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ekja May 21. 2023

아름다운 장면 속 날카로운 시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전에 이 영화에 대해 군 선임과 얘기를 나눈 것이 문득 생각나 찾아보았습니다. 요즘 시간 날 때 책을 열심히 읽는 것도 아닌지라 영화를 보는 것이 그나마 제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란 가벼운 생각에서였습니다. 정말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분홍빛의 색감이 어울리는, 배경이 참 동화 같은 아름다운 장면들이 다수 나와 눈도 즐거웠을 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음악으로 들리는 배경음악이 장면과 사건들과 잘 어우러져 재밌는 이야기로만 봐도 괜찮은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냥 보는 재미로만 영화를 보는 사람이면 참 좋겠지만, 이것저것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거의 강박으로 자리를 잡다보니 영화 속의 이면들을 파헤쳐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연도겠지요. 현재에서 1985년, 1968년, 1932년으로 넘어가는 구성이 눈에 띄었습니다. 점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주는 이 구성은 영화 내의 사건들을 제가 역사적 배경에 끼워 맞추려는 무지한 짓을 범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만들었습니다. 뭐가 됐든 연도가 역사의 전부는 아닌데 말이죠. 특히나 나중에 해석을 보고 영화 내의 사건들과 연도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웠습니다.


 쨌든 역사 속의 배경이 아예 안 사용되는 것은 아니나 대개 허구의 것들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주브로브카 공화국은 폴란드의 보드카 이름이고 호텔 이름은 헝가리의 수도 이름에서 따온 것이지요. 중간에 나오는 쿤스트 박물관은 그냥 예술 작품 박물관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럽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한 이것저것을 적어 보았는데 진짜 지명 이름이기보다는 유럽의 이모저모에서 따와서 지명들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등지의 중동부 유럽의 요소들을 많이 가져왔더군요. 이 지역은 대체로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으로 문화적으로는 대체로 낭만주의에 속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영화는 정말 낭만적입니다. 영화를 흐르는 음악과 배경 그 모든 장식과 요소들. 그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무슈 구스타브조차도 낭만적입니다. 위급한 때에도 즐거운 때에도 낭만시를 읽고 품위를 중시하며 냄새를 지우기 위한 향수를 찾는 그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낭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대표 격입니다. 또한, 이성에서 비롯된 모두의 단결을 중시했던 계몽주의와는 달리 고독한 감성이 넘쳐나는 낭만주의 개인의 모습 또한 드러내고 있습니다. 매춘을 하는 부분에서는 이런 아름다운 유럽의 뒤에 숨은 부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슈 구스타브를 도와주었던 로비 보이인 제로는 이민자입니다. 아니, 난민이지요. 유럽의 사람들과 확실한 차이를 드러내는 동방의 이방인입니다. 거무튀튀한 피부색, 작고 왜소한 체형, 크고 똘망똘망한 눈동자 모두 그가 이곳의 사람들과는 다름을 의미합니다. 그는 아주 성실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대체로 괜찮은 사람으로 묘사되는 편이죠. 그리 영화는 이 사람을 통해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구스타브가 백작 부인의 살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탈출한 뒤 냄새를 지우기 위해 향수를 찾습니다. 하지만, 제로가 그런 것을 가져왔을 리가요. 바로 온갖 모욕을 합니다. 너희 나라에서 살지 왜 우리나라를 왔느냐고 말이죠. 제로의 답변이 충격적입니다. 전쟁으로 가족들이 전부 죽었다. 이 얘기를 듣고 진심을 다해 구스타브가 사죄를 하죠. 제로의 고향은 ‘아크 살림 알자밧’ 없는 지명입니다만, 중동 근처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력이 무너질 대로 무너지자 열강들은 중동 지역에 개입하기 시작하였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제국주의의 총칼을 앞세워 다시 땅따먹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족들 간의 내분을 일으켜 내전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제로는 이 과정의 피해자인 사람이지요. 이에 대한 구스타브의 사과는 구스타브가 상징하고 있는 것이 낭만주의 유럽임을 생각할 때 그저 이야기상의 사과로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치부에 대해 약소국들에게 사과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런 이방인에 대한 차별은 영화 내내 계속 나옵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기차에서 불법 체류자라며 강제로 그를 체포하는 군인들의 모습이겠지요. 이런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영화를 만드는 데 영감을 받은 작가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오스트리아 작가인데 이 사람은 유대인으로 히틀러에게 쫓겨 브라질까지 넘어갑니다. 1930년대 가장 핍박받은 유대인이었던 작가를 생각해보면 제로는 비단 제국주의에 희생된 약소국만이 아닌 파시즘에 희생된 유대인까지도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영화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은 1930년대 중에서도 1932년입니다. 어떤 특정한 년도를 상징한다기보다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동시에 상징할 수 있는 중간 연도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대는 구스타브로 상징되는 유럽의 낭만주의와 개인주의가 철저히 부수어지고, 제로로 상징되는 유대인과 같은 이방인들은 파시즘이나 제국주의의 미명 아래 희생되었던 시대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1932년 이후에 제로가 이 이야기를 작가에게 하는 1968년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1968년 이후로 유럽은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죠. 이 1968년 일어난 혁명으로 독일의 나치당에 대한 철저한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졌고 제대로 된 사과도 이루어졌습니다. 영화 내의 사건들과 당장의 연도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구스타브가 상징하는 낭만주의의 유럽을 1932년의 시대가 분쇄해 버렸고, 그 시대를 청산하여 서로의 상처에 대해 논하는 시기가 1968년부터였음을 봤을 때 이는 충분히 의미를 띤 연도 선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무거운 사회적, 역사적 주제가 아니더라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는 충분히 재밌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시대별로 달라지는 영화 장면의 프레임이나 중간에 나오는 20세기 초 그림들의 오마주를 찾아가다보면 즐거운 영화 감상이 될 거라 믿습니다. 또한, 동화 같은 배경과 그에 맞는 동유럽의 음악과 상황에 맞는 효과음만 들었다하여도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 영상을 보았다는 느낌만으로도 최고라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부문은 미술상, 의상상, 음악상, 분장상이니까요.(물론, 작품성도 뛰어납니다.) 유럽의 낭만주의 분위기가 무엇인지 몰라도 그저 그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는 정도의 영화입니다. 낭만주의 유럽의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서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통해 그 아름다움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사회를 찌르는 날카로운 메시지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과거가 아닌 현재의 낭만을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