을 보여줄 때 잘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였던 밤은 현재가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하는 빗속에서의 산책을 택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주인공의 앞으로의 길을 상상해볼 수 있죠.


 영화감독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돈만을 쫓으며 허영심 가득한 현대 시대의 세태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가 벨 에포크 또는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이유는 진짜 좋았던 시대라기보다는 그저 과거에 대한 향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현대의 세태가 불만족스럽더라도 과거의 향수에 빠질 것이 아니라 현대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과거의 어느 시점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어렸을 때이든 아니면, 자신이 살지도 않았던 과거 역사의 어느 시점이든. 하지만, 그 향수는 지금에 대한 도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겠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파리에 있던 예술가들의 작품을 참 좋아하는 저로서도 저 시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있습니다. 파리의 혁명이 안정되고 문화 예술이 모두 급격히 발전하던 시기, 저 시대를 동경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죠. 가끔은 저 시대에 살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 시대에서 다시 살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현실과 마주하는 기분일 것이라는 생각에 이내 쓴웃음을 짓고 말죠. 결국 우리가 접하는 모든 예술은 저 시대의 아름다운 한 단편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시대적 배경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영화의 전개는 빠릅니다. 하지만, 파리의 과거와 현재의 분위기에 심취하다보면 이러한 전개가 급격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전에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에서 독일과 주변국의 낭만주의에 대한 향수를 짙게 느낄 수 있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프랑스의 ‘벨 에포크’와 1920년대에 대한 향수를 짙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정말 잘 묘사해 놓았지요. 다만 <호텔 그랜드 부다페스트>가 그 향수 속에 있었던 과거의 현실적인 갈등을 비유적으로 드러냈다면 <미드나잇 인 파리>는 향수 자체가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비유적으로 드러냈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겠습니다. 굳이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복잡한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당시의 수많은 예술가들을 보며 시대의 분위기를 느끼는 영화로도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비 오는 날 밤에 잠이 오지 않으신다면 비 오는 날 센 강의 분위기를 상상해보면서 이 영화의 감성에 젖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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