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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ja May 19. 2023

꿈을 향해

날씨의 아이

 이런 시국에 좀 웃기기는 하지만 <날씨의 아이>를 보고 왔다.(날씨의 아이 개봉 당시에 쓴 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이란 소리에 휴가를 나오자마자 바로 영화를 보러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도 좋아하지만 개인적인 취향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더 좋아한다. 사실 내용이나 이야기 전개 방면에 있어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위에 있는 것 같지만 내가 애니메이션 영화를 볼 때 더 주목하는 것은 작화이기에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더 좋아한다. 두 감독의 영화 모두 작화가 좋지만 차이가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빛의 효과를 어떻게 내는 지에 중점을 두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바람의 효과 같은 운동감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줄 수 있는지에 중점을 둔다. 미술로 비교하자면 인상주의에서도 빛의 효과에 중점을 둔 모네와 시슬레 등이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움직이는 그 찰나의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했던 드가는 같은 인상주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영화에서도 이런 빛의 효과에 따른 작화는 잘 드러난다. 아니 사실 작화진을 갈아 넣었다는 속된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언어의 정원>에서 보여주었던 비 오는 날의 섬세한 표현과 <너의 이름은>에서 보여주었던 도쿄 곳곳에 대한 극도로 사실적인 표현들이 어우러져 작화만큼은 적어도 내 취향과 기준에선 아주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영화에서 계속 보이는 비가 내리는 도쿄의 풍경 말고도 중간에 나오는 불꽃놀이 장면은 그저 입을 벌리고 계속 쳐다보게 된다. 이런 풍경들을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해서 영화 스크린의 비 올 때의 잿빛 하늘의 우울한 분위기가 나에게 그대로 녹아들었다.


 이런 섬세한 작화와 로맨틱하고 감성적인 분위기로 <초속 3센티미터>와 <언어의 정원>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너의 이름은>에서부터 약간씩이나마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는 자연 재해에 의한 피해를 타임 루프라는 비현실적인 방법을 통해 최소화시키는 이 영화의 스토리는 쓰시마에 의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재난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은 곳곳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던진다. 이 과정에서 일본 토착의 사원인 신사와 그를 담당하는 제사관인 무녀가 나와 영화의 스토리에 일본 전통 신앙에 대해 결합을 시킨 것은 <원령공주>에 시시가미를 등장시키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강의 신인 하쿠를 등장시켰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전개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이 뒤를 이어 이번 <날씨의 아이>에서도 일본 전통 신앙에 일본의 현대 풍경을 결합시켜 완전히 일본적인 정체성을 가진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런 일본적인 정체성을 표현하면서 이번에도 자신이 드러내고자 했던 사회적인 메시지를 영화 속에 넣어놓았다. 처음에 내가 주목한 것은 비였다. 영화 시작부터 도쿄 전역에 내리는 비는 분위기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비는 남주인공이자 가출 청소년인 ‘호다카’가 도쿄에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을 준다. 또한 우산을 푹 눌러쓰고 가느라 밤늦게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호다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은 현대 사회가 개인에 치중하여 얼마나 자신 주변의 사람들에게 무관심한지를 보여준다. 호다카에게 관심을 갖는 경찰관들조차도 그를 그저 하나의 가출 청소년이라 규정하고 잡으려는 노력만 보일뿐 그가 왜 도쿄를 왔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도 묻지 않는다. 


 이런 그가 정착한 곳은 싼값에 어린아이를 알바로 쓰려는 불량한 어른(스가)이 운영하는 한 편집회사이다. 이 스가라는 사람은 호다카에게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만한 가십거리를 찾아 글을 써 돈이나 벌려는 전형적인 현실에 찌든 한 어른이다. 이 과정에서 호다카는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 하늘을 맑게 만드는 여주인공 ‘히나’를 찾아낸다. ‘히나’는 부모님이 없는 상태에서 어린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노력하는 소녀가장이다. 그리고 그들은 맨날 비가 오는 도쿄의 하늘을 맑게 하는 알바를 함께 해가면서 서로 친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과정에서 비로 인해 어두워진 사람들의 얼굴에 잠시나마 웃음을 되찾아준다. 순수한 아이의 기도만으로 하늘이 맑아지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오며 소통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과학과 이성의 학문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하늘과 소통하는 그저 순수한 믿음과 기도를 통해서 해결하고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그 장면이 비현실적이었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이렇게 잘 풀릴 줄만 알았던 도쿄 생활은 호다카가 가출 청소년이면서 전에 쓰레기통에 버려진 총기를 한 번 사용했다는 점이 겹치며 경찰이 뒤쫓기 시작하면서 다시 부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고아가 된 채로 놔둘 수 없다며 히나와 그녀의 남동생 또한 경찰과 아동보호소에서 뒤쫓기 시작한다. 그들은 전혀 묻지 않는다. 왜 호다카가 도쿄로 가출을 했으며 총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남동생과 둘이 살면서 히나가 힘들지 않은지. 하지만 그들은 지금 행복한지. 경찰들은 전혀 묻지 않고 그저 총기를 사용한 가출청소년과 부모님을 잃고 경제적으로 부양할 수 없는 남매라고 그들을 규정지으며 한 명은 체포하고 나머지 두 명은 아동보호소에 넘길 생각만 한다. 


 결국 그들은 경찰에게서 도망치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학생증도 보호자도 없는 그들은 잘 곳도 마땅치 않다. 간신히 들어간 숙소에서 그들은 모든 걱정을 잠시나마 잊고 웃으며 지낸다. 하지만, 신마저도 그들이 느끼는 잠시의 행복을 바라지 않았던지 날씨를 맑게 하는 제물로 히나를 데려간다. 히나가 없어진 걸 안 다음날 아침, 호다카는 경찰에게 붙잡히고 히나의 남동생은 아동보호소에 끌려간다. 호다카는 히나가 없어진 상실감에 괴로워 몸부림치다 히나를 찾으러 경찰서를 뛰쳐나간다. 그리고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라는 곡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히나를 원하는 그 순수한 사랑만으로 그는 요요기에서 신주쿠(사실상 뛰어가기 불가능한 거리라고 친구가 말했음.)까지 뛰어간다. 막 도착한 곳에는 경찰들이 있었지만 불량한 스가와 아동보호소에서 탈출한 히나 남동생의 도움으로 그는 히나가 있는 신의 세계에 들어간다. 그때 들어가면서 외친 ‘제발!’이라는 단어가 정말 나에게 와 닿았다. 아마도 호다카는 그 이상으로 순수한 사랑으로 히나를 다시 데려오기를 원했다. 그리고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냐는 그 노래를 비웃듯이 그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 하나로 히나가 있는 장소로 향한다.


 그리고 다음에 흘러나오는 곡인 ‘Grand Escape'의 가사의 말처럼 중력을 이겨내고 마법처럼 호다카는 히나를 데려온다. 다시 자신이 돌아가면 비가 올 것이라는 현실에 두려워하는 히나에게 호다카는 히나가 더 중요하다며 결국 히나를 데리고 온다. 호다카는 히나가 없는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비가 오는 현실을 택했고 그 탈출은 자신의 꿈이자 자신이 바라는 모두인 히나와 함께였다. 호다카와 히나는 순수한 꿈만을 좇으며 신의 마음을 바꾸었고 도쿄의 지형을 바꾸었다. 삼년 후 도쿄를 다시 찾은 스가는 호다카에게 네가 비를 내리게 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호다카는 잠시 후 기도하는 히나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소망과 꿈과 힘으로 현실을 바꿨음을 강렬히 느낀다. 


 마지막까지 스가는 현실의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쿄가 침수된 것은 어린이들이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며 위로하고 히나가 날씨의 제물이라는 비현실적인 일을 믿느냐고 묻는 그의 모습은 호다카와 히나가 겪은 과정을 묻지 않고 그저 결과만을 보며 쉽게 단정 짓고 있다. 이런 모습은 사회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때가 잔뜩 묻어버린 어른들은 돈이라는 가치를 중시하고 그런 가치를 무시하고 사는 사람을 비현실적이라며 손가락질한다. 또한,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에 대해 묻지 않고 한 사람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결과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한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은 ‘현실’이라는 비참한 상황에 묶인다. 그리고 이것은 족쇄가 되어 꿈이라는 목적지에 갈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사회적 계약으로 만들어진 법이나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 좋아하는 것 그것만이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그런 순수함은 아이들에게 꿈이라는 목적지에 다가갈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지만 어른들은 법이나 돈에 대한 세뇌를 통해 점점 ‘현실’이라는 상황을 인지시키고 그들의 날개를 꺾는다. 그리고 자신들의 테두리와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아이들을 어른들의 기준으로, 오만한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판단해 평가를 내린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위의 어른들처럼 다시 족쇄를 다는 악순환에 빠져버린다.


 이 기준에서 사실 이 영화는 현실에 찌든 어른과 아이의 이분법적 갈등구조만 부각시킨 것 같지만 나츠미라는 인물을 넣음으로써 그런 편 가르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나츠미는 스가의 사촌이자 현재의 청년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아이들이 꿈을 좇는 순수한 사람을 대변하고 어른들이 현실에 틀에 박혀서 돈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생각하는 사람을 대변한다면 꿈을 마음속에 품고는 있지만 그 꿈을 접어두고 현실에 적응하려 발버둥치는 우리 세대를 보여준다. 작중에서 나츠미는 하늘을 맑게 하는 소녀를 찾는 기사를 돈으로 보려하는 호다카에게 한심한 어른이 되지 말라며 길을 바로 잡아주고 히나를 찾으러 가는 호다카를 경찰서에서 도망나오는 데 도와주는 낭만적인 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곳저곳의 회사에 가서 여기가 자신의 1지망이라며 자신을 어필하지만 그 어디에도 취직하지 못하는 모습은 현실에 적응하려 애쓰는 현실의 20대를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나는 작중의 어떤 등장인물보다 나츠미에 공감했고 또한 나츠미를 통해 나에게 질문할 수 있었다. “나는 현실에 타협 중인가? 아니면, 올곧게 꿈을 향해 나아가는 중인가?”


 김대중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선비의 문제의식에 상인의 현실감각을 가져라.” 과연 나는 상인의 현실감각에 내 꿈을 묻어두고 선비의 문제의식처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전구로 세상을 밝게 만들어보겠다는 아름다운 꿈을 가진 에디슨도 테슬라와의 직류, 교류 전기 싸움에서는 그저 돈만 바라보는 추한 사람으로 바뀌었듯이 내가 바라는 미술 평론가 또는 학예사의 길을 올곧게 걸을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나는 평생을 순수한 아이처럼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피카소가 남기 유명한 말이다. 피카소가 결국 닿고자 했던 곳은 자신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위해 거침없이 뛰어드는 순수함을 가진 호다카와 히나가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내가 걷고자 하는 길도 썩 현실적인 길은 아니다. 예술이란 것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지 사람을 편하게 하는 과학이나 돈이라는 물질적인 것과는 꽤 거리가 먼 편이니까. 지금의 나도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꿈을 향해 계속 노력하면서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 노력해야겠다. 마치 경찰의 추격도 도쿄의 비 오는 날씨도 상관없이 히나를 구하기 위해 뛰었던 호다카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중학교 때 아주 인상 깊게 읽었던 책 제목을 인용하여 이 글을 끝내자 한다.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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